Kings RAW novel - Chapter 156
제155화 제길, 더럽게 뜨겁군
온 무림의 주목을 받았지만 정맹 태평전에서 치러진 무왕과 도왕의 대결은 내용도 결말도 싱겁기 그지없었다.
양인은 마치 약속 비무를 하듯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초식을 사오십 초가량 주고받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봉과 칼을 거두고는 본인의 패배를 선언해 관전자들을 아연실색케 했다. 무왕은 도왕이 손속에 사정을 두었다며 그의 승리라 주장했고 도왕은 무왕의 무력이 자신을 능가한다며 진정한 정파지존이라고 치켜세웠다.
당사자들에겐 훈훈한 마무리였을지 모르나 지켜보는 이들의 눈엔 황당하기까지 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의 비무를 두고 짜고 친 도박이라 욕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남들이 뭐라고 떠들건 무왕과 도왕은 서로에 대한 지극한 존중을 보여주며 친교를 맺었다. 무왕이 맹주 위까지 양도할 의사를 밝히자 도왕은 극구 고사하는 수준을 넘어 하늘에 태양이 둘 일 수 없다며 무왕이 있는 한 아예 정맹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 홀연히 강호에서 사라졌다.
그러고는 일 년쯤 후 그 유명한 두주혈사(杜州血史)에서 마왕과 경천동지할 결전을 치른 후 대야벌에 도천(刀天)을 창립하고는 평북 무림에 똬리를 틀었다.
* * *
나는 만인의 궁금증을 대변했다.
“실제로는 어땠습니까?”
알아들었을 터임에도 무왕은 시치미를 뗐다.
“뭐가 말이냐?”
“어르신과 도왕의 무력 말입니다. 누가 더 셌습니까?”
“그이가 나보다 위였다.”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
“차라리 무승부라면 이해가 가지면 둘 다 승리하거나 패배할 수는 없으니 한 분은 거짓말을 한 셈이잖습니까?”
“…….”
“제가 보기엔 어르신이 아주 미세하나마 우위를 점했으리라…….”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럼 정말로 도왕이 어르신보다 상수였습니까? 겸양지덕은 잠시 내려놓으시고 솔직히 말씀해주십시오.”
“…….”
“답을 듣기 전까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무왕이 어깨로 내 가슴을 들이받았다. 불의의 기습에 나는 삼보나 밀려났다.
제길.
하마터면 욕설을 뱉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목구멍에 가두었다. 실은 기분이 유쾌했다. 무왕에게 이런 장난스러운 면모가 있었다니.
“움직였으니 답도 줄 수 없다.”
“정 이렇게 야박하게 나오신다면 저도 앞으로 어르신의 수련을 도와드리지 않겠습니다.”
아뿔싸. 말이 헛나왔다. 아쉬운 쪽은 무왕이 아니라 나이거늘.
“그러던가. 이제 가 보거라.”
“그러지 마시고 그와 얽힌 사연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야 다음에 제가 그를 만났을 때 태도를 확실히 정하지 않겠습니까? 적으로 간주하고 가차 없이 목을 날릴지, 아니면 사정을 알아볼 여지를 둘지 말입니다.”
이번엔 제대로 찔렀다. 무왕의 시선이 천공으로 올라갔다. 그가 내막을 실토하리라는 전조였다.
한참이나 내 인내심을 시험하던 무왕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이의 내기를 접한 순간 알았다. 필생의 호적수임을. 그런 느낌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이의 칼을 받은 직후 그 느낌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나중에 물어보니 그이도 나와 똑같았다더구나. 기실 그이에게 확인하지 않았어도 알고 있었다. 그이 역시 나에게 동일한 느낌을 가졌으리라는 걸. 그러지 않았다면 그렇게 조심스러운 공방전을 벌이지는 않았을 터이니. 우리는 시종여일 자신이 아니라 상대의 안위를 염려했더랬다.”
문득 괴선과 광객이 떠올랐다. 무왕과 도왕의 관계는 그들과 놀랍도록 흡사했다. 하지만 내 친인들이 악착같이 우열을 가리려 했던 반면 왕들은 서로를 배려하는 척하며 철저하게 몸을 사렸다는 중대한 차이점이 있었다. 검황자와의 승부들에서 보듯 나는 당연히 전자에 속하는 부류였다.
“우리가 제대로 싸웠다면 필히 동귀어진 했을 게다. 이를 그도 알고 나도 알았다. 호승심보다는 상대에 대한 호감이 더 컸기에 우리는 반 보씩 양보했다. 그러다 이대로는 끝이 나지 않을 것임을 공감하고는 손을 내렸다. 그 다음은 네가 아는 바대로다.”
“그 비무 이후 도왕은 바로 정맹을 떠나지 않고 어르신의 처소에 얼마간 머문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무 일도 없었다. 우리는 그저 나흘 밤낮을 무학에 관한 소견을 주고받았을 뿐이었다. 그이의 무론을 경청하는 내내 탄복을 금치 못했다. 참으로 심오한 경지에 이르러있더구나.”
“정맹을 나서면서 사람들에게 하늘에 뜬 두 개의 태양 운운했다던데요.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내 처소를 나가면서 그러더구나. 가문을 재건하겠다는 꿈은 접은 지 오래고 정파제일인이 되고자 하는 목표도 포기했으니 앞으로 천하를 떠돌며 유유자적 살겠노라고. 나는 사마가 득세한 형국이니 정파 무림을 지키는데 힘을 보태달라고 그이에게 요청했다. 그랬더니 자기가 정맹에 남아있으면 파벌이 생기는 등 탈이 날 거라면서 다른 방식으로 나를 돕겠다고 하더구나.”
도왕은 그 약속을 지켰다. 그가 창립한 도천은 북방에서 마련을 견제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검총처럼 중립을 표방했지만, 그리고 소수의 정예들로 이루어진 검총과 달리 어중이떠중이들의 집합체임에도, 도왕의 성향으로 인해 도천은 정파 세력으로 간주되었다. 도천을 두고 정맹의 분파라고 비아냥거리는 자들도 숱하게 많았다.
나는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렸다.
“그랬던 이가 왜 뚱딴지 같이 마왕을 돕고 있을까요?”
무왕은 묵묵부답했다.
“모를 때는 물어보는 게 최선입니다. 조만간 저와 함께 마련을 방문하시지요. 가서 도왕에게 마왕과 붙어있는 이유를 물어보십시오. 어르신이라면 그가 답을 줄 것도 같은데요. 어떻습니까?”
무왕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감지했다. 바람직한 징조였다.
* * *
무왕과 다시 한바탕 격전을 치르고 나니 푸른 하늘이 어느새 노을로 벌겋게 물들어있었다.
명교로 돌아간 나는 낭왕의 처소로 배정된 인보당(人寶堂)에 들러 마침 그곳에 와있던 소면통달과 잠시 환담을 나눈 후 구세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독왕의 내단이 심술을 부렸을 때처럼 몸이 무거웠다. 하지만 나는 천근만근 같은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계속 나아갔다.
사흘이나 지났으니 오늘은 결판을 내야 했다. 해야 할 일을 미루는 건 적성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심란함만 가중될 뿐이었다.
구세원에는 무영밖에 없었다. 그에게 수련장으로 가서 이광을 불러오라고 이른 후 다실(茶室)에서 기다렸다.
일각 후 무영이 네 사람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광, 강태수, 광객, 그리고 검황자였다. 다들 심각한 표정들이었다. 아무도 의자에 앉지 않았기에 나도 일어섰다. 그러고는 안색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진 이광을 내려다보았다.
“네가 저지른 짓에 대한 처분을 내리겠다.”
모두들 숨을 죽였다. 나는 군더더기를 생략하고 요점만 밝혔다.
“너는 이제부터 내 벗이 아니다.”
이광이 울먹였다.
“큰 형님…….”
“그렇게 부르지 마라. 앞으로는 알은 체도 하지 말고. 나는 너를 지웠으니 너도 나를 잊어라. 너를 거둔 결정도 철회할 참이니 여기를 떠나라.”
강태수를 비롯한 친인들이 이광의 용서를 간청하기 전에 말을 덧붙였다.
“단, 네가 스스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할 때.”
축출의 유예에 강태수가 노골적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큰 형님, 저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지 않았더냐? 또 명을 어기면 눈알을 뽑아버릴 테다.”
다행히 이광은 내 의지를 시험하지 않았다. 나는 내 눈치를 보는 친인들을 두고 다실을 나갔다. 귀곡성 같은 이광의 흐느낌이 구세원 입구까지 나를 따라왔다.
너무 가혹한 처사라고 비난할 텐가?
누구나 실수하기 마련이고 더욱이 어린아이 아니냐고?
동의한다. 절반만.
실수에도 종류가 있다. 만회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이광은 도자기를 깨뜨린 게 아니라 물을 엎지른 실수를 저질렀다. 도자기는 어찌어찌 붙일 수 있으나 물을 도로 담는 건 불가능했다.
전날 이광이 토설했을 때 아버지를 배신했던 노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광이 범한 짓은 그 노인보다 죄질이 나빴다. 노인은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인생을 열어준 은인의 부탁을 물리치기 어려웠던 반면 이광은 순전히 제 이익을 위해 독의의 지시를 이행했다. 이 차이는 컸다.
아이라서 눈 감아줘야 한다는 주장에도 반박하고자 한다. 아이도 천차만별이 아닌가. 제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철부지들도 많지만 어른 못지않은 식견과 경험과 지모를 가진 아이도 없지 않다. 이광은 단연 후자에 속했다.
예닐곱 살 소동으로 보이는 앳된 용모지만 이광은 올해 열한 살이었다. 물론 그것도 어린 나이이긴 하나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만큼이나 노회한 구석이 있었다. 아홉 살에 고연에서 전원까지 삼천리가 넘는 장도를 혼자서 횡단한 것만으로도 보통내기가 아님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이광을 헐뜯고자 하는 소리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용기와 과감한 실행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의 야무진 처세를 높이 평가했다. 얼마나 기특하고 대견했던가.
나는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그 소년을 내 아이처럼 여겼다. 그리고 그에게 품었던 애정의 크기만큼 고통스러웠다. 하여 이광을 내 마음에서 끊어낸 것은 분노의 칼날이 아니라 슬픔의 비수였다.
* * *
구세원을 나서고 열 걸음도 옮기기 전에 검황자가 나를 쫓아 나왔다. 나는 그가 이광에 대한 처분을 재고해 줄 것을 요청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빗나갔다.
“가소롭게 들릴 걸 알지만, 허락한다면 형과 비무를 하고 싶소.”
“허락은 무슨. 너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가자.”
나는 검황자를 데리고 장왕이 발광을 부리는 장소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흠모의 감정을 담은 시선들이 달라붙었다. 여기저기서 신음성들도 들렸다. 검황자를 본 여인들이 보내는 반응이었다.
전날 전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검황자는 명교에 온 지 이틀 만에 수백, 수천의 여인들에게 상사병을 안겨주는 기염을 토했다. 나와 친인들의 거처로 정해진 후 일종의 금역(禁域)이 된 구세원 주변에도 검황자를 일견하겠다는 일념으로 무장한 여인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사내를 무시하기로 유명한 귀면나찰조차 온갖 핑계를 대며 풀 방구리 쥐 드나들 듯 구세원을 출입하고 있다고 소면통달이 귀띔했다.
나는 검황자에게 집중된 시선들을 털어내듯 팔을 휘두르며 투덜거렸다.
“제길, 더럽게 뜨겁군. 이러다 얼굴 녹겠네. 안 되겠다. 앞으로는 면사라도 쓰고 다녀라.”
농담이었지만 검황자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는 게 낫겠소?”
“그래, 인마. 저러다 저 여자들 심장이 다 녹아버리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알겠소. 면사는 좀 그렇고, 죽립을 쓸까 하오.”
검황자와 한가로운 잡담을 나누고 있자니 이광으로 인해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은 풀렸다.
반 식경 후 우리는 명교 내의 또 다른 금역이라 할 이천 평 구덩이에 이르렀다. 어미닭을 쫓는 병아리 떼처럼 우리를 따라왔던 여인들은 감히 구덩이가 있는 구역에는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여기서 하자.”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황자가 나보다 앞서 아래로 뛰어내렸다.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군.
뒤이어 몸을 날린 내가 그의 오륙 장 앞에 서자 이미 녹슨 철검을 뽑아들고 있던 검황자가 예를 차렸다.
“가르침을 받겠소.”
나는 왼손으로 철봉을 꺼내며 오른손을 까딱거렸다.
“덤벼!”
검황자의 칙칙한 검에 시퍼런 예기가 번득였다. 짝사랑하는 임을 본 소녀마냥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력과 무관하게 목전의 미청년은 항상 나를 흥분시켰다.
검황자가 내게 검을 겨누었다. 그러자 검첨에서 여섯 가닥의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나도 딱 그 숫자만큼의 광우를 발출했다. 내가 쏘아낸 빛줄기는 검황자의 탄강들을 공중에서 쳐내는 신기를 과시했다.
“핫!”
기합성과 함께 검황자가 위로 도약했다. 나는 제자리에서 그를 맞았다.
캉!
내 철봉과 그의 검이 부딪치며 본격적인 비무의 시작을 알렸다. 초수가 늘어남에 따라 우리의 낯빛은 점점 대조적으로 변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