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6
제15화 제길, 세군
허공에 펼쳐진 고리들이 한 데 얽혀 그물을 이루었다.
단천검은 그물들을 베고 또 베었다. 하지만 칼에 갈라진 물처럼 형체를 복원한 내 천라도망(天羅刀網)은 집요하게 그를 조여 갔다. 그러는 동안 철봉에서 발출된 번개가 끊임없이 그의 요혈을 노리고 날아갔다. 어느 하나라도 직격당하는 날엔 참사를 면치 못할 것이었다.
어느새 주도권을 내준 단천검의 낯짝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역전일 터였다.
기실 나는 고작 소(簫) 하나를 더 꺼내들었을 뿐이었다. 무기를 두 개 부린다고 무력이 두 배 더 강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보통은 그 반대였다. 절정 이상의 무인들 중에 쌍검이나 쌍도를 실전에서 동시에 쓰는 자가 사실상 전무하다는 것이 그 반증이었다. 그런데 내가 두 개의 무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각기 다른 무공을 구사하고 있으니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심중의 혼란을 고스란히 드러낸 단천검의 눈을 보며 나는 그가 승부수를 띄울 작심임을 알아차렸다. 어떤 수를 들고 나올지 받아보고 싶었지만 생각을 바꿨다. 양패구상이나 동귀어진까지 각오한 수법임을 예감해서였다. 그리 되면 끝장을 볼 수밖에 없었다.
원천지기를 쥐어짠 건지 단천검의 기운이 순간적으로 폭증했다. 나는 선수를 쳤다. 내 옥소 구멍에서 발출된 쇠구슬 세 개가 그의 무릎과 하초를 노리고 날아갔다. 단천검이 허둥지둥 댔다. 전혀 예상치 못했을 터인데다 내가 그의 호흡을 뺏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일시지간 중심이 흔들린 단천검에게 맹폭을 가했다. 단천검은 아홉 개의 고리를 잘라내고 세 개의 뇌전을 쳐냈지만 극치의 섬(閃)을 발해 그에게 짓쳐든 나에게 일권을 허용하고 말았다.
내 주먹을 명치에 맞고서 피분수를 뿜으며 날아가는 단천검을 뒤쫓아 그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혈도를 점했다. 그러고는 목석처럼 굳어버린 그의 오른팔을 잡아 팔꿈치를 부러뜨렸다.
놀랍게도 단천검은 비명이 아니라 호통을 질렀다.
“무슨 짓이냐?”
“몰라서 물어? 내 팔들을 자를 심산이었으면 늙은이도 팔 한 짝은 내놓아야 할 것 아냐? 안 그래?”
단천검이 원독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너무나 힘을 준 탓에 그의 안구가 터질 듯했다. 나는 히죽거리는 웃음으로 응수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예전만큼 손을 놀리진 못하겠지만 잘린 것보단 낫잖아? 뭐, 정 회복이 안 되면 나처럼 좌수검을 익히던가. 혹시 알아? 십 년쯤 지나면 지금보다 더 강해질지.”
“…….”
“그냥 하는 말이 아냐. 실제로 늙은이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으리만치 중한 내-외상을 입고도 각고의 노력 끝에 배전의 무력을 기른 이가 있으니까. 그 분이 처했던 악조건에 비하면 이 정도는…….”
“나를 죽여라.”
“어허, 어디서 되도 않는 허세를.”
“죽여라. 지금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헉!”
내가 왼팔을 붙들자 단천검이 경악성을 토해냈다.
“왜? 죽여 달라며? 어차피 죽을 거라면 양팔이 다 박살이 나든 말든 뭔 대수야?”
“…….”
단천검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노골적인 비웃음을 머금고서 그의 팔을 놓아주었다.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 늙은이. 마지막에 결단을 좀 더 빨리 내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을 테지? 그랬으면 승패가 바뀌었을 테고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을 텐데, 하며 말이야.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늙은이가 본 게 내 힘의 전부였을까?”
단천검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는 정색했다.
“잘 들어, 늙은이. 요 며칠 내 기분이 별로야. 그렇다고 늙은이에게 화풀이를 한 건 아니야. 나는 늙은이처럼 제 감정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엄한 사람에게 행패를 부리는 소인배가 아니라고. 하지만 경고하는데 더 이상은 나를 자극하지 마. 그러다 진짜로 목을 꺾어버리는 수가 있어.”
“…….”
“내가 늙은이의 명줄을 붙여놓은 이유는 다섯 가지야. 다 늘어놓긴 귀찮으니까 하나만 알려줄게. 집으로 돌아가서 졸개들 단속을 하라는 뜻이야. 그치들이 주제 파악을 못하고 내게 복수한답시고 설치면 뜯어말리라고. 만약 다시 한 번 나를 건드리면 태극검문은 지상에서 소멸될 거야. 알아들었어?”
단천검에게선 응답이 없었다. 나는 협박이 먹혔는지 확인하지 않고 그의 마혈을 풀어주었다.
“이제 꺼지시지.”
바닥에 떨어진 보검을 검갑에 수습한 단천검이 마당을 떠났다. 패잔병처럼 축 쳐진 등짝을 보이며.
수풀에서 나온 진청운은 귀신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내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구먼. 단천검을 이기다니.”
나는 짐짓 인상을 썼다.
“제가 그렇게 못 미더웠습니까?”
“아닐세. 그랬다면 그 아이가 아무리 간청했더라도 단천검을 자네 앞에 데려다주지 않았을 걸세. 나는 다만 순수하게 놀랐을 뿐이네. 정말로 그를 꺾다니. 오늘의 일전이 세상에 알려지면 자네는 검황자에 버금가는 위명을 얻게 될 걸세.”
귀가 솔깃했다. 명성을 얻을 거라는 말에 혹해서가 아니라 진청운이 언급한 별호 때문이었다.
검황자(劍皇子).
괴선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당금 무림 최강의 후기지수로 불리는 자였다. 아니, 단순히 그 정도를 넘어 일천 년 무림사에서 최초로 검황(劍皇)의 칭호를 얻을 지도 모른다는 평가를 받는 초신성이었다. 두 달 전 소양검파의 검호 사일검(斜日劍)을 상대로 그 나이 때의 천하십왕 누구와 비교해도 월등한 무위를 현시했기 때문이었다.
검황자를 떠올리자 내 속에서 강렬한 호승심이 일었다. 그와는 조만간 만나게 될 터였다. 그는 벙어리 아저씨의 원을 들어주기에 제격인 상대였다.
“어서 가세나. 그 아이가 목이 빠져라 자네를 기다리고 있을 걸세.”
진청운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소월루가 아니었다. 사당에서 칠팔십 장 떨어진 둔덕 너머에 자리한 모옥이었다. 모옥 밖에 강태수가 나와 있었다.
“오셨습니까, 루주님.”
진청운에게 인사를 한 강태수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존경심이 듬뿍 담긴 눈을 마주보며 나는 그녀가 둔덕에서 나와 단천검의 비무를 관전했음을 알았다. 사당과의 거리가 상당했으나 달빛이 밝고 시야가 트인 데다 그녀는 절정의 고수였으니 우리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데 별 지장이 없었을 터였다.
“정말 굉장했어요.”
강태수의 감상에 나는 우쭐거렸다.
“뭘 그 정도를 가지고. 그런 늙은이쯤은 한주먹거리에 불과하오.”
인정한다. 나는 겸양지덕과는 거리가 먼 위인이다.
아버지를 닮은 입술을 비틀어 쓴웃음을 지어보인 진청운이 말했다.
“들어가게. 나는 사태를 수습하러 가 봐야하네. 나중에 다시 봄세.”
진청운은 돌아가고 강태수는 밖에 남았기에 나는 혼자 모옥에 발을 들여놓았다.
진소월이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나를 맞았다. 흐뭇했다.
“강 언니에게 듣고 있는 동안 간이 졸아들다 못해 녹을 뻔했어요. 처음에 고전한 것은 그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작전이었나요?”
“그런 의도가 없지는 않았소. 전부는 아니지만.”
“강 언니 말로는 전 공자가 도법과 검공을 동시에 구사하는 것 같다던데, 사실인가요?”
“그렇소.”
“아! 좌검우도(左劍右刀)는 공상(空想)이자 망상으로 판명난지 오래라고 알고 있는데 학림수호령들이 이뤄냈군요.”
진소월의 오해를 바로잡아주려는데 그녀가 그럴 겨를을 주지 않고 화제를 전환했다.
“이제 이해가 돼요. 그렇게 강하니 신필주에게 복수할 마음을 품을 수 있었겠죠. 하지만 그가 현가를 뒷배로 삼은 이상 단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현가는 태극검문과는 차원이 다른 상대니까요.”
나는 이참에 궁금증을 해소하기로 했다.
“하나 물어봅시다. 만약 중원육기의 괴선이 보성 현가와 붙는다면 어떻게 되겠소?”
질문에 담긴 의미를 헤아린 진소월이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전 공자의 무력이 괴선과 비견할 정도인가요?”
“넘겨짚지 마오. 그냥 물어본 거요.”
“그래도 괴선을 거론한 것은 그 어른과 견줄만한 힘이 있다는 뜻이겠죠?”
“안평에서 우연히 만났소. 그때 가볍게 손을 섞었었소.”
“아!”
진소월은 괴선과의 인연에 대해 더 듣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으나 나는 모른 척했다.
“아무튼 그 노인네하고 보성 현가하고 붙으면 어찌 되겠소?”
“괴선이 속한 중원육기는 독보강호(獨步江湖)하는 고수들 중 단연 최강자들이에요. 십왕을 제외하면 누구도 그들과 일대일로 싸워 이길 거라 장담할 수 없어요. 정파오대세가나 사파칠문(邪派七門), 혹은 마도팔류(魔道八流)의 수장들이라고 해도.”
“허풍이 아니었군, 그 노인네.”
내 중얼거림을 듣고서 고소를 머금었던 진소월이 이어진 질문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대체했다.
“그래서 그 노인네가 보성 현가를 누를 수 있다는 거요?”
“아무리 중원육기가 강해도 혼자서는 오대세가 중 어느 곳과도 맞설 수 없어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명료해요. ‘불가능’이죠. 일단 보성 현가엔 괴선에 맞먹는 초절정 극상의 고수가 있어요. 여의수(如意手) 현주경(玄柱京)이라고, 들어보았나요?”
내가 고개를 젓자 진소월이 설명을 이었다.
“그는 현가의 전대가주이자 정파 칠대고수의 일인이에요. 능히 괴선과 자웅을 결할 수 있는 인물이죠. 현가엔 여의수 말고도 중원 전역에 무명(武名)을 알린 강호들이 즐비해요. 이것으로 대답이 되었나요?”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만약 괴선과 비슷한 수준의 무인이 그와 편을 먹으면 어떻겠소? 그래도 현가에 밀리오?”
“사활을 걸고 현가와 대립할 거라 가정할 시 그들과 대등한 전력이 되려면 중원육기의 절반이 나서야 해요. 그래도 백중열세일 거예요.”
“제길, 세군.”
“명문대파가 무서운 점은 드러난 세력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저력에 있어요. 설령 중원육기 전원이 의기투합해 현가를 압박한다고 해도 그들을 몰살시키지 않는 한 최종승자는 현가가 될 공산이 커요. 생존자들이 강력한 후인들을 키워 전성기가 지난 육기를 응징할 테니까요. 내가 멋대로 그리는 그림이 아니에요. 역사가 여러 차례 증명한 바 있어요.”
새삼스럽게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파의 일개 가문이 그렇게나 강대하다면 무림 전체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강해져야 할까. 언제나 되어야 그런 절대무력을 갖출 수 있을까. 절곡을 떠나며 염두에 두었던 오 년이라는 기간은 턱 없이 짧아보였다. 오 년은커녕 오십 년이 지나도 달성할 수 있을는지 의문이었다.
문득 주먹을 불끈 쥐었다. 까짓 것 한 번 해 보자! 내가 아니면 천하의 누가 해낼 수 있겠는가!
투지를 되찾은 나는 실실 웃었다. 맥락 없이 헤죽거리는 나를 진소월이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