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64
제163화 언제 돌아올지는 예정할 수 없소
노인의 입에서 예상했던 답이 나왔다.
“모르오.”
나는 무언으로써 노인을 압박했다. 노인이 하는 수 없이 답을 반복했다.
“정말 모르오.”
“그가 독의의 시신을 직접 받지 않았단 말인가?”
이번에도 부인하면 고문을 할 작정이었다. 시간 상 직접 절곡에 가지는 못했더라도 독의가 ‘보물’의 인수를 다른 자에게 맡겼을 리가 없었다. 내 속을 읽은 듯 노인이 바로 인정했다.
“그에게 전했소.”
“어디서?”
“…….”
“답이 늦을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부러뜨려주지.”
딱히 내 협박에 겁을 먹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노인이 순순히 불었다.
“성주 무림의 진포였소.”
귀에 익은 지명이었다. 기억을 뒤져보니 작년 구월 초하루 검총에서 검황자와 결정전을 치른 후 진소월을 데리고 절곡으로 귀환하다가 그녀가 광객에게 정보 수집을 위해 보냈던 곳임이 떠올랐다.
“그는 누구와 함께 왔나?”
“혼자였소.”
“거기서 헤어졌고?”
“그렇소.”
진위 여부를 확인해야 했지만 나는 노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기대했던 실마리가 무용지물이 되자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당신은 어느 쪽이었나?”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반문했다.
“무슨 말씀인지?”
“내 친인의 팔을 비틀었냐고? 아니면 말렸나?”
“…….”
“대답 안 해?”
“말리는 쪽이었소.”
“왜 그랬지?”
“독의가 이르길 그곳에 있는 독인이 독왕의 시신을 훼손하는 등 심하게 저항하지 않는 한 되도록 건드리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오.”
좋은 징조였다. 독의는 역시 건너올 다리를 완전히 불사를 의사는 없었던 것이었다. 물론 그런다고 봐 줄 생각은 붕어 코털만큼도 없었다.
나는 문답을 계속했다.
“독의에게 내 뜻을 전할 수단이 있나?”
“미안하지만, 없소. 그가 연락하지 않는 한 그와의 소통이나 접촉은 불가능하오.”
“다른 쪽은 어때?”
“……확언하기는 어려우나 그이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하오.”
“그자는 누구지?”
“……답할 수 없소.”
“손가락, 아니 손목이 부러져도?”
“그렇소.”
“당신 가문이 해를 입어도?”
“……이 사안은 본가와는 무관하오. 전적으로 나 개인이 벌인 일이었소. 바라건대 전날 금풍검에게 했듯 나를 징치하는 선에서 그쳐주오. 내 목을 달라면 주겠소. 어떤 원망도 하지 않겠소.”
“당신에 관해 내 친인에게 들은 적이 있어. 꽤 평판이 좋더군. 당신 같은 자가 어째서 독의 같은 악당의 수족 노릇을 했나?”
“…….”
“이것도 비밀이야?”
“……그는 내 은인이었소. 정확히 말하자면 내 여식의 생명을 구한 은인이었소.”
“좀 더 자세히 말해봐.”
“…….”
“마지막이야.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
“……내 처가 마흔 줄에 들어서서 얻은 아이였소. 노산 탓인지 딸아이는 나면서부터 병치레가 잦았소. 그러다 다리에 문제가 생겨 보행에 어려움을 겪는 신세가 되었소. 하지만 우리 부부는 그 아이를 끔찍이 사랑했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어여쁘다는 표현이 빈말이 아님을 실감할 정도로.
그러나 내 딸아이는 갈수록 병약해졌소. 네 살 무렵엔 걷지 못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생사를 염려해야 할 정도로 위태로워졌소. 약왕전의 의원들은 물론이고 은밀히 명교 구세원의 수의(首醫)들까지 초빙해 딸아이를 돌보았으나 하나같이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떠날 거라는 진단만 내놓는 통에 절망만 깊어졌소. 그대로 딸아이를 보낼 수는 없었소. 하여 독의를 찾았소. 부른다고 올 이가 아니었기에 내가 그의 행방을 수소문해가며 온 대륙을 돌아다녔소. 사벌의 양해를 구하고 군서에 들어가서야 겨우 그를 볼 수 있었소.
독의는 자기의 처치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며 딸을 살려달라는 내 청을 매몰차게 거절했소. 나는 그에게 매달렸소. 열흘 내내 간청해도 꿈쩍도 않던 그가 넌덜머리가 난다며 한 번 가보자고 하더이다. 그러면서 두 가지 조건을 달았소. 하나는 딸아이가 처치 도중 죽더라고 책임을 묻지 말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딸아이를 살리면 장차 그의 청을 세 번 들어달라는 것이었소. 찬 밥 더운 밥 가릴 계제가 아니었기에 무조건 수락했소.
독의는 가히 신의(神醫)였소. 천하의 내로라하는 명의들이 이구동성으로 가망이 없다고 포기했던 딸아이를 소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다시 걸을 수 있도록 해주었소. 비록 약간 절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감읍하지 않을 수 없었소. 나는 그의 은혜를 평생 잊지 않으리라 맹세했고 그가 어떤 지시를 하건 따르리라 다짐했소.
그로부터 이십이 년 간 독의는 감감무소식이었소. 마치 그 일을 잊은 것처럼. 그러다 지난 달 하순에 급전을 보내 ‘매우 중요한 청’이 있으니 ‘꼭’ 들어달라고 하더이다. 나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요구였소. 그래서 그 일을 행한 것이었소.”
봇물이 터진 듯 말을 쏟아내던 노인이 숨을 골랐다.
“나와 관련된 일임을 몰랐나?”
“……짐작하기는 했소. 석 달 전 독곡에 갔던 전왕이 독왕의 시신을 갖고 중원으로 향했다는 정보를 들었으니.”
“그럼 들켰을 때 대가를 치를 각오도 했나?”
“그렇소. 다만 좀 전에 말했듯 어디까지나 내 사사로운 인연에서 비롯된 행사였으니 나만 처벌해주길 간곡히 부탁하오.”
“싫다면?”
노인의 동공이 암울함으로 물들었다.
“나는 전왕이 한 사람의 잘못을 빌미삼아 무고한 이들에게 죄를 묻는 무도한 이가 아니리라 믿소.”
“제길,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나를 판단하지 마. 당신이 한 일의 여파로 괴선은 전신불수가 되고 내 친인들이 납치당했어. 다른 친인들 사이엔 금이 가고. 그런데도 내가 당신 목 하나로 끝내야 돼?”
“……미안하오. 하지만 제발 다른 이들에겐…….”
“됐어. 나가봐.”
“……?”
“안 들려? 나가라고.”
“무슨 말씀이오?”
“이게 어려운 말이야? 당신하고 더 할 얘기 없으니까 꺼지란 말이야.”
“그러면 어떻게…….”
“잡소리 그만 하고 나가. 마음 바뀌기 전에.”
“나를 봐 주겠단 말이오?”
“그럼 진짜로 목을 꺾어줄까?”
“……고맙소, 전왕. 정말 고맙소.”
나는 파리를 쫓듯 손을 내저었다. 노인은 바닥과 평평해 질만큼 상체를 구부려 감사를 표한 후 방을 나갔다. 그러고는 일다경도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 * *
방문객을 알리는 방울소리에 족자의 손잡이로 응낙의 의사를 전하기도 전에 문이 열리더니 사각턱의 노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또 뭐요?”
내 목소리에 섞인 짜증에 아랑곳없이 노인이 한달음에 내가 서있던 창가로 달려왔다.
“방금 이 서신을 최대한 신속하게 전왕에게 전달하라는 독의의 청을 받았소.”
노인이 내민 직방형의 첩지를 펴보니 취객이 쓴 것처럼 삐뚤삐뚤한 글씨가 보였다.
「진명(眞明) 보은당(報恩堂)으로 와요, 전 가가.」
단아하면서도 섬세한 진소월의 필체와는 거리가 십만 리쯤 떨어져 있었으나 나는 그녀가 직접 쓴 글임을 알았다. 흥분을 누르며 노인에게 물었다.
“이 첩지가 언제 왔소?”
내 바뀐 말투에 노인이 흰 눈썹을 이마로 치켜 올렸다.
“처소로 돌아가던 중에 집보각의 밀사가 마침 나에게 전하려 가는 길이었다며 주더이다. 확인해보니 독의의 전갈이기에 바로 이리로 왔소이다.”
노인이 품에서 봉투와 다른 첩지를 꺼내 건네주었다. 첩지엔 독의의 서명과 함께 방금 노인이 말한 짤막한 지시사항이 적혀있었다.
“진명이라면 원중의 아래쪽에 있다는 부촌(富村) 말이오?”
“그렇소. 원한다면 길잡이를 붙여드리겠소.”
“됐소. 나 혼자 찾아갈 수 있소.”
내가 뒷말을 잇지 않자 노인이 고개를 숙인 후 방을 나갔다. 문에서 그와 엇갈려 검황자와 귀빈전주 옥주완이 들어왔다.
노인을 본 옥주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룡단주가 여긴 어인 일이오?”
나는 그제야 진소월에게 들었던 노인의 직위를 기억해냈다. 노인은 오대세가의 정예들로 이루어진 정맹 최강 전투부대의 수장이었다.
노인은 옥주완의 질문에 대꾸하지 않고 떠났다. 노인이 어려운 듯 옥주완은 그가 사라지고서야 불쾌한 내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입실하고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만면에 비굴한 미소를 머금었다.
“송 공자께 팔경을 두루 안내해드리려고 했으나 워낙 많은 인파가 몰리는 바람에…….”
내버려두면 백절까지 읊을 터였기에 나는 옥주완의 말을 잘랐다.
“알겠습니다. 나가보십시오. 참, 나는 얼마간 외출할 터이니 낭왕이 오면 여기서 기다리라고 해주십시오. 언제 돌아올지는 예정할 수 없소.”
임무를 부여받은 옥주완이 신이 났다.
“전왕의 명을 받드옵니다.”
허리를 반으로 접은 채 뒷걸음질로 물러가는 옥주완을 힐끗 쳐다보고는 검황자가 물었다.
“어디를 간다는 거요?”
나는 첩지를 검황자에게 주었다. 내용을 본 검황자가 검미를 일그러뜨렸다. ‘전 가가’라는 호칭에 충격을 받은 걸까.
“나도 가겠소.”
검황자에게 첩지를 보여줄 때부터 그럴 작정이었기에 나는 즉시 허락했다.
“그래라.”
* * *
진명은 원중의 여섯 위성도시들 중 하나였다.
내가 진명에 관해 아는 바는 딱 한 가지였다. 부자들만 산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리로 나를 부른 건 진소월의 처사가 아닐 터였다. 그녀는 진명 같은 특권층의 배타적 거주 지역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검황자를 안고서 전속력으로 비행한 나는 귀빈전 특실의 창문을 빠져나온 지 일각가량 만에 원중에서 남서 방면으로 일백이삼십 리 떨어진 진명에 당도했다.
시간을 낭비하기 싫어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저자에 내려선 나는 지나가는 이를 붙잡고 다짜고짜 물었다.
“보은당이 어디에 있습니까?”
화려한 금의를 차려입은 중년인은 내가 아니라 검황자에게 시선을 주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를 시발로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검황자에게 홀린 행인들을 둘러보며 질문을 반복했다.
“보은당이 어디에 있습니까?”
두 호흡이 지나도록 아무도 답을 주지 않아서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나는 전왕이오. 보은당이 어디에 있소?”
대번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반신반의하는 중인 중 하나가 일순 대경실색하더니 비명을 내질렀다.
“저, 정말이다!”
소리를 지른 이를 필두로 모두들 땅바닥에 오체투지 했다. 나는 네 번째로 물었다.
“보은당이 어디에 있소?”
어디를 가든 용감하거나 침착한 사람이 한 명쯤은 있는 법이었다.
“저 대로를 따라 쭉 가시면 나옵니다. 여기서 이백이십 장쯤 됩니다.”
“고맙습니다.”
백발의 뒤통수만 보이는 노인에게 감사인사를 한 후 그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가자.”
검황자가 부리나케 내 뒤를 쫓았다.
나나 검황자 같은 고수에게 이백여 장은 지척이나 다름없었다.
우리는 순식간에 ‘보은당’이란 현판을 단 고색창연한 단층 목조건물에 이르렀다. 잡초 하나 없이 깨끗하게 손질된 마당엔 각각 흑의와 백의를 입은 두 사내가 서 있었다. 흑의인은 거구의 칠십대 노인이었고 백의무복을 걸친 자는 매서운 눈매를 가진 장년인이었다.
나는 노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비대한 몸집이 무색하게 그는 경공술만으로 초절정 고수 대접을 받는 만리풍(萬里風) 조식(曺植)이었다. 강호에서는 중원육기의 비영과 더불어 십왕을 제외한 최고의 경공 대가로 알려져 있었다.
장년인의 신분은 알 수 없으나 상당한 강자임에 분명했다. 철저하게 내기를 갈무리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무위가 초절정 중(中) 어림이리라 추정했다. 오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나이를 감안하면 상당한 수준이었다.
나와 검황자가 경신을 멈추고 마당에 들어서자 만리풍과 미지의 사내가 잽싸게 바닥에 엎드렸다.
“어서 오십시오, 전왕. 그분은 안에 계십니다.”
만리풍은 목소리만이 아니라 몸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 반면 백의무복 사내는 바짝 굳어있었다. 그들을 일별한 나는 사당 안으로 들어섰다. 검황자가 나를 따랐지만 둘 다 제지하려 들지 않고 이마를 박은 채 미동도 없었다.
오전의 햇살이 들이찬 복도에 들어선 나는 정맹을 떠나며 가졌던 기대감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