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65
제164화 두어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소
통로 맨 끝은 막다른 벽이 아니라 동굴의 입구처럼 시커멓게 뚫려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는 뜻이었다.
겨울이지만 구름 한 점 없는 날씨라 일광은 찬연했다. 만약 진소월이 일층 어딘가에 있다면 햇빛을 보지 못하는 천형을 치유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기감으로 이미 확인한 대로 그녀는 해가 들지 않는 곳에 들어있었다.
계단은 제법 깊었다. 일일이 헤아려보지는 않았으나 오륙십 개는 될 듯싶었다. 간간이 걸어둔 등불에 나와 검황자의 그림자가 기괴한 형상을 그리며 어른거렸다.
바닥에 닿기도 전에 아래에서 악취가 올라왔다. 검황자를 돌려보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을 들어먹을 리 만무하기에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진소월에게는 선택권을 주어야 했다. 그래서 계단이 끝나고 또 다른 복도가 나왔을 때 그녀에게 기별했다.
“내가 왔소, 소월. 지광이도 같이 있소.”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검황자가 당혹스러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진소월이 검황자와의 대면을 거부하리라 예상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어서들 와요.”
내 뒤에 있던 검황자가 나를 밀치더니 앞으로 나갔다. 나는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다. 길쭉한 복도 양편에 용도를 알 수 없는 석실들이 늘어서있었다. 진소월이 있는 곳은 찾기 쉬웠다. 유일하게 불빛이 새어나왔기 때문이었다.
나보다 먼저 석실에 들어선 검황자가 숨을 들이켰다.
“헙!”
나는 그가 끔찍한 광경을 보았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틀렸다. 진소월은 전날 구세원의 의실 석대에 누워있던 모습이 아니었다.
석실은 의외로 넓었다. 여덟 평은 되어보였다.
들어가자마자 한 구석의 관이 눈에 띄었다. 진소월을 운반하는 도구로 쓰였을 터이지만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석실 중앙에 작은 탁자가 놓여있었고 진소월은 입구에서 맞은편의 의자에 앉아있었다.
기실 그녀인지는 불분명했다. 전신에 두터운 솜옷을 둘러 마치 뚱뚱보처럼 보이는데다 얼굴은 물론이고 두부 전체를 가리는 복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손에도 장갑을 끼고 있었다. 방금 들은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아니 그 목소리마저도 평소의 진소월과는 사뭇 달랐다. 옥구슬이 구르는 듯 낭랑한 옥음이 아니라 가래 끓는 노파가 쥐어짜낸 소리 같았다.
검황자의 쭉 뻗은 검미가 찌그러졌다. 진소월의 기괴한 차림에 놀란 건지 아니면 석실에서 나오는 악취의 진원지가 그녀임을 확인하고서 충격을 받은 건지 궁금했다.
“정말, 진 소저요?”
검황자가 순진한 질문을 던졌다. 나는 진소월이 복면 속에서 쓴웃음을 짓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분홍빛 입술이 온전할는지는 의문이었지만.
“그래요, 송 공자. 전 가가의 권유를 받아들인 모양이군요. 그런데 검왕 어르신의 허락은 받았나요? 아마도 아닐 테죠? 걱정이네요. 그 어른은 필히 전 가가에게 화를 낼 텐데.”
검황자가 탁자로 다가갔다.
“몸은, 몸은 좀 어떻소?”
첫 번째 것보단 백배쯤 나은 질문이었다.
“글쎄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어쨌거나 명줄을 보존했으니 좋아졌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잃어버린 게 많아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요?”
“무엇을 잃었소?”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혹은 위험한 질문이거나. 나는 검황자와 진소월의 문답을 중단시켜야 할 시점임을 알았다. 그러나 내가 개입하기도 전에 진소월이 심술을 부렸다.
“궁금한가요? 한 가지만 보여줄까요?”
수전증에 걸린 듯 덜덜 떨리는 손을 올려 진소월이 복면을 벗었다.
“억!”
외마디 경악성을 토해낸 검황자가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으나 내 가슴에 부딪친 덕분에 추태를 모면했다. 실태를 깨달은 검황자가 황급히 진소월에게 사과했다.
“미안하오, 진 소저.”
“괜찮아요. 이런 꼴을 보여줘서 내가 오히려 미안해요.”
서로 사과했지만 훈훈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더욱이 검황자가 또 악수를 두었다.
“나중에 완치되면 본래의 미모를 되찾을 거요. 그러니 아무…….”
진소월이 검황자가 건네는 위로의 언사를 가차 없이 뭉갰다.
“내 병에 완치는 없어요, 송 공자. 본 모양을 회복할 가능성도 희박하고요. 그보다는 지금보다 더 망가질 가능성이 훨씬 더 커요. 속상하지만 어쩌겠어요. 목숨을 부지하려면 감내할밖에. 아니, 이런 꼴로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나을까요?”
검황자의 말문을 막은 진소월이 뒤늦게 나를 시험했다.
“전 가가는 어떤가요? 혹시 나를 만나러 온 걸 후회하나요?”
뻣뻣하게 굳은 검황자를 옆으로 치우고 탁자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내가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소, 소월. 당신을 찾기 위해 온 천하를 뒤졌는데.”
진물이 고인 진소월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나는 어정쩡하게 선 검황자를 구원해주었다.
“남는 의자가 하나밖에 없구나. 뭐, 꼭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모처럼 소월과 밀어를 나누고자 하니 자리 좀 비켜줄래?”
차마 진소월을 보지 못하고 정처 없이 시선을 배회하던 검황자가 냉큼 내 호의를 받아들였다.
“아, 알았소. 나가서 기다릴 테니 말씀들 나누시오.”
검황자가 도망치듯 허둥지둥 석실을 빠져나갔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진소월이 복면에 손을 뻗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쓰지 않아도 되오, 소월.”
“……제발, 전 가가.”
나는 진소월의 손을 놓아주었다. 다시 복면을 착용한 진소월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엉뚱한 말을 꺼냈다.
“방금 전 송 공자 얼굴을 봤나요? 전 가가의 표현을 빌자면 마치 똥 묻은 신발을 삼킨 듯한 표정이었어요.”
나는 검황자를 변호했다.
“그 녀석 잘못이 아니오. 누구라도 그랬을 거요.”
“전 가가도 내 모습이 역겨운가요?”
“썩 보기 좋지는 않소.”
“……너무 솔직한 거 아닌가요?”
“거짓으로 대하길 바라오?”
“…….”
나는 진소월의 손을 다시 잡았다.
“소월이 무사해서 감사할 따름이오. 다만 한 가지 궁금하오. 지금 내 앞에 있는 소월이 내가 아는 소월인지, 아니면 독의의 사술에 홀린 실혼인인지.”
“송 공자에게 심하게 굴어서 나를 의심하는 군요. 나는 나예요, 전 가가.”
“증명해 보시오.”
“어떻게 말인가요?”
“당신이 정말 소월이라면 재회인사를 해 보오.”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진소월이 별안간 흐느꼈다. 나는 탁자 너머로 손을 뻗어 오열하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러고는 탁자를 돌아가 그녀의 복면을 들추고 분홍빛 입술이 사라진 자리에 입을 맞추었다.
진소월은 한참 후에야 진정되었다.
“두려웠어요. 전 가가가 송 공자와 같은 반응을 보일까봐.”
“그것 참 유감이구려. 나를 믿지 못하다니.”
“미안해요.”
“그럴 것 없소, 소월. 나도 처음엔 그 녀석하고 다를 바 없었으니까. 실은 벌써 세 번째요. 적응이 되었다는 건 우스운 소리지만 그래도 아무 준비 없이 맞닥뜨린 것보단 훨씬 낫소.”
“그런 건 고백할 필요 없어요. 하지만 궁금하네요. 내 몰골을 본 후 전 가가가 어떤 심경의 변화과정을 거쳤을지.”
“맞춰 보오.”
“싫어요.”
“그러면 나도 말하지 않을 테요.”
“그렇게 해요. 대신 결론은 알고 싶어요.”
“입맞춤만으로는 부족하오? 벌거벗고 춤이라도 출까?”
풋!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나는 진소월이 복면 속에서 정색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어떻게 아는 건지 스스로도 신기했다.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고 있지요?”
나는 진소월의 질문을 수정했다.
“소월이 아니라 독의의 요구라고 해야지 않소?”
진소월은 오랫동안 답이 없었다.
나는 묵묵히 기다렸다. 이윽고 진소월이 응답했다.
“그래요. 하지만 하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에요. 뭔지 아나요?”
어찌 모르겠는가. 독의는 진소월을 뜻대로 부리기 위해 사술을 동원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의 갈망을 자극하면 그만이었다.
나는 답을 생략하고 되물었다.
“그의 말을 믿소?”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는 가능성을 제시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나로서는 지푸라기라도 움켜잡을 수밖에 없어요. 아무리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아주 없는 것보단 낫잖아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오.”
“말했잖아요. 실낱같은 가능성이라고. 그 이상은 기대하지 않아요. 그렇더라도 그것이 현재 내 유일한 생명줄이에요. 그게 끊어지면 나도 없어요.”
심장이 아렸다. 짐작했던 대로 진소월은 나와 영영 헤어질 각오를 하고 이 자리에 나온 것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고민하고 있는데 진소월이 두서없이 장광설을 쏟아냈다.
“전 가가 앞에서 앓는 소리를 하긴 싫지만 독의의 처치는 정말 지옥이었어요. 나는 오로지 희망의 힘으로 그 소름끼치는 극통을 견뎌냈어요. 우리 아이. 나와 전 가가의 아이. 그 희망을 두고 어떻게 생을 포기할 수 있었겠어요?
독의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내가 얼마나 간절히 우리의 이세를 바라는지 깨달았어요. 전 가가는 그를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그가 단지 나를 이용해먹을 심산으로 헛된 욕망을 불어넣었다고 여기지 않아요. 실례가 있으니까요. 전 가가 어머님 말이에요.
극악의 고통을 견디는 내내 어머님을 생각했어요. 소 어르신이 어머님을 두고 ‘신의 선물’이라고 하셨다죠? 나는 설령 ‘악마의 저주’가 될지라도 기필코 어머님처럼 살아남아 전 가가 같은 아이를 가지고 싶었어요. 평생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살아왔는데, 그러면서 숨이 붙어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어려운 이들을 돕자고 다짐하며 그 다짐을 실천했는데, 그 정도 바람은 가져도 되잖아요?”
진소월의 눈빛이 복면을 뚫고 나올 듯했다.
정적이 석실을 휘돌았다. 내 차례였기에 어쩔 수 없이 침묵을 깼다
“그가 무엇을 갖고 오라고 했소?”
“네 가지예요. 전 가가의 정혈, 정액, 골수조각, 그리고 내단의 일부.”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어이가 없었다.
“욕심이 과하지 않소?”
나는 진소월이 독의인 양 항의했다. 우습게도 진소월은 그를 대변했다.
“그렇지 않아요, 전 가가. 골수와 내단은 조금만 떼 주면 돼요. 피도 얇은 대나무 반 마디를 채울 정도면 충분하고요. 그걸 내준다고 해도 전 가가에겐 아무런 피해가 없잖아요? 독의는 다만 연구용으로 쓸 테니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을 거고요.”
진소월은 정작 자신이 바라는 정액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민망해서일까. 아니면 굳이 설득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서일까.
“내단 말인데, 그게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소?”
별 기대를 하지 않았으나 진소월은 답을 알고 있었다.
“독왕의 시신을 해부해 면밀히 살펴본 독의는 그이가 용이나 만년금구 같은 영물들처럼 일종의 내단을 형성했으리라 추정했어요. 흔적이 너무나 뚜렷했거든요. 그게 전 가가에게 넘어갔음은 불문가지고요. 실은 그 때문에 독의는 자기가 전 가가를 만나러 오겠다고 난리를 쳤어요. 하지만 내가 말렸어요. 그가 나서면 하나도 얻지 못할뿐더러 전 가가의 손에 목을 비틀릴 확률이 십 할에 가까우니까요. 그가 죽으면 내 희망도 사라지잖아요. 그렇게 둘 수는 없었어요.”
못내 속이 쓰렸다. 방금 이 발언으로 진소월은 독의와 한통속이 되었음을 공공연히 밝힌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와의 결별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진소월은 내 결정을 독촉하지 않고 침묵했다. 하지만 우리 둘 다 이미 끝난 승부임을 알고 있었다. 나는 차마 그녀가 최후의 패를 꺼내들도록 몰아갈 수는 없었다. 그렇더라도 독의에게 득의양양한 낯짝을 허락하는 건 안 될 말이었다.
“이 거래를 마무리 짓기 전에 두어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소, 소월.”
두툼한 솜옷으로 무장했지만 진소월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거래’라는 표현 때문이었다.
“뭔가요, 전 가가.”
슬픔을 꾹꾹 눌러 담은 진소월의 음성에 가슴이 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