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66
제165화 어떤 역효과 말이오?
“우선 도왕이 어째서 마왕에게 붙었는지 알고 싶소.”
놀란 진소월이 내 말을 질문으로 전환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도왕이 마왕에게 붙었다니요?”
나는 한 달 전 계양에서 있었던 일을 진소월에게 들려주었다. 내가 홀로 마련의 총단에 쳐들어갔다는 말을 들은 진소월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내게 화가 났나요, 전 가가? 오늘 같은 날에도 물에 아이를 내놓은 어미 심정으로 만들어야겠어요?”
“그럴 의도는 병아리 코털만큼도 없었소. 그냥 순수한 호기심에서 물어본 거요. 소월이라면 답을 알 것 같아서.”
긴 한숨을 내쉰 진소월이 내게 다시 그날의 상황을 상세히 복기하도록 요청했다. 주의 깊게 듣더니 그녀가 뻔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도무지 모르겠네요. 빙왕과 해왕이라면 모를까 도왕이 마련에 포섭되다니. 차라리 검왕이라면 덜 놀랐을 거예요.”
이래서야 물어본 보람이 없지 않은가. 진소월이라면 다를 줄 알았는데. 내 실망감을 모를 리 없는 진소월이 분발했다.
“도왕이 노망이 난 게 아니라면 이유는 한 가지에요.”
솔깃했다. 역시.
“그게 뭐요?”
“마련에 약점이 잡힌 거죠.”
“무슨 약점?”
“그야 모르죠.”
하나마나한 얘기가 아닌가. 불만스러운 심사를 여과 없이 드러내자 복면 속 진소월의 쓴웃음이 눈에 보일 듯했다.
“여러 가능성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건 역시 인질이에요. 마련이 도왕에게 매우 소중한 이의 명줄을 쥐고 있다면 그에게 동맹을 강요할 수 있었을 거예요. 나 대인께 도천(刀天)의 내부사정을 살펴보라고 부탁해 봐요. 특히 지난 일 년 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세밀히 조사하라고요. 아마도 뭔가 단서가 될 만한 내용이 나올 거예요.”
찜찜했다. 나현과는 되도록 접촉을 삼가려고 했는데.
“도왕이 마왕과 함께 나를 추적하지 않은 까닭은 뭐 같소?”
“사전에 마뇌와 계약을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무슨 계약?”
“무왕 어르신을 생각해 봐요. 전 가가를 돕기 위해 명교에 오셨지만 정사대전을 일으킬 우려를 앞세워 출정은 한사코 거부하셨잖아요.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도왕은 마련을 침공하는 적에 대해서는 칼을 빌려줄 터이지만 계양을 벗어나면 손을 놓겠다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로서는 양보할 수 없는 선이었을 거예요. 그러지 않으면 정맹을 치는데 동원될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나는 진소월의 추론이 옳으리라 직감했다. 그러면서 자책했다. 이렇게 단순한 걸 왜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도왕과 그의 무시무시했던 도공을 떠올리며 그날의 아찔했던 장면을 곱씹고 있는데 진소월이 냉정하게 진행을 재촉했다.
“다음은 뭔가요?”
이렇게 빨리 끝내고 싶은 건가? 이제 헤어지면 다시는 나를 보지 않을 심산이면서?
서운함을 감추려고 일부러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정맹 원로원에 관한 거요. 실은 불과 한 시진 전에 그들에게 나와 연수할 것을 제안했소. 나는 당연히 그들이 그 자리에서 받아들이리라 예상했는데 뜻밖에도 그다지 달가워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소. 뭐, 그들의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솔직히 좀 당혹스러웠소. 그들의 입장에서는 나에게 매달려야 정상인데. 속을 들여다보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어쨌거나 표면적인 전력은 우리가 월등하니 말이오. 설령 도왕이 마왕에게 붙었다는 걸 알더라도 사마 진영엔 왕들이 셋인 반면 우리 쪽엔 나를 포함해 넷이나 되니 정맹으로서는 응당…….”
진소월이 내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잠깐만요, 전 가가. 넷이라니요? 독왕은 이미 사망했잖아요? 그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단 말인가요?”
“물론 그 어른의 죽음은 만천하가 알고 있소.”
“그러면 누가……, 설마 검왕이 전 가가 편에 서기로 했나요?”
“그럴 리가 있소. 같은 편은 고사하고 그 녀석 때문에 전보다 더 척이 졌는데. 새롭게 우리 편에 든 이는 낭왕이오.”
복면에 가려졌지만 나는 진소월의 입이 떡 벌어졌음을 알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낭왕이 우리 편이 되다니? 그는 사벌에 포섭된 게 아니었나요? 그렇지 않아도 그에 관해 물어보려고 했는데.”
“원래는 그랬소. 하지만 내가 그를 우리 쪽에 끌어들였소.”
“어떻게요?”
나는 명교에 쳐들어온 사왕과 낭왕을 격퇴한 일과 그로부터 두 달 후 불귀곡에서 낭왕과 담판을 지어 그를 동맹으로 삼은 과정을 의기양양하게 떠벌렸다. 진소월은 간간히 탄성을 발하며 추임새를 넣었다.
진소월이 나를 칭찬했다.
“정말 잘 했어요. 이젠 전 가가가 혼자 마련에 쳐들어가는 무모한 일만 벌이지 않으면 위태로운 처지에 몰릴 일은 없겠네요.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설사 마왕과 사왕이 연수해 명교를 침공한다고 해도 전혀 위협적이지 않을 테니까요. 도왕이 계양에 묶여 있는 한 그들은 아예 출정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거예요. 도왕이 가세하더라도 우세를 장담할 수 없을 터인데 그가 빠지면 말할 것도 없어요. 장왕 어르신의 상태를 감안해도 말이에요.”
내 형세판단도 진소월과 동일했다. 그래서 정맹 원로들의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진소월도 그런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전 가가 말마따나 이상하군요. 대세가 전 가가 쪽으로 기울었다는 걸 그들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들의 미적지근한 반응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게 뭘까요?”
바로 그걸 물은 거잖소?
그렇게 반문하려다 자중했다. 진소월의 마지막 말은 질문이라기보다는 자문에 가까웠다. 시간만 주면 그녀는 그럴 듯한 답을 찾아낼 터였다. 언제나처럼.
일순간 진소월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긍정적인 신호였다.
“알아냈소?”
분명 무언가 건져냈을 터임에도 진소월은 시치미를 뗐다.
“아직 감이 잡히지 않아요.”
“그러지 말고 말해주구려.”
“그 전에 송 공자와 재회한 과정에 대해……, 아니 이참에 독곡에 갔던 시점부터 전 가가가 겪은 일들을 차례대로 말해줘요.”
순간 퍼뜩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그 건으로 직행하고픈 조바심을 누르고 진소월의 요청에 응했다. 나에 대한 그녀의 앎에 공백기를 두고 싶지 않아서였다.
검황자를 쫓아온 검왕과 충돌했던 사안에 관해서는 별반 동요가 없던 진소월이 그 직후 벌어진 사달을 듣고는 탄식을 연발했다.
“가슴이 많이 아팠겠네요, 전 가가. 광이를 친동생처럼 아꼈잖아요.”
아우라기보다는 아들처럼 여겼다고 해야 할 터이지만 굳이 진소월의 인식을 정정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어떤 처분을 내렸나요?”
진소월의 음성에 걱정이 묻어났다. 내가 배신을 일삼는 부류를 얼마나 혐오하는지 아는 탓이었다.
“앞으로는 나에게 알은체도 말고 준비가 되면 떠나라고 했소. 자신이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할 때.”
긴장하고 있던 진소월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다행이네요. 광이만이 아니라 전 가가를 위해서도요. 만약 그 아이에게 심한 처벌을 내렸다면 전 가가는 두고두고 후회했을 거예요.”
“…….”
진소월이 손을 뻗어 나를 위무했다. 그러나 내 손등을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은 두꺼운 장갑 때문인지 촉감이 영 아니었다. 나를 어루만지던 보드라운 섬섬옥수가 그리웠다.
“그게 언제였죠?”
“열흘 전이었소.”
“그렇군요. 지금쯤 광이는 명교를 떠났을 거예요.”
“무슨 말이오? 몇 년의 유예기간을 주었는데.”
“자존심이 강한 아이잖아요. 배신자로 낙인찍힌 걸 견딜 수 없었을 거예요.”
“…….”
“너무 염려하지 말아요. 어리지만 제 한 몸 충분히 건사할 수 있는 아이니까.”
“염려하지 않소.”
진소월은 내 거짓말을 물고 늘어지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그 다음엔 어떻게 됐나요? 송 공자와 낭왕을 데리고 정맹으로 간 건가요?”
“아니오. 중간에 사벌에 들렀소.”
“휴우, 그럴 것 같았어요. 사벌은 텅텅 비었을 테죠? 두 사람을 대동한 건 동선을 드러냈다는 뜻이니.”
“뭐, 사왕을 비롯한 대가리들은 진즉 내빼긴 했습디다.”
사벌에서의 행사를 간략히 들려주며 나는 미지의 책사에 대한 진소월의 의견을 물었다. 그녀도 고개를 저었다.
“참으로 기이한 자네요. 진면모를 파악하려면 정보 조각이 더 필요해요. 어쨌든 실존인물임이 확실해졌으니 언젠간 실체를 알게 되는 날이 오겠죠.”
진소월은 책사에 대해 짐작하는 바가 있을 듯싶었으나 캐묻는다고 내놓을 성싶지 않아서 나는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오늘 오전 태평전에서의 회의와 낭왕과 치렀던 비무까지 일사천리로 늘어놓은 후 최초의 질문에 대한 진소월의 답을 기다렸다.
진소월은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내 실책을 지적했다.
“원로원들 앞에서 낭왕과 맺은 약조를 거론한 건 경솔했어요, 전 가가. 그들에게 명분을 주려는 의도였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역효과를 초래할 우려가 너무 커요.”
“어떤 역효과 말이오?”
“서역에서의 행적을 보면 악한은 아닌 듯싶지만 낭왕은 우군으로 두기엔 불안한 요소가 적지 않은 인물이에요. 위신을 중시할뿐더러 욕심도 상당하니까요. 거기에 전 가가와 손을 잡은 정황이나 그 이후의 행태로 미루어보건대 전략적인 고려 없이 즉흥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성향도 다분해요. 그런 유형은 언제 돌변해도 이상하지 않아요.
정맹 원로들 중에 사벌이나 마련과 내통하는 자가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전 가가가 태평전에서 한 얘기는 그들의 측근들에게 전해졌을 거예요. 그리고 그 내용은 조만간 사마 책사들의 귀에 들어갈 테고요. 그들이 이 조문을 파고들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해요.
언변이 뛰어난 사벌이나 마련의 첩자가 낭왕과 접촉해 ‘영토’라는 미끼를 내밀고 그를 꼬드기면 낭왕이 낚이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어요. 그가 단순히 편을 바꾸는 수준이면 그나마 괜찮지만 진정성을 보이라는 적들의 요구를 수용하기라도 하면 너무 위험해요.”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예컨대 아무 대비도 없는 상태에서 낭왕이 무왕이나 장왕에게 암습을 가하려 든다면 막을 방도가 없었다. 그리 되면 우리 편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터였다.
“물론 정맹 원로들이 보였다는 석연찮은 태도는 낭왕과는 관련이 없어요. 차후엔 지대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지만요. 아무튼 이편이 대세를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아침 그들이 전 가가의 연수 제안을 즉석에서 수락하지 않고 망설인 이유는…….”
말끝을 흐린 진소월이 뒤를 내게 떠넘겼다.
“전 가가도 짐작할 테죠?”
나는 고소를 지었다. 아까 진소월이 가르쳐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검왕과 관계가 있겠구려.”
“십중팔구 그럴 거라 봐요. 일백 세가 넘었다지만 여러 차례 확인했다시피 검왕의 정신연령은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러있어요. 그는 하찮게 여겼던 전 가가에게 당한 수모를 결코 묵과하려들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전 가가와 장왕 어르신의 합공에 혼쭐이 나 도망쳤으니 다시 찾아올 용기를 내기는 어려웠을 테죠. 검총의 검호들을 동원하는 것도 창피한 노릇이고요. 더욱이 무왕 어르신이 명교에 머무르고 있다는 정보를 접한 이후엔 엄두도 안 났을 거예요.”
“그런데 누군가 능히 나를 징치할 수 있다고 부추겼을 테지. 그 누군가는 마뇌의 지시를 받은 반검 조추일 테고.”
“그래요. 외세와 작당한 전 가가를 처단해 중원 무림의 정통성을 수호해야 한다는 구실 따위를 내걸고 동참을 권유하면 검왕이 넘어가지 않았을 리 만무해요. 그로서는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격이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정맹의 원로들이 그러한 물밑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며 추이를 살피고 있었다고 보는 건 납득하기 어렵소만. 정보에 밝고 지모가 출중한 이들 몇 명이라면 모를까 그들 전원이……, 아!”
말하는 도중 나는 진소월이 무엇을 일깨우고자 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