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67
제166화 이거 맞소?
“그들은 검왕의 동향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었을 테군. 우리 쪽에 불리한 성격의 정보를.”
“그래요. 그게 아니라면 정맹 원로들의 태도를 설명하기 어려워요. 전 가가가 명교를 떠난 게 닷새 전이라고 했죠? 그 사이에 소식이 전해졌을 거예요. 전 가가의 얘기를 들어보면 정맹의 대중에게서는 딱히 불온한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한 모양이니, 아주 최근이겠죠. 어쩌면 오늘 아침 전 가가가 원중에 모습을 드러냈을 즈음일지도 몰라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일 것 같소?”
“글쎄요. 검왕의 결정에는 마뇌의 입김이 작용했을 테니 두 가지 의도를 담지 않았을까요? 하나는 적진 분열 유도, 다른 하나는 연합전선의 형성.”
“좀 더 풀어보구려.”
“반검을 매개로 한 마뇌의 사주를 받은 지도 모를 검왕은 아마도 이런 수순을 따랐을 거예요. 일단 전 가가를 외세를 끌어들여 천하환란을 획책한 악적으로 간주한 후 중원 무림 수호를 위해 처단하겠다고 공표하는 거죠. 그러면서 외세척결의 대의에 동의하는 이들과는 작은 차이를 넘어 합심할 터이나 반대로 외세에 동조하는 자들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말살하겠다는 협박을 덧붙이고요. 전자는 검총에게 사마와 연수할 명분을 주기 위한 조치이고 후자는 전 가가를 고립시키려는 노림수에요.”
“흥, 같잖은 수작이군. 그런 유치한 분열책이 통할 리가 없어.”
“맞아요. 무왕 어르신은 전 가가에게 등을 돌릴 분이 아니고 명교는 오히려 전 가가를 더욱더 붙잡으려 들 거예요. 이제 와서 발을 빼는 건 멸망을 자초하는 꼴이 될 테니까요. 다만 정맹에겐 감당키 어려운 압박으로 작용할 소지가 커요. 객관적인 전력상 사마연합의 우세가 확연하니까요. 양편이 똑같이 네 명씩의 왕을 보유하고 있지만 질적으로는 차이가 상당하잖아요. 그러니 정맹의 입장에서는 전 가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인 거죠. 섣불리 수락했다가 적들이 외세에 부역한 세력으로 몰아 침공해오면 대책이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전 가가의 제안을 뿌리치자니 그건 그것대로 두려울 테죠. 전 가가가 어떤 ‘행패’를 부릴지 모르니까요. 그들에겐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인 거죠.”
“정맹의 원로들이 결국 어떤 결정을 내릴 것 같소?”
“전 가가가 강압적으로 나간다면 굴복하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내일 닥칠 화마가 무섭더라도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려드는 게 보통의 대처니까요. 만약 전 가가가 유연한 태도를 보이면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시간을 끌려고 할 테죠.”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혹시 전 가가를 처음 만난 날 오대세가와 관련해 내가 했던 말, 기억하나요? 그들의 진정한 무서움은 드러난 힘이 아니라 감춰진 저력에 있다고. 그들을 무시하면 안 돼요, 전 가가. 완전히 몰살시키지 않는 한 반드시 부활해 백 년 묵은 빚도 받아낼 족속이에요. 뿌리가 워낙 깊고 가지가 너무 많아 언제 어디서 어떤 열매가 맺힐지 아무도 알 수 없어요. 도왕을 봐요. 장구 조가는 오대세가에서 탈락한지 오래지만 그런 엄청난 도호(刀豪)를 길러냈잖아요. 현재의 오대세가도 얼마든지 그와 유사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어요. 그러니 먼 훗날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되도록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을 듯싶어요.”
“알겠소. 그리 하겠소.”
기실 진소월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감하긴 어려웠다. 도왕은 예시가 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따지면 어디든 괴물을 배출할 수 있었다. 당금 무림의 십왕 중 오대세가 출신은 전무하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진소월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구태여 그녀를 불안하게 할 까닭이 없거니와 ‘되도록’이라는 단서가 붙어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역으로 ‘수틀리면’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오대세가가 배출할 지도 모를 천하기재를 고려하며 그들의 눈치를 볼 생각은 붕어 발톱만큼도 없었다.
어쨌거나 진소월과 정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내용의 심각성과는 무관하게 흐뭇했다. 내 앞의 복면여인은 내가 매료되었던 이가 틀림없었다. 비록 껍질은 좀 상했을지라도 알맹이는 그대로였다.
* * *
많은 얘기를 쏟아내고서 지쳤는지 진소월이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나는 그녀가 이대로 대화를 종결하고 ‘독의의 요구사항’으로 넘어갈까봐 염려스러웠다. 하지만 기우였다.
“실로 위태로운 국면이에요, 전 가가. 조금만 삐끗하면 전 가가는 물론이고 천하의 운명이 나락으로 떨어질 거예요. 그러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해요.”
“내가 어쩌길 바라오?”
“우선 명교로 돌아가요. 그러고는 수성의 태세를 굳건히 해요.”
“적들이 언제쯤 쳐들어 올 것 같소?”
“시기를 특정하긴 어려워요. 두 가지 변수가 있어요. 도왕과 낭왕이에요. 도왕은 마련과 계양 밖에서는 칼을 쓰지 않겠다는 계약을 맺었을 듯싶지만 상황이 달라졌으니 출정의 여지가 열렸어요. 그가 도천의 본으로 삼았던 검총이 사마연합에 가세하고 외세 척결을 내세워 설득하면 마음을 바꿀 가능성이 충분해요.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당분간은 정맹은 안전을 보장받는 셈이죠. 도왕을 구슬리기 위해서라도 그가 본향으로 여기는 정파 무림의 본산을 건드리진 않을 테니까요.”
“도왕에 관해서는 나름 대안이 있소.”
“무왕 어르신 말인가요?”
“그렇소. 그 어른이 나서서 검왕이 사마에 붙은 진짜 이유와 외세 운운의 기만성을 알려주면 도왕은 적어도 그들의 편에 서서 칼을 부리지는 않을 거요.”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점을 마뇌나 사벌의 책사가 간과하고 있을 리 만무해요. 그들은 무왕 어르신이 도왕과 말을 섞을 기회를 주지 않을 거예요.”
“그렇더라도 분명 방법이 있을 거요.”
“그래요. 하지만 무리하게 일을 추진하지는 말아요. 적들이 역이용할 우려가 크니까.”
나는 진소월에게 우리의 책사가 되어주기를 청하고 싶었으나 참았다. 그럴 의사가 있었으면 권고하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녀는 나와 함께 명교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보아야 했다.
내 속을 읽은 듯 진소월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낭왕의 경우엔 외부인사와의 접촉을 원천 차단해야 해요. 무왕 어르신이 명교 서편 들판에 거처를 두셨다고 했죠? 전 가가도 거기서 지내는 게 어떨까요? 낭왕과 같이.”
“남자 셋이 동거하란 말이오?”
복면 속에서 진소월이 쓴웃음을 짓고 있을 터였다.
“처소는 따로 마련하면 돼요. 관건은 낭왕을 그곳에 잡아두는 거예요. 외인이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그 벌판을 출입금지구역으로 선포하고 낭왕이 혹시라도 그곳을 벗어나면 전 가가가 붙어있어야 해요.”
“귀찮은데.”
이번에는 틀림없이 정색했으리라.
“농담이 아니에요, 전 가가. 낭왕은 도왕 이상으로 중요한 변수에요. 그가 배신한다면 형세판단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단순히 이탈만 해도 대책이 없어요. 반면 그가 우리 편에 머물러있다면 적들은 침공을 주저할 수밖에 없어요. 전력 상 우위임엔 분명하지만 압도적이진 않으니까요. 특히 사왕은 성향 상 철저하게 몸을 사릴 거예요. 그걸 마뇌가 모를 리가 없고요. 사왕의 태도에 마왕이 열을 받으면 내분이 발생할 소지가 다분한 데다 도왕과 무왕 어르신의 만남에서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니 확실한 우세를 구축하기 전에는 침공을 감행하기 어려울 거예요. 우리 편에서는 대치가 장기화되면 될수록 유리해요. 그러니 최대한 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해요. 그러려면 낭왕을 꼭 붙잡아두어야 하고요.”
“그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대치만 하다 끝날 수도 있겠군.”
“그러면 더 바랄 나위가 없지만 그럴 가능성은 극히 희박해요.”
“어째서 그렇소?”
“그들이 통제할 수 없을뿐더러 두려워하는 변수가 있기 때문이죠.”
“또 무슨 변수…….”
무심코 물으려던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알았어! 바로 나야!”
“맞아요. 전 가가야말로 가장 중대한 변수에요. 그들이 침공을 최대한 서둘러야 할 이유이기도 하고요. 사왕과 마왕은 각각 두 번씩 전 가가와 싸워보았어요. 둘 다 두 번째 대결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테고요. 검왕은 말할 것도 없어요. 그들은 전 가가의 무시무시한 성장 속도에 대한 공포를 공유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 공포는 장기전을 막는 결정적인 요소가 될 테고요. 우리로서는 유감스럽게도.”
“그들이 언제쯤 침공을 결행할 것 같소?”
“좀 전에 말했듯 시기를 예측하긴 어려워요. 변수들이 어떤 식으로 정리될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길어야 석 달이 아닐까 싶어요. 그보다 빠를 가능성도 상당해요. 도왕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데다 낭왕의 회유작업에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면 때 이르게 결단을 내릴 수도 있어요.”
나는 적들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달만 침공을 늦춰주기를 바랐다. 그때까지는 검왕은 몰라도 마왕이나 사왕에겐 필적하는 무위에 이를 수 있을 터였다. 그러면 마지못해 참전할 도왕의 소극성을 전제로 적들과 거의 대등한 전력을 갖추게 될 것이고 전술 운용의 폭도 한결 넓어지게 될 것이었다.
* * *
자신의 전문 분야인지라 흥이 났는지 진소월은 여러 경우의 수를 늘어놓으며 각 경우에 대한 대처방안들도 일사천리로 풀어놓았다.
“……하지만 가장 현명한 선택은 전 가가가 낭왕과 함께 천랑성으로 가는 거예요. 그리 되면 적들은 표적을 잃고 와해될 테니까요. 도왕과 검왕이 제 자리로 돌아가면 전 가가로 인해 잠시 봉합됐던 사왕과 마왕의 알력이 재발될 게 틀림없어요. 그들이 검왕을 설득한 후 전 가가를 쫓아 서역까지 갈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으나…….”
“도중에 잘라서 미안하지만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방안이오. 도망가는 게 창피해서가 아니라…….”
“알고 있어요. 명교 때문임을. 맞아요. 사마 연합은 전 가가가 천랑성으로 피신하고 무왕 어르신이 정맹으로 복귀하면 불문곡직 명교를 먹어치울 거예요. 검왕도 그들에게 화풀이 할 공산이 크고요. 전 가가가 내 제안을 수용하지 않을 것을 짐작하고도 남았지만 말을 해야 했어요. 내가 나열하는 방책들의 핵심이 무언지 강조하기 위해서요. 절대로 잊지 말아요. 전 가가의 생존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전 가가가 살아있으면 설사 명교가 쑥대밭이 되더라도 우리 친인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거예요. 후환을 대비해 적들이 인질로 삼을 테니까요. 반면 만약 전 가가에게 변이 생기면…….”
진소월은 말을 잇지 못했다. 차마 내 최후와 그 후과를 설명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느닷없이 경련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괜찮소, 소월?”
중심을 잃고 허물어지는 진소월을 부축하며 물었다.
“저, 저기…….”
진소월의 검지가 석실 구석에 놓인 관을 가리켰다. 나는 진소월을 안고서 관 쪽으로 갔다.
“이 안에 넣어달란 말이오?”
진소월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거렸다.
“약병을…….”
축 늘어진 진소월을 바닥에 누인 후 관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기기묘묘한 도구들과 약액이 담긴 병들이 나왔다. 약병은 여섯 개였고 색깔이 다 달랐다.
“어떤 것 말이오?”
“빨간…….”
진소월이 들릴락 말락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벽에 걸린 등을 가져와 비춰본 후 적색의 용액이 든 병을 꺼냈다.
“이거 맞소?”
그새 혼절했는지 진소월은 답이 없었다. 서둘러 그녀의 복면을 벗겼다. 이목구비가 뭉개진 얼굴을 보노라니 새삼스레 속이 쓰렸다. 단단히 봉해진 병마개를 뽑으니 역한 냄새가 솟아올랐다. 구역질이 날 뻔했으나 꾹 참고서 진소월의 머리를 받친 후 분홍빛 입술이 있었던 자리에 조심스럽게 약액을 흘려 넣었다. 양이 꽤 많았다. 얼마나 복용시켜야 하는지 알지 못했기에 못내 불안했다.
약액이 반쯤 들어갔을 때 갑자기 진소월의 호흡이 멎었다. 그와 동시에 심장도 박동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