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70
제169화 당신에게 선택권을 주고자 하오
나는 무왕에 앞서 몸을 날렸다.
무왕이 지체 없이 내 뒤를 따랐다. 우리의 주목을 끈 것은 공기의 기묘한 진동이었다. 그것은 멀리서 엄청난 공력을 가진 무인들이 격돌했다는 신호였다. 즉, 장왕과 낭왕이 부딪친 것이었다.
장왕이 매일 오전마다 난리를 부리는 구덩이로 향하며 나는 자책했다. 그가 발작을 시작하는 오시가 임박했음을 알았으면서도 낭왕을 인보당에 그냥 두고 온 것은 경솔한 조치였다. 인보당과 구덩이는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낭왕 같은 절대고수에겐 지척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구덩이의 토벽을 강타하는 장공의 기운에 흥미가 일어 그리로 향했다면, 그리고 장왕과 조우했다면 얼마든지 탈이 날 수 있었다. 광객에게 감시와 출입의 통제를 부탁했지만 낭왕이 작심하고 뛰쳐나갔다면 어떻게 막을 수 있었겠는가.
구덩이에 이르기도 전에 나는 이미 사달이 났음을 알아차렸다. 고함 소리가 난무한 가운데 낭왕과 장왕으로 짐작되는 두 개의 인영이 구덩이 근처의 평지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쪽으로 쏜살 같이 하강하며 나는 사자후를 발했다.
“멈추시오!”
낭왕을 향한 요구였으나 그의 깃발이 장왕의 우견을 할퀴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 발 늦게 장내에 떨어져 내린 나는 낭왕을 막아섰다. 그는 나에게도 깃발을 휘둘렀다. 철봉이나 옥소를 꺼내지 않고 신법으로 그의 공격을 흘려내며 나는 다시 소리를 질렀다.
“멈추시오.”
나에게 전의가 없음을 확인한 낭왕이 훌쩍 물러섰다. 나는 장왕을 돌아보았다. 낭왕의 깃발에 오른팔이 잘린 장왕이 괴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무왕은 낭왕에게 달려들려는 그를 제지하느라 곤욕을 치르는 중이었다. 낭왕을 일별한 나는 장왕에게 달려갔다. 나를 본 장왕이 애꿎은 무왕에게 퍼붓던 장공을 중단하더니 돌연 부르짖었다.
“같은 편! 같은 편!”
“맞습니다, 어르신. 같은 편입니다.”
장왕을 껴안은 나는 그를 다독였다. 장왕이 마치 어미에게 안긴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의 어깨를 지혈하며 수혈을 짚었다.
내가 장왕을 응급 처치하는 동안 좀 전까지 고함을 질러대다 망연자실해 있던 소면통달이 낭왕에게 원성을 쏟아냈다.
“이 잔악한 놈! 교주가 성치 않음을 알면서도 살수를 쓰다니. 결코 묵과하지 않겠다.”
낭왕이 발끈했다.
“닥쳐라! 먼저 공격한 것은 그자이다. 그리고 살수라니? 내가 죽이려 들었다면 그자의 목이 온전할 것 같은가?”
나는 낭왕과 언쟁을 벌이려는 소면통달을 말렸다.
“진정하십시오, 어르신. 일단 장왕 어르신을 모시고 구세원으로 가십시오. 아직 접합할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 말에 소면통달이 황급히 혈도를 짚여 혼절한 장왕을 받아들였다. 내가 눈짓을 하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광객이 얼른 바닥에 떨어진 장왕의 오른팔을 집어 들었다.
“면목이 없네, 은공. 말리려고 했으나 나로서는 도저히…….”
나는 광객의 말을 막았다.
“아닙니다, 어르신. 오히려 제가…….”
이번엔 소면통달이 내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얘기는 나중에 하시게들. 어서 가세나, 광객.”
소면통달과 광객이 경신을 전개하자 나를 일별한 무왕은 들판 쪽으로 날아갔다. 삼인이 떠난 후 나는 낭왕에게 돌아섰다.
내 따가운 시선을 받은 낭왕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 잘못이 아니다. 나는 다만 구경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자가 별안간 위로 올라와서는 다짜고짜 나에게 장공을 발출했다. 처음엔 충돌을 피하려 했으나 나를 쫓아와 계속 공격하는 통에 하는 수 없이 응수했을 뿐이다. 어쩌다 보니 부상을 입혔지만 그자를 해하려던 의도는 추호도 없었다. 너도 알지 않느냐? 내가 독하게 마음을 먹었으면 얼마든지 그자의 목을 날릴 수 있음을.”
대부분 사실일 터이지만 하나는 거짓말이었다. 낭왕은 애초부터 그에게 완치불능의 내상을 안겨 준 장왕에게 앙갚음할 작정이었음에 틀림없었다. 어제 아침 정맹에서 나에게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그의 처사가 적들의 사주에 의한 것이 아님은 명백했다. 내가 정맹 원로들에게 낭왕과의 협약에 대해 알린 후 외인이 그를 회유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낭왕은 순전히 개인적인 보복심에서 사달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우리 진영 전체를 위험에 빠뜨린 것이었다.
낭왕을 두고 전략적인 사고가 부족할뿐더러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했던 진소월의 평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나는 낭왕과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고 인보당으로 돌려보냈다.
그를 비난한다고 장왕의 잘린 팔을 도로 붙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쓸데없는 갈등에 심력을 허비하느니 대책 마련에 집중하는 게 나았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 꼼짝 말고 있으쇼.”
지은 죄가 있는지라 낭왕은 내 명에 반발하지 못했다. 나는 그를 인보당에 두고 구세원으로 갔다. 예상했던 대로 의원들은 접합 불가라는 판정을 내렸다. 단순히 칼이나 검에 잘린 거라면 어찌어찌 붙일 수 있을 터이나 무지막지한 경기가 실린 기병에 뜯긴 탓에 절단 부위가 심하게 손상되어 도저히 손을 쓸 여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낭왕에게 보복하겠다고 길길이 날뛰는 삼대호법을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기실 그들의 광분은 시늉에 불과했다. 복수의 의지를 실행에 옮길 수 없음은 그들도 알고 나도 알았다.
그들의 분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을 때까지 적당히 장단을 맞춰 준 나는 괴선의 의실로 갔다.
나를 보자마자 괴선이 물었다.
“웬 소란이냐?”
“다 들었으면서 뭘 묻는 거요?”
“이놈아, 내 귀가 예전 같은 줄 아느냐?”
“……장왕 어르신이 좀 다쳤소.”
“허어, 이놈 보게. 팔이 잘린 게 좀 다친 거냐?”
“아, 제길. 알면서 왜 물었소?”
“그러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냐?”
“됐고, 좀 어떻소?”
“너야말로 뻔한 걸 왜 묻는 게냐? 보면 몰라? 움직일 수 있는 건 이 혀밖에 없다, 이놈아.”
“…….”
“죽상 하지 말라니까. 혀라도 멀쩡하니 얼마나 다행이냐? 그건 그렇고 잘 왔다. 안 그래도 네놈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괴선이 어떤 잔소리를 늘어놓을지 알고 있었기에 우울했다.
“어째서 그 아이에 대한 처분을 내리기 전에 나와 상의를 하지 않았더냐?”
“보나마나 실수니, 용서니 하며 쓸데없는 참견이나 할 것 같아서 그랬소.”
“그게 왜 쓸데없는 소리야? 그거야말로 핵심이거늘. 이제 보니 몰라서 안 한 게 아니었구나, 이놈. 덩치는 곰만 한 놈이 소갈딱지는 어째서 그렇게 밴댕이 똥만큼도 안 되냐? 그렇게 아량이 없어서야…….”
“아, 그만 하쇼. 다 끝난 얘기요.”
“뭘 그만 해, 이놈아. 그래, 대가리에 피도 덜 마른 어린아이를 이 엄동설한에 쫓아내서 이제 속이 후련하냐?”
“내가 쫓아낸 게 아니오. 제 발로 나간 거지.”
“이놈이! 지금 나하고 말장난 하자는 게냐?”
“이쯤 합시다. 나도 썩 편치는 않소.”
웬일인지 괴선이 내 청에 응해 입을 다물었다. 우습게도 그게 더 속이 쓰렸다.
이광의 출교를 알려준 이는 광객이었다.
진소월의 예상대로 이광은 내가 명교를 떠난 바로 다음 날 친인들에게 한 마디 말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떠난 이는 그만이 아니었다. 잠이 깨어 이광이 없어졌음을 깨달은 강태수가 그를 찾아오겠다며 따라나섰다고 했다. 둘 다 명교의 영토 어디든 통행할 수 있는 옥패를 갖고 있었기에 이동하는 데 제약이 없었을 터였다.
소면통달에게 그들의 행방에 관해 아는 바가 있는지 넌지시 물어보니 천승교까지는 행적이 확인되었으나 다리를 건넌 이후엔 행방이 묘연하다고 했다. 사전에 그들의 추적을 요청한 적이 없으니 소면통달을 탓할 수는 없었다.
* * *
나는 무왕에게로 돌아갔다. 이런 저런 구상을 하느라 천천히 걸어서 갔기에 구세원을 나온 지 반 시진 후에야 들판에 이르렀다.
“장왕은 어떻게 됐느냐?”
“안 될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구나. 독의라도 있었으면……, 아니 그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을 게다.”
무왕이 독의를 거론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상황이 더 나빠졌구나. 장왕이 전투에 나설 수 없게 되었으니.”
문제는 전력 약화가 아니었다. 장왕의 부상 소식은 열두 시진 이내에 대륙 전역에 퍼질 터였다. 그리고 이는 급전을 초래할 공산이 컸다. 적들은 낭왕의 포섭에 공을 들이기보다는 압도적인 전력으로 단번에 우리를 쓸어버리는 전략을 채택할 것이었다. 그리 되면 단기간 내에 필사적으로 무위를 상승시켜 형세를 맞추려던 내 의도는 초장에 무산되는 셈이었다.
“아까 하다 만 얘기인데, 내가 마련에 가서 도왕을 만나보마. 그는 내 설득에 응할 게다.”
“죄송하지만, 그러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마련이 두 분의 대면을 허용할 리도 만무하거니와 설령 그렇다 쳐도 마왕에게 붙을 수밖에 없었던 도왕의 사정을 해결하지 않는 한 별무소용일 테니까요. 무엇보다 마왕이 자기 소굴에 들어온 어르신을 그냥 돌려보낼 리 없습니다. 사왕은 진즉 가 있고 지금쯤 검왕도 마련에 합류해 있을 터인데 그들이 합공에 나서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십니까?”
“…….”
“하지만 조만간 적진에 가시도록 부탁드려야 할 듯싶습니다.”
“무슨 말이냐?”
나는 들판으로 오면서 궁리한 복안을 무왕에게 들려주었다.
* * *
무왕과 헤어진 나는 인보당으로 갔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기다림에 지쳤는지 심통 난 아이처럼 볼이 퉁퉁 부어있던 낭왕이 볼 맨 소리를 쏟아냈다.
“내가 당한 것에 비하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그날 그자의 장공에 내부의 절반 이상이 파열되었다.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내가 운기 할 때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느냐? 그럼에도 한편이 되었으니 참으려고 했는데 그자가 먼저…….”
“그만 합시다. 당신을 책망하러 온 게 아니오. 그보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러 왔소.”
“중요한 이야기라니?”
“검왕이 적들에게 가세했소.”
“뭐라고? 그가 왜? 그의 제자가 우리 쪽에 있지 않느냐? 가만, 그렇다면 그 아이가 정맹에 남은 것은 정파 인사들과 친교를 맺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때문이었더냐? 나를 속인 게냐?”
“정확한 내용을 알기 전까지 말을 아꼈던 것뿐이오.”
내가 듣기에도 궁색한 변명이었다. 낭왕의 외눈에 분노의 적광이 번득였다.
“나를 기만하지 마라. 내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서 나를 이용해 먹으려 들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테다.”
“당신을 기만한 적 없소.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거고.”
낭왕의 독안에 불신의 빛이 어렸다.
“그래서 당신에게 선택권을 주고자 하오.”
“선택이라니?”
“적들은 막강해졌소. 그러니 당신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게 됐소. 우리와 함께 싸워주길 바라지만 원한다면 당신 나라로 돌아가도 좋소. 단, 적들의 편에 서는 건 용납하지 않겠소. 그러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부터…….”
“나를 모욕하지 마라. 너도 알다시피 사왕과의 연수를 파기한 건 그가 먼저 등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네가 나를 배신하지 않는 한 나도 그럴 일 없다.”
낭왕과 나는 눈싸움을 벌이듯 서로를 맹렬하게 노려보았다. 지기 싫었으나 전략적인 판단에 따라 나는 안광을 누그러뜨렸다.
“당신을 믿겠소. 어쨌거나 결정해 주시오.”
“무얼 말이냐?”
“당신 나라로 돌아갈지, 아니면 여기 남아…….”
“나는 적들이 강하다고 도망치는 겁쟁이가 아니다. 다시는 나를 떠보지 마라.”
“고맙소. 그럼 함께 대책을 논의해 봅시다. 단, 지금부터 나누는 이야기는 우리 둘만 알고 있어야 하오. 절대로 비밀을 엄수해야 한다는 말이오.”
낭왕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만했다.
“내가 너 말고 말을 섞는 사람이 또 있느냐? 우리 사이의 대화가 외부로 새어나갔다면 그건 네가 불었다는 뜻이다.”
“흠, 그렇구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잖소? 누구에게도, 예컨대 무왕 어르신이 묻는다고 해도 알려줘서는 안 되오.”
“대체 뭔데 그러느냐?”
낭왕의 관심을 유발한 나는 내가 구상한 전술을 일러주었다.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하나밖에 없는 낭왕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