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71
제170화 주제넘게 나서지 말고 닥치고 있어!
내 요구에 응한 나현은 매일 세 번씩 급전을 보내왔다.
적의 동향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작전의 성패를 가름할 만큼 중요한 사안이었다. 나현은 그가 가진 정보망을 총 가동해 온 대륙을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특히 주목해달라고 요청했던 검왕은 그의 촉수에 걸려들지 않았다. 검왕이 아직 검총에 머물러있을 가능성은 서산일출보다 크지 않았다. 그는 이미 검총을 떠나 사마 진영에 합류했거나 그들의 집결처로 이동 중임에 틀림없었다.
누구든 보기만 하면 정체를 알 수 있는 그의 특이한 외양을 감안할 때 동선이 잡히지 않는다는 건 그가 매우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검왕이 스스로 그러한 전략적인 행동을 했을 리는 만무하니 이는 마뇌나 사벌 책사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 보아야 했다.
나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만약 사왕(四王)이 수하들을 거느리지 않고 그들끼리 명교의 영토에 잠입한 후 쥐도 새도 모르게 쳐들어온다면 막을 방도가 없었다. 그때는 도주만이 유일한 대책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벌어질 무자비한 학살을 외면하고 나 혼자 피신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아무리 불가피한 처신일지라도 차마 택하기 어려운 대안이었다.
그러므로 적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그들을 쳐서 그들의 전력에 균열을 내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려면 어떻게든 그들이 모여 침공 과정을 숙의하고 전략을 공유할 장소를 알아내야 했다. 가급적 사전에.
그러나 나현은 닷새가 지나도록 검왕은 물론이고 나머지 삼왕(三王)의 소재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진즉 마련을 떠났음은 불문가지였다. 대체 어디로 갔을까. 어디쯤 와 있을까.
답을 찾지 못한 질문에 나는 나날이 속이 타들어갔다. 초조함으로 인해 무왕과의 비무 수련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적들이 명교의 담벼락을 넘어 불쑥 나타날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리던 중 전날 독의의 잠적과 함께 실종됐던 점박이 노인이 돌아왔다.
들판에서 무왕과 손을 섞고 있다가 점박이 노인이 비대한 노인이 모는 마차를 타고 왔다는 귀면나찰의 보고를 받은 나는 구세원으로 달려갔다.
점박이 노인은 해골로 변해있었다. 뼈에 살가죽만 붙어있는 형국이었다. 너무 바싹 말라 움푹 팬 눈두덩 위의 흑점이 더욱 두드러졌다. 동공의 초점도 흐릿했다. 그렇지만 시력과 정신엔 이상이 없는 듯 나를 보고는 바로 침상에서 내려와 오체투지하려 들었다. 나는 점박이 노인의 무릎이 바닥에 닿기 전에 그를 붙잡았다.
“좀 어떠십니까, 은인?”
노인을 침상에 도로 누이며 물었다.
“그게,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광이가 따라준 차를 마시다 잠깐 졸았던 것 같은데 깨어보니 이렇게 되어 있더군요. 날짜를 들으니 한 달이나 지났다는데 도무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노인의 동문서답에 나는 좀 전의 질문을 구체적으로 풀었다.
“몸에 이상은 없는지요?”
단춧구멍처럼 작은 노인의 눈에 암운이 드리웠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게……, 아무래도 술력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소주.”
별안간 노인이 아이처럼 울먹였다. 그러더니 기어이 눈물을 쏟아냈다. 나는 생선가시처럼 앙상해진 그의 손을 잡고 다독였다. 하지만 위로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노인은 더 이상 천하제일술사라 자부할 수 없을 터였다.
“독의가 저를 납치했다고 들었는데, 그의 짓일 테지요?”
“그럴 겁니다.”
“나는 그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이런…….”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울먹이더니 노인이 억지로 진정했다.
“죄송합니다, 소주. 추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아닙니다, 은인. 제가 미안합니다. 저 때문에…….”
“아이고, 소신, 받들기 어렵습니다. 소주의 잘못은 하나도 없으니 제발 자책하지 마시옵소서.”
“……알겠습니다. 우선은 푹 쉬십시오, 은인.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힘겨워하는 노인을 놓아준 나는 뒤편에 얌전히 서있던 의원에게 그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한 후 방을 나갔다.
복도 끝에서 구세원으로 들어오고 있던 소면통달과 마주쳤다.
“나가는 참이었구려. 길이 엇갈리지 않아 다행이오.”
나는 소면통달이 내미는 첩지를 받아들었다. 벌써 미시(未時)가 됐던가.
별 기대 없이 파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비단종이를 펴 보다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첫머리에 나온 ‘단서’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빠르게 첩지의 내용을 통독한 후 소면통달에게 동행을 요청하고는 곧장 현현각으로 갔다. 그러고는 오랜만에 뵙는다며 장광설을 늘어놓으려는 현현각주를 그에게 떠넘기고 서고로 가서 팔방전도를 조사했다. 총 팔십팔 권 중 내게 필요한 책은 한 권이었으나 나는 그 전후의 책들도 꺼내 면밀히 살펴보았다. 목표지역의 면적이 방대하고 지형이 복잡한지라 지리를 머릿속에 새겨 넣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도중에 소면통달을 불러 나현에게 보낼 급전의 내용을 일러주었다. 내 태도에서 사태의 중대성을 깨달은 소면통달은 부랴부랴 밖으로 달려 나갔다.
한 시진쯤 후 마지막 책을 덮은 나는 심호흡을 했다. 이제 출전해야 할 시간이었다.
* * *
도경산은 작은 산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대산이었다.
거느린 봉우리만 팔천 봉이 넘었고 동서로 이어진 길이가 일백칠십 리에 달했다. 기본적으로 절경을 자랑하는 데다 계절마다 다른 풍광을 갈아입었기에 사시사철 호사가들과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중원 동북부의 명소였다.
해가 떨어진 직후 명교와 중립지대의 경계선에서 서쪽으로 사백이삼십 리가량 떨어진 도경산에 당도한 나는 ‘사전 조치’를 한 후 최고봉인 유주봉으로 향했다. 높이는 사백여 장에 불과했으나 사면의 경사가 다 가팔라 범인은 오르기 힘든 험산이었다.
유주봉의 중턱에 이르렀을 때 나는 ‘그들’의 기운을 감지했다. 거리가 너무 멀어 아지랑이처럼 미약했으나 미리 기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있었기에 금방 포착할 수 있었다. 염두에 두었던 세 가지 전술 중 첫 번째를 고른 나는 일백 장을 더 오른 후 내기를 발산했다. 그러자 채 두 호흡도 지나지 않아 네 개의 그림자가 내 팔구 장 면전에 떨어져 내렸다.
저마다 무시무시한 압기를 발하는 사인(四人)의 왕은 각기 다른 표정을 면면에 담고 있었다. 하지만 당혹감은 공통적이었다.
맨 먼저 입을 연 이는 좌측 끝에 선 사왕이었다.
“제 발로 찾아오다니, 겁 대가리를 삶아먹었구나, 애송이. 하지만 혼자 오지는 않았을 터. 외적과 역적은 어디에 숨겨두었느냐? 그따위 얄팍한 수작이 또 통할 성싶으냐?”
외적은 낭왕을, 역적은 무왕을 지칭할 터였다. 어쨌거나 사왕의 질문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그가 내게서 답이 나오리라 기대했을 리는 만무했다. 그럼에도 굳이 그런 소리를 지껄인 건 검왕에게 후방에 내 방수들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도저히 호감을 품을 수 없는 위인이었으나 나는 사왕에게 감사했다. 그는 적들의 동향을 알게 해 준 일등공신이었다. 그로부터 정보가 새어나갔기 때문이었다. 물론 본인은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를 터였다.
방금 전의 질문도 내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그로서는 자기편, 즉 검왕에게 내 수법을 상기시키려는 의도였을 테지만 역으로 그들이 아직 충분한 논의를 하지 않았음을 드러낸 꼴이었다. 검왕은 그들에게 합류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 분명했다.
한편 나는 사왕이 역적 운운했을 때 도왕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바람직한 징조였다.
사왕이 기특했지만 나는 그에게 거친 말을 쏟아냈다.
“여기서는 가장 졸자일 테지, 겁쟁이? 그러니 주제넘게 나서지 말고 닥치고 있어.”
모욕감으로 사왕의 얼굴이 화로에 든 인두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분기탱천한 그가 폭발하기 전에 그 옆에 서 있던 검왕이 내게 호통을 쳤다.
“갈(喝)! 실로 고약한 종자로다.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날뛴다만 너는 오늘 염왕을…….”
나는 검왕을 무시하고 맨 오른쪽 자리에 선 도왕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정신 차리십시오, 어르신.”
채찍을 휘둘러 도왕을 움찔하게 만든 나는 바로 당근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염려 마십시오. 제가…….”
마왕은 내가 비장의 패를 꺼내도록 방치하지 않았다. 그가 불문곡직 내게 쇄도하며 철삭을 휘두르자 탐색전이 그대로 종료되고 상황은 급전직하했다.
* * *
나로서는 최대한 적당한 장소를 고르긴 했으나 적들의 배치는 약간 불만스러웠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내가 원하는 대로 늘어서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나는 마왕이나 검왕이 선공하리라 예상했다. 전자가 약간이라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가 기습을 해왔을 때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신속하게 대처했다. 나의 대응은 마왕의 쇠사슬을 흘려내며 사왕을 치는 것이었다. 나름 대비를 하고 있었을 테지만 사왕은 첫수에 전력을 실은 내 공격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했다. 내가 철봉으로 쏘아낸 광참은 그가 황급히 발출한 장공을 가르고 그의 동체를 직격했다. 장공이 어느 정도 차단한 데다 호신강기를 두르고 있었기에 즉사는 모면했지만 상당한 타격을 입었음에 틀림없었다. 마치 죽기라도 한 듯 단말마의 비명을 토해낸 것이 그 증거였다.
나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사왕을 일수에 무력화시키는 데 사활을 걸었던 탓에 또 다른 적들의 합공을 회피할 여력이 없었다. 마왕의 철삭은 아슬아슬하게 빗겨냈으나 극도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음에도 검왕의 철검에서 분출된 탄강들 중 하나를 옆구리에 허용하고 말았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갔다면 복부가 속절없이 터져나갔을 터였다.
최초의 공방전은 내 승리였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이었다.
중상에 준하는 부상을 입었지만 나는 경신을 전개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그리고 목표했던 대로 사왕을 일찌감치 추격자의 대열에서 탈락시켰다. 상당한 충격을 받기는 했으나 전투불능의 상태에 처한 것은 아님에도 사왕은 내 기대대로 그를 치자마자 산 밑으로 달아나는 나를 쫓아오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아군이나 다름없었다.
도왕도 얼마간 쫓는 시늉만 하다가 점점 멀어졌다. 내가 마련한 패가 통했다는 반증이었다.
계획했던 바를 멋지게 성공시킴으로써 나는 유리한 국면에 들어섰다. 아직 검왕과 마왕이 남아있지만 추격전에 관한 한 천하제일이라 할 나에겐 심대한 위협이 될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을 따돌릴 수 있을뿐더러 잘 하면 한 명 정도는 역으로 사냥할 수 있으리라 낙관했다.
그러나 일방적인 수읽기였다. 유주봉을 다 내려가기도 전에 나는 예기치 못한 변수로 인해 위급지경에 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