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73
제172화 그런 자들일수록 제 명을 채우지 못하고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와 검왕 모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자폭에 실패했고 그는 내 머리카락만 갈랐을 뿐이었다. 전자는 요령부득 때문이었고 후자는 내가 엉덩방아를 찧음과 동시에 상체를 뒤로 눕혀 그의 검을 피해낸 덕분이었다.
내 회피는 조금이라도 늦게 이승을 떠나려는 발버둥이 아니었다. 검왕이 다시 내 목을 칠 겨를이 없으리라 판단한 소치였다. 과연 그는 코앞의 나를 염왕에게 보내지 못하고 검을 돌려 낭왕의 깃발을 막아야 했다. 그러면서 좌수로는 장공을 발출해 내 두부를 깨뜨리려 했다. 하지만 내가 등이 바닥에 닳기 전에 옆으로 굴렀기에 그의 장공은 애꿎은 땅만 때렸다.
그러는 동안 낭왕은 곤경에 처했다. 검왕에게 발이 묶인 바람에 어느새 신형을 추슬러 후방을 공략해 온 마왕의 쇠사슬에 대처하지 못한 것이었다.
펑!
풍등이 터지는 기음과 함께 철삭에 등을 강타당한 낭왕이 고꾸라졌다. 앞으로 쓰러지는 그에게 검왕이 검을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낭왕은 그 와중에도 고개를 틀어 머리를 보호했다. 그러나 철검의 강기에 좌견이 찍히고 말았다. 그의 동체가 사타구니 근처까지 갈라졌다. 전날 내가 그의 깃발에 당했던 것과 유사한 중상이었다.
치리링.
허공을 선회한 마왕의 쇠사슬이 전투불능에 처한 낭왕의 목을 휘감아갔다. 하지만 단두의 참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낭왕을 구한 것은 나였다.
자폭할 양으로 내단을 쥐어짜자 뜻밖에도 원력이 뿜어져 나왔다.
충분한 양은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경신을 전개할 수 있을 성싶었다. 나는 낭왕의 상체를 쪼갠 검왕이 나에게 눈을 돌릴 찰나 땅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초반에 으깨졌다 아직 회복이 덜 된 다리의 뼈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악화를 걱정할 계제가 아니었다.
나는 마왕의 쇠사슬이 낭왕의 목에 걸리기 직전 그를 낚아채 협곡 쪽으로 몸을 날렸다. 남은 원력을 아낌없이 쏟아 부어 거듭 순간 가속을 발한 덕분에 단숨에 십여 장을 벌었다. 검왕과 마왕이 나를 쫓아왔다.
나는 검왕이 또 한 번 비술을 발휘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한 가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얼마 전 사벌과 정맹을 방문하러 대륙을 종횡할 때 검황자는 한 번도 그 수법을 구사하지 않았다. 이는 그 절학을 사용하는 데 공력이 엄청나게 소모된다는 반증이었다. 검왕 역시 오늘 꼭 필요할 때 외에는 그 패를 꺼내들지 않았다. 수시로 썼으면 쉽게 승부를 매조지 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다면 결정적인 때를 기다려 좀 더 아끼려들지 않을까. 그래야 했다. 그래야 달아날 수 있었다.
협곡에 진입하고서 이십여 장쯤 나아갔을 때 나는 소리를 질렀다.
“나와!”
모퉁이 수풀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비대한 체구의 인영은 으깨진 팔로 간신히 낭왕을 잡고 있던 나를 안아들고 쏜살같이 비행했다. 뒤에서 당혹감이 담긴 대화가 날아왔다.
“함정이오.”
“저자는 무왕이 아니다.”
“하지만 틀림없이 저 안쪽 어딘가에 숨어있을 거요. 도왕과 사왕을 불러야 하오.”
뒤로 갈수록 두 사람의 음성이 점점 멀어졌다. 그들이 멈춰 섰다는 뜻이고 검왕도 내-외상이 상당하다는 반증이었다. 아무리 천하최강이라 자부하더라도 온전치 않은 상태에서 무왕과 조우하는 건 부담스러웠을 터였다.
그래도 안심하기엔 일렀다. 나는 검왕과 마왕이 추격을 재개할 것에 대비해 내단을 마구 쥐어짰다. 최소한 광환을 발출할 수 있을 정도의 원력을 뽑아내야 했다. 양팔이 다 망가져 철봉과 옥소를 부릴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반격을 할 수 있음을 과시하지 않으면 도주의 성공 확률은 전무에 가까워질 터였다.
다행히 적들은 우리를 쫓아오지 않았다.
창자처럼 구불구불한 협곡을 빠져나가고서야 나는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나를 안은 만리풍에게 쉼 없이 달리도록 독촉했다. 도경산을 나오고 족히 칠팔십 리는 더 가서야 한식경 이상 전속력을 유지하느라 탈진지경에 이른 그에게 휴식을 허락했다. 그가 수십 리를 질주한 개처럼 숨을 할딱이며 우리를 내려놓자 나는 낭왕의 손을 잡았다.
“조금만 참으시오. 곧 중원에서 으뜸가는 의원을 만날 거요.”
낭왕의 외눈에 복잡한 빛이 떠올랐다. 부정, 분노, 후회, 체념, 그리고 허망함.
나는 그가 독의를 보기 전에 이승을 떠날 것임을 알았다. 기식이 엄엄해서가 아니었다. 기실 그는 이미 죽은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의 명줄이 붙어있는 건 오로지 심후한 내공 덕택이었다.
유언을 할 거라 예상했는데 낭왕이 유주봉에서 치렀던 혈전에 대한 감상을 밝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왕을 끝장낼 것을. 하지만 멋진 싸움이었다.”
“…….”
“너는 대단하다. 용자 중의 용자다. 홀로 그들에게…….”
목소리를 토해내는 것조차 힘겨운지 낭왕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문득 전날 작전을 들려두었을 때 외눈을 한껏 부릅떴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적진에 가서 사왕(四王)과 대면한 후 둘을 떨구고 둘만 달고 올 거라고 하자 그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신도 최고의 전사이자 전우였소. 나를 구해줘서 고맙소.”
“피차일반…….”
말을 뱉다말고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더니 낭왕이 축 늘어졌다. 그대로 사망인가 싶었는데 그가 별안간 크게 부르짖었다.
“약속을…….”
“…….”
나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강렬한 안광을 분출하는 낭왕의 눈을 감겨주었다. 그러고는 그가 못다 한 말을 완성해 주었다.
“반드시 지키겠소.”
낭왕은 흡족한 미소를 머금지 않았다. 죽은 자는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는 법이었다.
* * *
나는 만리풍을 부려 낭왕의 시신을 임시로 동백나무 아래에 묻었다. 격전지에 떨어뜨리고 온 그의 번(幡)은 나중에 회수할 참이었다.
낭왕을 묻고 난 후 거목 아래 가부좌를 틀고 앉자 만리풍이 내 눈치를 보며 보챘다.
“죄송하오나 일이 끝나는 대로 모시고 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어서 출발했으면 합니다. 늦으면 그이가 저를 문책할 것입니다.”
나는 만리풍의 청을 묵살하고 운공에 들었다. 그를 앞에 두고 무방비상태에 빠지기는 싫었지만 더는 미루기 어려웠다.
만리풍은 적어도 겉으로는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아마 내가 운공에 든 동안에도 딴 생각을 품지 못할 터였다. 그럴 요량이었으면 협곡에서 나를 적들에게 넘겨주고 내뺐을 것이었다.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은신했던 풀숲에서 나오지도 않았거나.
경공을 특장기로 하는 탄월문(彈月門) 출신이고 십왕을 제외하면 비영과 더불어 중원제일경신대가를 다툰다는 정도를 빼면 만리풍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추가적으로 그가 독의의 수족임을 알고 있었다.
만리풍이 협곡에 은신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를 그 장소에 대기시킨 건 바로 나였다.
엿새 전 진소월과의 협상에서 나는 독의의 요구사항 중 절반을 들어주었다. 정혈과 정액이었다. 나머지 둘은 여섯 개의 조건을 달고서 독의가 응할 시 건네기로 했다.
점박이 노인의 석방에 덧붙여 비영 같은 독강시를 내달라는 게 내가 내민 첫 번째 조건이었다. 만약 독강시가 없다면 만리풍으로 대체해도 된다고 했다. 전투력은 보잘것없지만 경공만 따지만 비영 못지않은 비만 노인은 내가 염두에 두었던 도주 상황이 발생할 시 크나큰 도움이 될 터였다. 독의는 오늘 오전 점박이 노인을 실은 마차의 마부로 그를 보냄으로써 내 요구를 수용했다.
나는 만리풍을 도경산 협곡 내부에 배치했다. 그의 임무는 내가 신호를 보내면 즉시 은신처에서 나와 나를 안고서 도주하는 것이었다. 만약 따로 부르지 않으면 두 시진가량 숨어 있다가 독의가 지정한 장소로 가 있으라고 했다. 만리풍을 써야 할 상황에 처하지 않기를 바랐으나 실제로 그리 될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그를 안배해두었다.
* * *
내-외상이 워낙 심한 탓에 다음날 새벽까지 운공에 들었음에도 나는 본래 무력의 십분의 일도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모의 치유력이 극상의 효능을 발휘한 덕분에 으깨지고 바스러져 부스러기가 되었던 사지의 뼈들은 그럭저럭 원형을 되찾았다. 원력도 경신을 전개하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는 돌아왔다.
내가 눈을 뜨고서 몸을 일으키자 밤새 애를 태웠을 만리풍이 성급하게 물었다.
“이제 가도 될는지요?”
“갑시다.”
내 대답에 반색하며 만리풍이 나를 안으려 들었다. 나는 손을 내저었다.
“앞장서시오.”
만리풍은 놀란 기색이었다.
“벌써…….”
“가자니까.”
“네, 전왕.”
만리풍이 비계가 출렁이는 비대한 몸을 동편으로 날렸다. 나는 그를 쫓았다. 나를 배려하려는 건지 만리풍은 협곡을 빠져나올 때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달렸다. 준마가 노새로 바뀐 셈이랄까.
“더 빨리 가도 좋소.”
“그게 아니라 워낙 먼 길인지라…….”
“어딘데?”
잠시 머뭇거리던 만리풍이 내가 그의 옆으로 붙어 슬쩍 노려보자 마지못해 털어놓았다. 대가 약한 위인이었다.
“의주(懿州) 인근의 백향산에 있는 장원입니다.”
의주라면 대충 사오백 리쯤 될 터였다. 내가 가속을 발할 시 반 시진이면 당도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나는 만리풍을 안고 갈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뭐 하러 그런 수고를 한단 말인가. 조바심이 난 건 독의일 텐데.
“그럼 알아서 가시오. 따라 갈 테니.”
“알겠습니다, 전왕.”
만리풍이 내력을 분배하며 달린 탓에 목적지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동이 터 사위가 환했다. 산기슭에 자리한 장원은 고풍스러운 와옥을 여덟 채나 거느린 대장(大莊)이었다. 그러나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기감을 끌어올린 나는 오른쪽에서 두 번째 와옥에 누군가 들어있음을 감지했다. 과연 만리풍이 곧장 그리로 가더니 와옥 앞에 서서 보고했다.
“전왕을 모시고 왔습니다.”
나는 위화감이 들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직접 오다니.
“어서 오게나, 전왕.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네.”
독의의 목소리였다. 그에 대한 반감과 상관없이 대담한 성정에는 감탄이 나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그윽한 향기가 코로 밀려들었다. 나는 다향(茶香)이 흘러나오는 곳으로 갔다. 주렴을 열고 들어서자 탁자에 앉아 차를 따르고 있는 독의가 보였다.
“마침 잘 왔네. 방금 호연 특산의 몽인(朦燐)을 우려낸 참이었거든. 천하에서 가장 향이 좋은 차라네. 뭐, 나와 의견이 다른 자들도 없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한 잔 들게나. 아! 독은 들지 않았으니 겁먹을 것 없네.”
썰렁한 농담을 던지는 독의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나는 그를 겁박했다.
“나와 대면할 생각을 하다니, 겁이 없군, 노물. 그런 자들일수록 제 명을 채우지 못하고 뒈지기 십상이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차를 마저 따른 독의가 주전자를 내려놓으며 싱긋 웃었다.
“자네 연인을 영생불사지체로 만든 이후엔 얼마든지 내 목을 비틀어도 좋네. 그때까지는 좀 참게나.”
인정하긴 싫지만 진소월을 들먹인 독의의 수작은 효과가 있었다. 불문곡직 머리통을 부숴버리고 싶었으나 나는 자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더라도 나를 자극해서 이로울 게 없다고 여겼는지 독의가 잽싸게 화제를 바꾸었다.
“그나저나 사왕(邪王)은 어찌 되었는가? 자네가 무사한 걸 보니 그 야비한 작자는 지금쯤 염왕전에 있을 테지?”
일종의 공치사였다.
내가 ‘내단’과 ‘골수“를 대가로 독의에게 내건 조건 중에는 그의 인맥을 동원해 사왕이나 마왕의 소재를 파악해달라는 것도 들어있었다. 독의는 정사마의 수뇌부 모두에 내밀한 끈을 두고 있었다. 이번에 사왕(四王)의 회합장소가 도경산 정상이라는 극비사항을 알아낸 것은 전적으로 그의 공이었다. 사왕이 은신처를 나서며 심복이라 할 흑산응(黑山鷹)에게 부주의하게 흘린 기밀이 독의에게 전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정보는 나현을 거쳐 나에게 이르렀다. 단 열네 시진 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