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75
제174화 괜찮으시다면 그분의 이야기를 마저 듣고 싶습니다
변명하건대 나는 불청객인 나를 허물없이 반기는 이에게 일만 떠맡기고는 그가 원하는 사담을 뿌리칠 만큼 야박한 위인은 아니었다. 내가 서둘러 그의 처소를 나온 데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급한 요의 때문이냐고? 천만에! 뭐, 그와 비슷하긴 했다.
나로 하여금 서둘러 마충에게 작별을 고하도록 한 건 다름 아닌 빛줄기였다. 어째서 그와 얘기를 나누는 도중 느닷없이 수십 줄기의 빛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섬광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궁구에 들어야 함을 알았다.
그래서 마충의 처소를 나오자마자 수직으로 비상한 후 목격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의주 상공을 낮게 날았다. 다행히 폭우가 어느 정도 내 모습을 가려주었다.
의주를 벗어난 나는 곧장 운공에 들었던 백향산의 토굴로 향했다. 전속력을 발한 덕분에 반 각 만에 당도할 수 있었다. 마음이 급했던 나는 토굴 입구를 가릴 새도 없이 안에 들어가서는 가부좌를 틀었다. 그러고는 정신을 모았다. 다행히 잔상만 남기고 사라졌던 빛줄기들이 다시 심상에 떠올랐다.
어지럽게 얽히고설킨 광선들을 주시하다 나는 그것들이 어제 아침의 혈전에서 비롯된 성과임을 깨달았다. 그 선들은 검왕의 탄강들을 빗겨내던 중 내가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이 빛살들을 완벽히 피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그러지는 못하더라도 타격을 덜 입을 수는 있지 않을까?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격전 중에는 묻기만 했을 뿐 답을 구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현재의 능력에서 최선의 대응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고작이라고 했지만 나는 생사가 오가는 실전에서 내 신법의 극치를 구현해냈다. 여러 군데 부상을 입긴 했어도 내 목이 아직 붙어있는 이유였다.
사지를 탈출한 후 까맣게 잊었던 질문들은 내 의식의 근저에 침잠했던 듯했다. 그러고는 알아서 답을 구하고는 용솟음 친 것이었다. 기특하게도.
물론 선들은 정답은 아니었다. 기실 그것은 답이라기보다는 예시에 가까웠다. 나는 마구잡이로 뒤섞인 선들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그리고 시현 가능한 형태로 입체화했다. 어려운 작업이었으나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무아지경에 빠졌음에도 나는 지난 번 마련에서의 결전 이후 한 달 만에 내가 발돋움하고 있음을 자각했다.
* * *
토굴 밖으로 나가자 동천에 새벽별이 떠 있었다.
헷갈렸다. 마충을 만난 게 어제 저녁이었던가. 그렇다면 내일 가야 했다. 하지만 벌써 이틀이 지났을지도 몰랐다. 무학의 궁구에 들었을 때 나는 시간의 경과를 인지하지 못했다.
바로 알아보기로 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마충을 찾아가 물어보면 그만이었다. 설령 그와 헤어진 게 어제라고 해도 설마 하루 일찍 왔다고 타박이야 하겠는가. 제 시간이라면 다행이었고 그보다 더 시간이 흘렀다면 사과하면 될 일이었다.
나는 언제 장대비가 쏟아졌냐는 듯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나현의 터전인 우한 못지않은 대도였지만 우한 같은 환락의 도시는 아닌지라 의주는 뭉근한 어둠에 잠겨있었다. 들킬 우려가 적었기에 나는 저자에 내리지 않고 허공을 가로질러 곧장 소연표국으로 갔다.
마충의 처소 창 너머 불빛이 아른거렸다.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주위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나는 철문으로 가서 전날처럼 통보 없이 열고 들어갔다. 창가에 서성이다 나를 본 마충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어서 오시오, 전왕. 이제나저제나 하며 목 놓아 기다렸다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걱정했소만, 무사했구려. 다행이오.”
나는 민망한 질문을 해야 했다.
“오늘이 며칠입니까, 마 대협?”
마충이 즉답하지 않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날짜도 알지 못하는 얼간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이월 초하루이오만.”
하아, 역시. 열흘이나 지났다니. 어쩐지 배가 심하게 고프더라니. 그래도 지난 번 마련에서보다는 이틀이 단축된 셈이었다. 이것도 발전일까.
“심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무공을 구상하느라 묵상에 들었는데 이렇게 오래 지났을지 몰랐습니다.”
마충이 탄성을 내질렀다.
“하아, 과연! 그 정도의 집중력이니 이토록 젊은 나이에 절대지경에 이르렀을 테지요. 참으로 부럽소이다.”
내가 고소를 짓자 시간낭비를 꺼린다는 의사표시로 오해했는지 마충이 첩지를 꺼내들었다.
“그날 전왕의 전언을 상운 전체에 알리자 일곱 시진 만에 답신이 왔소. 아시겠지만 출처는 불분명하오. 발신하는 쪽에서 철저히 흔적을 지웠더구려.”
나는 첩지를 받아 펴보았다. 내 질문들과 무관해 보이는 내용이 깨알만한 글씨로 빽빽이 들어있었다. 하지만 나는 나현이 보낸 것임을 알았다. 두 번째, 아홉 번째, 열세 번째, 그리고 열일곱 번째 등 미리 공유한 순서대로 글자들을 추려내니 답이 나왔다.
‘성공’과 ‘불명(不明)’이었다.
* * *
두 번째 답은 실망스러웠지만 첫 번째 답에는 쾌재를 불렀다. 그것은 무왕이 마련에 인질로 잡혀있던 도왕의 시동(侍童)을 구했다는 뜻이었다. 도왕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 일시에 전력의 균형을 맞출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연초에 내 부탁을 받고 도천을 면밀히 조사한 나현은 주목할 만한 정보를 건져냈다. 따로 몸종을 부리지 않았던 도왕이 작년 가을부터 예닐곱 살 어림의 소동을 곁에 두기 시작했다는 것과 십일월 하순 경 그 소동이 사라지고 나흘 후 그도 모습을 감추었다는 것이었다. 그 며칠 간 그가 웬일인지 안절부절못했다는 측근들의 증언도 있었다. 이는 마련이 무왕의 시동을 납치해 인질로 삼았다는 정황증거였다.
시동이 도왕에게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내아이지만 미소녀처럼 예쁘장한 용모였다니 도왕이 남색의 취미를 가졌을 수도 있고 시동이 아니라 제자로 점찍고 키우려던 참이었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단순히 손자를 보듯 애정을 느꼈을지도 몰랐다. 이유가 무엇이건 그 아이가 도왕에게 소중한 존재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소동이 마련에 잡혀있음을 확신한 나현은 상대적으로 부실한 그쪽 정보망을 총 가동해 아이의 소재를 파악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도왕의 시동으로 짐작되는 아이가 색동들을 모아놓은 계양 외곽의 극락전에 있음을 알아냈다.
소동은 밀지에 갇혀있지 않고 극락전 내부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모양이었다. 심히 미심쩍은 조치였으나 아마도 너무 어려서 도주할 수 없으리라 여기고 방심한 듯했다.
나는 나현의 정보를 바탕으로 마련에 인질로 잡힌 소동을 구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일을 무왕에게 부탁했다. 얼마나 중대한 임무인지 알기에 무왕은 흔쾌히 수락했다.
소동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특별한 외모를 가져서가 아니라 뚜렷한 특징이 있기 때문이었다. 소동은 왼손 새끼손가락이 없었다.
나현의 첩지에서 그 대목을 읽었을 때 나는 진소월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재작년 가을 그녀를 납치한 신필주는 그녀의 손가락을 잘라 나를 신창 대흥관에 오도록 강요했다. 마련도 도왕에게 똑같은 수법을 쓰지 않았을까. 분명 그 손가락에는 그만이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이 있을 터였다.
아무튼 적들이 도경산에 결집할 거라는 급보를 받았을 때 나는 무왕에게 마련으로 가 줄 것을 청했다. 그를 낭왕과 함께 도경산 밑자락에 잠복시킬까 잠시 고민했으나 애초의 계획대로 인질구출을 맡기기로 했다. 마련엔 내게 죽은 검마와 폐인이 된 철마를 제외하고도 육마가 도사리고 있으니 그 말고는 해낼 사람이 없었다.
무왕은 최대한 은밀히 잠입한 후 순식간에 끝내야 한다는 내 당부를 들으며 나보다 앞서 출발했다. 그를 믿었지만 이런 일에는 문외한인지라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멋지게 해낸 것이었다.
* * *
첩지에 담긴 양은 상당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필요한 부분을 확인한 나는 내려놓았다.
마충이 내 기분을 살피며 물었다.
“원하는 답을 얻으셨소?”
밀봉된 서신이 아니었기에 마충도 내용을 읽었을 터였다. 그리고 첩지 전체가 일종의 암문임을 알아차렸을 것이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겠지만 그가 암호를 해독했다 해도 상관없었다. 내 질문에 포함된 ‘그분’과 ‘그자들’이 누군지 모른다면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었다. 설사 ‘그분’이 무왕을 지칭함을 눈치 챘더라도 ‘성공’이 뜻하는 바를 모를 터이니 마찬가지였다.
“절반은요.”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거니와 호감이 가는 이에게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내 말을 부정적인 결과로 받아들였는지 마충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나는 그의 경직을 풀어주기 위해 감사인사와 함께 가벼운 질문을 던졌다.
“아무튼 고맙습니다. 마 대협 덕분에 귀중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쭈어도 될는지요?”
“뭐든지 하문하시구려. 원한다면 무덤까지 갖고 가려했던 내 치부까지 다 고하겠소.”
“하하, 그런 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어째서 표국이름을 소연(小鷰)이라 지으셨는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긴장이 풀린 마충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의 호랑이 눈에 아련한 빛이 어른거렸다.
“소연은 내 젊은 날 연인의 어릴 적 애칭이라오. 작지만 날랜 몸을 가져 다들 그렇게 불렀더랬소.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그러니까 열여덟을 넘기고부터는 비돈(飛豚)이라는 별명을 얻었소. 날랜 건 여전했지만 몸이 많이 불었기 때문이오. 그녀는 그 별명을 끔찍이 싫어했소. 누구든 그녀 앞에서 그 별명을 지껄이면 사생결단을 내려들었다오. 아, 오해는 하지 말구려. 그녀는 고약하거나 편협한 성정이 아니었소. 큼직한 몸집만큼이나 너그럽고 호방한 성격이었다오. 여장부라고나 할까. 그리고 참 따뜻한 사람이었소. 헐벗고 주린 아이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소. 그래서 우리 고향이었던 연촌에는 어린 거지가 없었다오.”
마충의 강퍅한 뺨 위로 두 줄기 눈물이 흘렀다. 외공을 익힌 무사처럼 굳은살이 손등까지 박인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마충이 사과했다.
“미안하오. 주책을 부렸구려.”
“아닙니다, 마 대협. 괜찮으시다면 그분의 이야기를 마저 듣고 싶습니다.”
“내 죽마고우이자 연인이자 존경하는 벗이자 최고의 동료였던 그녀는 스물넷을 넘기지 못하고 명을 달리했소. 우리 둘 다 꿈에 그리던 표사가 된 지 불과 다섯 달만의 일이었소. 표행 중 안협관에서 녹림 도당을 만나 난전을 벌이다 등에 칼을 맞았다오. 혈투가 표국의 승리로 끝나고 뒤늦게 피를 흘리고 쓰러진 그녀를 안았을 때 그녀가 말하더이다. 훗날 목표를 달성하면, 그러니까 우리의 표국을 세우면 자기 이름을 넣어달라고. 그러마고 약속하기도 전에 숨을 거두었소.”
마충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죄송합니다. 괜한 걸 여쭈었나 봅니다.”
“아니오. 반백년이나 지난 일인데 아직도 이런 감상에 빠지다니 부끄러울 뿐이오.”
내가 위로의 말을 건네려는 찰나 마충이 정색하더니 화제를 바꾸었다.
“나도 전왕에게 하나 물어봐도 되겠소?”
“말씀하십시오.”
“혹시 전날 상운에 알리라고 했던 두 번째 전언에 나오는 ‘그자들’이 전왕의 적진에 선 왕들을 가리키는 게요?”
“……그렇습니다.”
“그러면 절반의 답을 얻었다는 게 그들의 행방에 관한 것이었소?”
나는 질문이 하나를 초과했음을 지적하지 않고 순순히 대답했다. 마충이 무슨 얘기를 할지 감이 잡혔기 때문이었다.
“아닙니다.”
맹수의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마충이 내가 기대한 말을 뱉어냈다.
“어쩌면 내가 약간의 도움을 드릴 수 있을 듯싶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