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76
제175화 오늘 여기서 뒈질 테니까
마충이 말을 이으려는데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밖에 누군가 접근해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나에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한 마충이 문으로 갔다. 그러고는 내가 보이지 않도록 문을 조금만 열고는 첩지를 받아들고 내게로 돌아왔다.
“보시구려.”
나는 마충이 건네 첩지를 펴보았다.
「인시(寅時) 초, 검왕으로 추정되는 괴인 고유현 통과.」
“고유현이 어딥니까?”
“여기서 남동으로 육백칠십 리쯤 떨어진 소촌이외다. 작은 마을이지만 눈썰미가 좋은 흑문의 첩인이 들어 있다오.”
대답을 하며 마충이 품에서 또 다른 첩지를 꺼내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서 내용을 확인했다.
「자시(子時) 말, 검왕 조양 상공 출현. 수락산 쪽으로 날아감.」
“조양은 어딘지요?”
“예서 정북으로 오백 리가량 가면 나오는 소도(小都)라오. 아니, 인구가 채 오천이 안 되니까 대읍(大邑)이라고 하는 게 옳겠구려.”
첩지들이 뜻하는 바를 헤아리고 있는데 마충이 자기 분석을 내놓았다.
“조양에서 고유현을 이으면 검왕이 가는 방향을 추정할 수 있을 것 같소. 그길로 계속 가면 검총이 나온다오.”
“검왕이 확실합니까?”
우문이었다. 마충이 반문으로써 내 실수를 지적했다.
“다른 이를 그로 착각하기는 어렵지 않겠소?”
맞는 말이었다. 팔 척 장신의 삐쩍 마른 그림자가 밤하늘을 새처럼 비행하고 있다면 검왕 말고는 떠올리기 어려웠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검왕은 왜 동선을 드러내고서 검총으로 돌아가고 있는 걸까.
마충이 말을 이었다.
“근자에 사마의 제왕들과 도검의 왕들이 모처에서 회합을 가질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소. 아마도 조양 근처 어딘가에서 만난 모양이오. 회담이 결렬되어 검왕이 검총으로 귀환하는 게 아닐까 싶소만.”
그들이 보름 전 이미 도경산에서 만났기에 틀린 추론이었다. 그러나 검왕이 삼왕(三王)과 떨어졌음은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마충을 바라보았다. 그가 말했던 ‘약간이 도움’은 검왕의 동향을 알리는 정도가 아닐 터였다. 예상대로였다.
“조양 서편에는 금지(禁地)가 있소. 사벌이 직할 통치하는 만유산(滿濡山)이오. 금광이 폐쇄된 지 오래지만 지금도 범인은 발을 들이지 못하는 곳이라오. 거기가 ‘그자들’의 회합장소일 듯싶소. 그래야 검왕이 조양에서 최초로 목격된 일이 설명 가능하오.”
다른 갈래의 해석들도 가능하겠지만 나는 마충의 주장을 반박하지 않았다.
* * *
나는 뜻밖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두고 고심했다. 기실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기에 결론을 내리는 데는 반의반 각이면 충분했다.
일단 가 볼 참이었다. 마충의 짐작이 들어맞았다고 치더라도 삼왕(三王)이 아직 거기에 남아있을는지 의문이었지만 확인은 해 봐야 했다. 그들이 광산에 머물러있다면 ‘숙원’을 해소할 터이고 이미 떠났다면 다음 일정을 진행하면 그만이었다.
적들의 전력은 두렵지 않았다. 도왕이 내 편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최악의 경우 그가 내 말을 믿지 않고 마왕을 거들더라도 빠져나올 자신이 있었다. 열흘 간 궁구에 든 동안 나는 도경산의 격전에서 입었던 내-외상을 완치한 상태였다. 원력도 유의미하게 증가했다. 더욱이 무학에도 성취가 있지 않았던가.
지금의 나는 검왕을 제외하면 천하의 누구와 붙어도 밀리지 않을 터였다. 물론 여전히 공력 면에서 사왕이나 마왕에 비해 딸리지만 그들을 능가하는 승부감각과 실전적 강미로 그 방면의 열세를 만회할 수 있을 터였다.
마음을 굳힌 나는 마충에게 만유산까지 가는 길을 물었다. 마충이 눈을 빛냈다.
“과연 홀로 사마와 맞서 싸운 전왕답구려. 그자들이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가려고 하다니. 참으로 탄복했소.”
무모하다고 말릴 줄 알았던 나는 그의 찬사에 멋쩍었다.
“청컨대 내가 전왕을 안내하게 해 주오. 소싯적에 표사로서 대륙을 누빈 탓에 누구 못지않게 지리에 밝다오. 사십 년 전이지만 만유산 근처까지 가 본 적도 있소.”
나는 마충을 만류했다.
“아시다시피 저의 적들은 막강합니다. 말씀은 고마우나 마 대협께서 저를 도우셨다가 나중에 발각되면 어떤 변을 당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니 길만 알려주십시오. 혼자서 찾아갈 수 있습니다.”
“각오하고 있소. 부탁이오, 전왕. 힘이 부족하여 ‘그자들’에 맞서 같이 싸울 수는 없을지라도 이 정도는 해주고 싶소. 나는 전왕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오. 실은 전왕이 마웅이었던 시절부터 응원했다오. 그러면서 뭔가 보탬이 될 수 없을까 고민했소. 그러니 전왕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줄 기회를 허락해 주구려.”
“알겠습니다. 기꺼이 신세를 지겠습니다.”
“고맙소, 전왕.”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고맙습니다.”
이로써 나는 새로운 친인을 얻었다. 아주 마음에 드는 이였다.
* * *
마충은 내 경신 속도에 충격을 받았으나 곧 적응하고는 열심히 나아갈 방향을 지시했다. 그는 훌륭한 길잡이였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지형에 익숙지 않을 터임에도 내 속도에 맞춰 적절한 시기에 정확한 지표를 일러주었다. 덕분에 나는 거의 직선 경로로 경유지인 조양까지 날아갈 수 있었다.
반 시진 후 마충이 수백 장 전면에 보이는 도시가 조양임을 알려주었을 때 나는 지상으로 하강했다. 그러고는 그를 내려주었다.
“만유산은 아직 서쪽으로 칠팔십 리는 더 가야 하오만.”
“지리를 알려주시면 제가 알아서 찾아가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끝까지 모시게 해 주오. 방해는 되지 않겠소.”
나는 마충이 무엇을 욕심내는지를 알았다.
“좋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근처에 오시면 안 됩니다.”
“알겠소. 명심하겠소.”
나는 다시 마충을 안아들고 비상했다. 그리고 마충의 검지가 가리키는 곳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이름과는 반대로 만유산은 바위투성이 민둥산이었다. 정상의 높이는 대략 삼사백 장쯤 되어보였다. 산의 초입에 마충을 떨군 나는 수직으로 깎아지른 절벽을 올랐다. 광산은 산 뒤편에 있다고 했다.
단애 위에 오른 나는 내기를 갈무리하고 산허리를 따라 이동했다. 동천에서 날아온 여명이 울퉁불퉁 솟은 암석들에 길쭉하고 기괴한 그림자를 선사했다. 얼마간 전진하던 나는 멀지 않은 곳에서 일렁이는 묵직한 기운들을 포착했다. 전날 무왕의 처소에 잠입할 때처럼 내기를 완전히 지우고서 천천히 나아갔다. 산모퉁이를 돌자 금광의 입구가 보였다. 마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을 크기였다.
나는 기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입구 너머에 도사린 이들은 두 명이었다. 마왕과 도왕임에 틀림없었다. 전자는 내 신경을 자극하는 마기를 발산하고 있었고 후자는 사기(邪氣)가 감지되지 않았다.
나는 사왕의 소재가 궁금했다. 기감에 걸리지 않을 만큼 안쪽 깊숙한 곳에 들어있을까. 아니면 검왕처럼 진즉 이곳을 떠났을까. 후자일 듯싶었지만 장담할 수는 없었다. 조금 더 내부를 탐지한 나는 결정을 내리고 입구로 쇄도했다.
입구 내부는 비처 지하광장의 축소판 같았다.
상하와 사방이 모조리 암벽이었고 군데군데 갱도일 듯한 구멍들이 뚫려있었다. 오륙백 평 정도의 석굴 안에 도왕과 마왕이 마치 대치라도 하듯 십여 장의 거리를 격하고 마주보며 서있었다. 내 도래를 알아챈 그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나는 마왕이 급전에 나서기 전에 선수를 쳤다.
“손가락을 잃은 어르신의 시동은 무왕 어르신이 구했습니다.”
내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마왕과 도왕의 반응은 대조적이었다. 마왕의 안색은 파랗게 질린 반면 도왕의 낯빛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도왕은 내가 건넨 낭보에 응답하지 않고 마왕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서 내가 전한 소식의 진위를 확인하려는 모양이었다.
도왕의 시선을 외면하고 마왕이 이를 갈았다.
“그 비열한 작자 짓이군. 저번처럼 이번에도 그 쥐새끼가 누설했을 테지? 가증스러운 놈 같으니. 기필코 천참만륙할 테다.”
마왕이 의심하고 증오하는 쥐새끼가 누군지는 불문가지였다. 사왕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사왕의 입장에서 적어도 두 번째 혐의는 억울할 터이지만 나는 그를 위해 변호할 생각은 쥐새끼 코털만큼도 없었다.
“당신한텐 그럴 기회가 없을 거야. 오늘 여기서 뒈질 테니까. 하지만 너무 아쉬워하지는 마. 내가 그 겁쟁이를 당신이 원하는 꼴로 만들어주지.”
철봉과 옥소를 꺼내든 나는 도왕에게 부탁했다.
“저는 저자에게 받아야 할 빚이 있습니다. 제가 처리하도록 해 주십시오.”
도왕이 응낙 여부를 밝히기도 전에 마왕이 쇠사슬을 휘두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나도 그에게 돌진하며 복수전에 돌입했다.
마왕은 초장부터 초강수로 나왔다. 방어를 도외시하고 공격에 전력을 쏟은 것이었다. 자기 팔을 떼 줄 테니 내 목을 내놓으라는 태세였다.
나는 회피하지 않고 맞불을 놓았다.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마왕은 나와 생사투를 벌일 생각이 없었다. 내가 동귀어진의 승부수에 기가 꺾여 비켜서면 입구로 달아나겠다는 심산이었다.
쾅!
전력과 전력으로 부딪친 우리는 공히 내상을 입었다. 하지만 약간이나마 내가 밀렸다. 정면충돌은 아무래도 공력의 차이가 크게 작용하는 탓이었다. 그러나 최초의 격돌 후 주도권을 잡은 쪽은 나였다. 나는 내상으로 인한 토혈을 억제하며 마왕에게 달라붙었다. 기다란 쇠사슬을 병기로 쓰는 그와의 싸움엔 거리가 중요했다. 내 입장에서는 일 장 이내의 근접전이거나 아예 삼사 장 이상의 원거리에서 공방전을 벌이는 게 유리했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기에 마왕은 내 육박을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그러나 나는 방금 전 그가 구사한 수법, 즉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수법을 차용함으로써 그의 쇠사슬 안쪽으로 파고드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왼팔에 부상을 입었지만 철봉을 부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상대의 노림수를 분쇄하고 기세를 탄 나는 사납게 마왕을 몰아붙였다. 마왕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팽팽하게 유지되던 국면은 불과 십여 초 만에 내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나는 격세지감을 느꼈다.
십 개월 전 비처에서 마왕과 조우했을 때 나는 그의 삼초지적도 되지 못했다. 삼초는커녕 일초도 받아내기 어려웠다. 한 달 보름 전 마련에서 격돌했을 때는 신법 위주로 대응한 덕분에 오십 초 가까이 버텼으나 정면으로 부딪치자마자 중상을 입고 도주해야만 했다.
열이틀 전 도경선에서 치렀던 혈전에서도 큰 차이는 아니지만 확연한 내 열세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를 압도하고 있었다. 이는 그새 내 무력이 증강된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마왕의 비전상적인 심신 상태에 힘입은 바가 컸다. 마왕은 전날 도경산에서 당한 좌견과 좌수의 부상이 완전히 낫지 않았음에 분명했다. 초장에 이를 알아차린 나는 그 약점을 집요하게 공략했다. 그러고는 십 초 만에 마왕의 방어벽을 허물었다.
결전에 임하는 마왕의 마음가짐도 그의 열세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치열한 접전의 와중에도 그는 호시탐탐 도주할 기회를 엿보았다. 결사항전해도 모자랄 판에 그런 나약한 바람을 품고 있으니 본연의 무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마왕의 심리를 역이용한 나는 덫을 놓았다. 그는 내가 일부러 열어준 퇴로로 미친 듯이 내달았다. 그런 그의 하반신에 광참을 작렬시킴으로써 나는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다.
우족이 떨어져나가고 왼 다리도 반 이상 잘린 마왕이 최후의 발악을 했다. 그의 공력을 담은 쇠사슬이 수천 개의 파편으로 화하며 나를 덮쳤다. 나는 이곳에 오기 직전에 얻었던 깨달음을 실전에서 초현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기에 완벽히 피해내지는 못했으나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옥소로 광환을 쏘아 마왕의 단전을 깨뜨린 나는 철봉을 치켜들었다.
“방금 전은 이모와 나를 위한 것이었고 이건 내 스승을 위한 거다.”
철봉에서 날아간 빛줄기가 마왕의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몸통에서 떨어진 그의 머리통이 바닥에 뒹굴었다. 그 순간 내 등짝도 반으로 쪼개졌다. 나를 양단한 것은 도왕의 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