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79
제178화 결국 하나마나한 소리가 아닌가?
나는 나현이 ‘그자’가 독의를 지칭한다고 오해했음을 깨달았다.
“사왕 말입니다.”
“아!”
무의식적인 탄성과 민망한 웃음으로 상황을 얼버무린 나현이 한 박자 늦게 내 질문에 답했다.
“유감스럽게도 사왕의 행적에 관해서는 일절 알아낸 바가 없소. 독의가 그의 은신처를 알려준 후 원산 근역은 물론이고 도경산까지의 경로 전체를 주시했으나 그는 한 번도 감시망에 포착되지 않았소. 그러니 사왕이 원산으로 돌아갔는지 아니면 다른 은신처로 향했는지 알 길이 없구려. 도움이 못 돼 미안하오, 전왕.”
“아닙니다, 대인. 그자가 작심하고 은밀히 이동했다면 잡아낼 방도가 없을 테지요. 그런데 어떻게 보십니까? 그자가 도로 원산에 갔을 것 같습니까?”
“글쎄요. 단서가 없으니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구려.”
“그렇더라도 대인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꼭 그렇다면 틀릴 수 있음을 전제로 말씀 드리겠소. 내가 보기엔 다른 곳으로 갔을 듯싶소만. 전왕이 그들의 집결지인 도경산에 나타났다는 것은 어디선가 정보가 샜다는 반증이 아니겠소? 사왕은 필히 원산에 두고 온 자신의 수하들을 의심했을 게요. 그러니 다시 원산에 드는 걸 꺼리지 않았을까 싶구려. 자신의 안위를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성정이니 말이오.”
충분히 설득력 있는 추론이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달랐다.
사왕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기밀 누설의 출처가 꼭 자기 수하들이란 법은 없었다. 그보다는 도왕이나 검왕 쪽에서 나갔다고 보지 않았을까. 도왕은 원래 한통속이 되기 어려운 족속이고 검왕은 비밀 엄수의 중요성을 모를 위인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현의 말마따나 제 보신을 극도로 중시하는 사왕이 무턱대고 원산에 돌아갔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는 근처 어딘가에 잠복하고서 추이를 살피지 않았을까. 그러다 만약 내가 원산으로 쳐들어가면 그대로 숨어 있다가 나중에 내뺄 터이고 시일이 지나도 아무 일 없으면 안심하고 그리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문제는 기간이었다. 얼마나 지나야 사왕은 원산이 안전한 피신처라 확신할까. 닷새? 열흘? 아니면 한 달?
그에게나 나에게나 닷새는 너무 짧고 한 달은 너무 길었다. 열흘쯤이면 적당하지 않을까. 사치와 안락에 길들여진 그가 그 이상 두더지 노릇을 할 성싶지는 않았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바람 섞인 추측에 불과했다. 적중 여부는 직접 확인하는 길밖에 없었다.
마음을 굳힌 나는 나현에게 원산으로 가는 경로와 그 주변의 지리를 물었다.
“그리로 찾아갈 작정이오?”
“그렇습니다. 헛걸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가봐야 할 듯싶습니다. 그자가 거기에 없더라도 혹시 단서가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알겠소.”
나현이 혈접에게 지도를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그녀는 미음도 일으키지 않고 나비처럼 사뿐히 걸음을 옮겼다. 문으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일별한 나는 나현에게 낭왕과 마충의 시신을 수습해줄 것을 부탁했다.
마충의 사망에 관한 전후사정을 들은 나현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잖아도 전왕이 의주 소연표국에서 만유산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기에 마 국주에 관해 물어보려던 참이었소. 초절정의 무인인지라 나와는 격이 다르나 같은 상운의 대문통이었던 덕분에 여러 차례 교분을 가졌던 사이라오. 강퍅하고 사나운 인상과는 정반대인 후덕한 성품과 정의로운 인품에 반해 깊이 흠모하던 이였소. 그런데 그런 참극을 겪다니.”
마충의 호랑이 눈을 떠올린 나도 못내 비감스러웠다. 그런데 나현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근자에 곤경에 처했다고 들었는데 엉뚱한 곳에서 횡액을 당했구려.”
“무슨 말씀입니까?”
“모르셨소? 소연표국은 최근…….”
나는 이어지는 나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 * *
나는 혈접이 갖고 온 지도를 숙지한 후 그녀가 건네준 흑의무복으로 갈아입고 나현과 작별을 고했다. 그러고는 비로 입구까지 배웅 나온 그들에게 다음 방문 때는 당당하게 대문으로 들어올 것을 기약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간파하지 못했는지 혈접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나현은 감격한 표정으로써 내 결의에 화답했다.
비로를 통해 우한을 벗어난 나는 북상했다. 목적지인 원산까지는 직선거리로 일천사백 리 길이었다. 최고속도를 유지하며 쉼 없이 비행할 시 한 시진 반이면 도달할 수 있었으나 원산을 품은 구야(九野)에 이르는 데는 나흘이나 걸렸다.
이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나는 아직 사왕과 결전을 치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아무리 정신 상태에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더라도 사왕은 절대지경의 무존이었다. 그의 일장은 스치기만 해도 중상을 야기할 위력을 담고 있었다. 그러니 완벽하게 회복한 연후에 그를 상대해야 했다. 하여 나는 해가 뜬 동안에는 운공에 전력했다.
둘째, 나는 사왕이 원산만이 아니라 그곳을 중심으로 팔방에 경계망을 깔았을 거라 예상했다. 실제로 원산이 가까워짐에 따라 도처에서 그에게서 그런 임무를 받았으리라 추정되는 자들을 보았다. 쉬이 눈에 띄지 않는 방호에 든 그들은 바짝 기합이 든 눈으로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내 그림자라도 발견할 시엔 북이든 징이든 마구 두드려댈 게 틀림없었다. 그러면 사왕은 내가 도래했으리라 간주하고는 무작정 도주할 터였다. 그렇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기에 야음을 틈타 은밀히 이동해야 했다.
그런 연유로 나는 나현의 장원을 나선지 나흘 후에야 광활한 평야에 이르렀다. 그때쯤엔 거의 십 할의 무력을 되찾은 상태였다.
안력을 돋우었다.
면적이 일백만 평이 넘는다는 평원 한 가운데 망망대해의 고도(孤島)처럼 정삼각형 모양의 산이 홀로 솟아있었다. 원산이었다.
나는 원산까지의 거리를 가늠했다. 대략 십 리 안팎일 듯싶었다. 가속을 발한다면 반의반 각도 걸리지 않고 당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벌판 곳곳에 수많은 눈들이 도사리고 있을 게 빤하기에 경신을 전개하자마자 필히 요란한 경호성이 울려 퍼질 터였다. 사왕의 경신공은 나와 별 차이가 없으니 그리 되면 사냥은 시작과 동시에 실패로 돌아갈 공산이 컸다. 어떻게든 성공 확률을 높일 방법을 찾아야 했다.
고민 끝에 가장 기본적인 수단, 즉 잠입을 택했다. 천공을 가로지르고 싶었으나 밤하늘이 너무 밝았기에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최대한 들키지 않고 원산에 접근한 후 발각된 시점부터는 전속력으로 날아 내 진로의 반대편으로 달아날 사왕을 추격할 참이었다. 사왕과의 거리가 삼십 장 안쪽이라면 해 볼만 했다.
그가 원산에 들어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염려는 없었다. 감시망의 수준으로 보건대 그럴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다만 원산 내부에 비밀통로가 있을 가능성은 상당했다. 그럴 경우 사왕 사냥은 물 건너 간 것이라 보아야 했다.
일찌감치 침투 방식을 결정했지만 새벽녘까지 기다렸다. 한밤중에는 들판을 주시하는 자들의 신경이 최고조로 곤두서 있을 터였다. 나는 여명이 터 올 무렵 철야 근무에 지친 그들이 방심할 것을 기대했다.
이윽고 어슴푸레한 빛이 어둠을 조금씩 밀어냈다. 나는 바닥에 엎드려 악어처럼 사지를 번갈아 움직여가며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그러나 반각도 지나지 않아 멈춰야 했다. 이삼십 장 전면에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아른거렸다. 내기를 갈무리한 기색으로 보아 절정 이상의 무인일 터였다. 구야 외곽에 배치되었던 자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나는 방향을 옆으로 옮겼다. 그러고는 다시 기어갔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전진을 중단했다. 또 다른 기운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최초로 탐지한 자와 이번에 찾은 자 사이의 간격은 고작 오십여 장에 불과했다. 들판의 넓이를 감안할 때 이런 식으로 경계망을 깔아두려면 적어도 일백 명은 필요할 터였다. 일차 경비선 너머에도 동심원 형태의 감시망이 여러 개 있을 터이니 사왕은 사벌에서 데리고 간 고수들을 모조리 경비견으로 투입한 셈이었다.
사왕의 처사는 실로 황당했지만 적어도 그의 안위에 관한 한 제법 효과적인 방책임은 부인할 수 없었다. 유령이 아닌 한 그가 펼쳐놓은 그물에 걸리지 않고 빠져나가기는 불가능했다.
초장부터 벽에 부딪친 나는 문득 검왕을 떠올렸다. 이형환위의 궁극이라 할 그의 순간이동이라면 이 촘촘한 그물을 통과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아무리 그 비학이라고 해도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내 자문의 근원은 호기심이 아니라 욕망이었다. 나는 검왕의 비기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미 검황자에게서 그 수법을 견식한 후 그를 바탕으로 궁구를 거듭한 끝에 가속의 원리를 찾아냈지만 뭔가 부족했다. 검왕이 구현했던 초절한 신법을 재현하려면 그 이상의 깨달음이 필요했다. 대체 그게 뭘까.
일순 짙은 안개 속에서 희미한 빛이 명멸했다.
나는 엎드려있던 자세를 뒤집어 아직도 별들이 총총히 박혀있는 천공을 보며 대자로 드러누웠다. 어차피 원산으로의 은밀한 접근은 무산된 것이나 진배없으니 깨달음의 신호가 왔을 때 실마리를 잡을 심산이었다. 그러나 궁구에 든 지 일다경도 지나지 않아 방해를 받았다.
요란한 호각성이 새벽의 고요를 깨뜨리며 내 고막을 두드렸다. 때 이르게 빛줄기를 보았던 차였기에 분통이 터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위로 튀어 오른 나는 원산을 향해 날았다. 호각소리가 나보다 훨씬 빨랐기에 산정 상공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난리가 난 후였다. 나는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상황을 살폈다.
원산으로 비행하면서 주시했던 바, 사왕으로 짐작되는 인영이 내 진로의 반대편으로 달아나는 기미는 포착되지 않았다.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데다 거리가 워낙 멀어 내가 놓쳤을 수도 있지만 그랬을 성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사왕이 원산에 머물러있거나 아니면 비상탈출로로 빠져나갔거나.
사왕의 성향으로 보건대 전자일 가능성은 희박했다. 후자라면 사왕 사냥은 물 건너 간 셈이었다.
원산에서 빠져나간 수백 개의 그림자가 방사형으로 퍼졌다. 경신의 수준으로 보아 초절정의 고수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잔챙이들을 잡을 의욕은 거북이 코털만큼도 없었지만 그냥 포기하기엔 너무 아쉬운지라 나는 그들 중 제법 경공이 뛰어난 자를 붙잡았다. 날카로운 눈매의 칠십대 노인이었다.
도주하는 무리의 선두에서 달리다 내게 덜미를 낚인 노인은 대경실색했다. 나는 까무러치기 일보직전인 그에게 활로를 터 주었다.
“묻는 말에 정직하게 대답한다면 살려주마.”
공포에 젖어있던 노인의 누런 동공에 희망의 빛이 일렁였다.
“하문만 하십시오, 전왕. 제가 아는 거라면 뭐든지 말씀드리겠사옵니다.”
“사왕은 어디에 있나?”
노인의 눈이 다시 절망으로 물들었다.
“모, 모르옵니다.”
쓸모가 없으면 저승 행이 확실시된다고 여겼는지 묻지도 않았는데 노인이 중요한 정보를 쏟아냈다.
“이레 전까지만 해도 현화원(玄華院)에 있었지만 마왕이 전왕께 목이 잘렸다는 급보를 받자마자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저희에게도 말을 하지 않은 걸로 보아 비처에 들었을 게 틀림없습니다.”
“비처가 어딘데?”
“그, 그건……, 벌주밖에 알지 못하옵니다.”
“결국 하나마나한 소리가 아닌가?”
내가 불문곡직 목을 꺾어버릴 거라 지레짐작한 듯 노인이 부르짖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전왕. 벌주가 어디에 숨었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일 터입니다. 어쩌면 이 구야 어딘가에 있을 지도 모릅니다.”
나는 노인에게 추론의 근거를 캐묻기 전에 그의 정체부터 확인했다.
“너는 누구냐?”
노인이 쭈뼛거렸다.
“말 안 해? 거짓말이면 죽여 버린다.”
“저, 저는 야락당(夜樂堂)의 모방일이라 하옵니다. 강호 동도들은 저를 흑산응이라고 부르옵니다.”
기분이 묘했다. 목전의 노인은 사왕(四王)의 집결지가 도경산임을 독의에게 알려 형세 대역전의 전기를 마련해준 당사자였다. 악인일 가능성이 농후했지만 공적을 감안해 나는 그를 놔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