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8
제17화 안 될 건 뭐 있소?
광객(狂客) 장태산(張太山).
중원육기에 속한 초절정 극상의 고수이자 역시 중원육기의 일인인 독의(毒醫) 오중(吳中)과 더불어 강호의 기피대상 일이 위를 다투는 괴걸이었다.
흑발에 주름이 깊지 않아 얼핏 오십대 중후반의 중년인처럼 보이지만 광객은 칠십 줄에 접어든 노인이었다. 쉰 살 언저리까지 무명소졸이나 다름없던 광객이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무명(武名)을 얻게 된 것은 그 유명한 광양(光陽) 성가(成家)와의 전면대립을 통해서였다.
광객이 오대세가의 일원인 성가와 각을 세우게 된 계기는 어이가 없으리만치 사소한 것이었다. 성가 방계의 후기지수 중 하나가 우연히 그와 시비가 붙은 게 발단이었다.
경치가 수려해 상춘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고양호의 한 정자에서 광객과 조우한 성가 후기지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광객을 낙향문사로 착각하고는 그에게 난해한 문장의 해독을 종용한 것이었다. 동반했던 기루의 미희들에게 제 학식을 뽐내기 위해 벌인 유치한 수작이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광객이 우물쭈물하자 신이 난 후기지수는 자랑스레 답을 늘어놓았다. 거기서 그쳤으면 일이 그렇게 커지지 않았을 지도 모르지만 성가의 얼간이는 광객의 무식을 조롱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부끄러움을 알면 앞으로는 두 발로 걸어 다니지 말고 무릎을 땅에 붙이고 기어 다니라고 호통 쳤다.
분기가 솟구친 광객이 내기를 일으키자 그제야 그가 대적불가의 고수임을 인지한 후기지수는 다급히 자신이 광양 성가의 후예임을 밝혔다. 그러고는 자기를 건드리면 삼족지멸의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그가 내민 비장의 패는 역효과만 초래했을 뿐이었다.
후기지수에게 달려든 광객은 가차 없이 그의 우족(右足)을 부러뜨렸다. 그가 일백 배의 복수 운운하며 악다구니를 쓰자 이번에는 남은 왼다리도 인정사정없이 꺾어버렸다. 그러고는 한 마디만 더 내뱉으면 다음 부위는 목이 될 거라고 경고했다. 성가의 후기지수는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성가의 얼간이는 자신이 자초한 횡액을 액땜으로 여기고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의 하소연을 들은 성가는 그들의 가문을 무시한 무도한 자를 징치해 본보기로 삼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다섯 명의 도객이 광객을 잡기 위해 나섰다. 절정 상(上)의 고수였던 무월도(霧月刀) 성민(成旻)이 그들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 출정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후기지수가 당한 그대로 광객에게 되갚아주려던 도객들은 되레 그에게 잡혀 손목들이 꺾이고 말았다. 후기지수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이어진 광객의 함구령에 복종했다. 광객이 협박의 대상으로 목을 걸었기에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굴복이었다.
그 일로 성가가 발칵 뒤집힌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제는 가문 전체의 명예가 걸린 사안이 되었기에 성가는 초강력 조치를 취했다. 초절정의 도호(刀豪)가 둘이나 포함된 체포대를 꾸린 것이었다. 그들은 광객을 잡아서 광양으로 끌고 와 중인환시리에 효수할 참이었다.
놀랍게도 광객은 도주하지 않고 최초의 사달이 일어났던 고양호변의 정자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그리고 항복을 거부하고 그들과 맞서 싸웠다.
십일 대(對) 일의 격전의 결과는 강호를 충격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당시 각각 성가 무력 서열 삼사 위였던 성준(成俊)과 성운(成雲)이 전력을 다하고도 광객에게 사지가 부러지는 수모를 당한 것이었다.
변방의 무명(無名) 무인에게 참패를 당한 성가는 총력전에 나서야 했다. 금분세수하고 일선에서 물러난 전대의 원로들까지 동원한 성가의 최정예군은 가주인 성찬(成燦)을 앞세워 고양호로 향했다. 팔 인에 불과했지만 당시 천하제일인의 권좌를 두고 다투던 혼세십삼군의 일인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막강한 전력이었다. 그럼에도 성가는 광객을 응징하지 못했다. 뜻밖의 변수가 발생한 탓이었다.
* * *
광객이 나와 괴선에게로 걸어왔다. 그리고 우리 십 보 앞에서 멈췄다.
“오랜만이오, 괴선. 먼저 와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나보다 일찍 왔구려. 그런데 그 듬직한 젊은이는 누구요?”
나에게 시선을 옮기며 광객이 물었다. 후덕한 인상에 어울리는 점잖은 음성이었다. 나는 괴선이 답을 주기 전에 광객에게 포권을 취하며 예를 차렸다.
“저는 전충이라고 합니다, 어르신.”
괴선이 버럭 화를 냈다.
“이런 괘씸한 놈. 어째서 저치에겐 공대를 하는 게냐? 내가 저치보다 아홉 살이나 많은데.”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곱지 않겠소. 노인장은 첫 대면부터 나를 이놈, 저놈이라고 칭하지 않았소? 노인장 같으면 노인장에게 말끝마다 ‘놈, 놈’하는 이에게 공손하게 굴고 싶겠소?”
“그게 핑계가 되냐, 이놈아?”
“안 될 건 뭐 있소?”
내가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되받자 부아가 치민 괴선이 분기를 터뜨리려는 찰나 광객이 끼어들었다.
“내가 참견할 바는 아니오나 듣자하니 그 젊은이 말에 일리가 있구려.”
괴선이 대뜸 나를 광객 쪽으로 떠밀었다.
“죽이 착착 맞는구나들. 좋다. 한통속이 되었으니 한꺼번에 덤벼라. 다 상대해주마.”
나는 신장 차이로 인해 내 등이 아니라 둔부를 미는 괴선의 손을 떨쳐냈다.
“웬 허세요, 노인장? 방금 전까지 동태처럼 바짝 굳어서는…….”
“무슨 헛소리냐, 이놈. 내가 언제 그랬다고. 안 되겠다. 비켜서라, 이놈. 당장 저치를 처치하고 네놈에게 본때를 보여주마.”
나는 괴선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광객을 상대했다.
“여기 이 노인장이 어르신과의 비무를 봐 달라고 청해서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허락하신다면 두 분의…….”
괴선의 호통이 내 말을 끊었다.
“야, 이놈아! 고 삐뚤어진 입술로 시뻘건 거짓말을 일삼다간 주둥이가 뭉개지는 수가 있어. 네놈이 하도 졸라대서 미운 놈 떡 하나 주자는 심정으로 아량을 베풀었더니…….”
“아, 됐소. 일부러 그러는 거요, 아니면 정말로 까맣게 잊은 거요? 분명 노인장이 먼저…….”
“먼저고 나발이고 나는 네놈한테…….”
광객이 나와 괴선의 입씨름을 중단시켰다.
“경위야 어찌 되었건 이왕 이렇게 왔으니 그 젊은이더러 우리의 승부를 지켜보도록 하고 판정까지 맡기는 게 어떻겠소?”
괴선이 발끈했다.
“판정이라니? 그게 왜 필요한가? 누가 보아도 확연하게 승패가 갈릴 텐데. 자네는 잠시 후 거기에 뻗어있을 거고 나는 지금처럼 멀쩡히 서 있을 거란 말이지.”
광객은 괴선의 도발을 덤덤히 받았다.
“준비를 많이 한 모양이구려. 기대가 크오. 부족한 실력이나마 괴선을 실망스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소.”
광객의 정중한 언사에 약이 오른 괴선이 그의 조문을 건드렸다.
“그쯤하게, 태산. 그렇게 기품 있는 척하면 할수록 오히려 천박해 보인다는 걸 모르는가? 그건 백정의 후손이자 일자무식인 자네가 학식 깊은 문사인 양 굴어 만인의 비웃음을 자초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돌연 광객의 입에서 백만 근의 화약이 폭발한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닥쳐라! 대가리를 부숴버릴 테다, 오지랖장이.”
괴선이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 헉!”
말을 하다 말고 경악성을 토해낸 괴선이 그에게 날아드는 폭풍에 맞서 부랴부랴 화염을 발출했다.
급작스럽게 시작된 대결에 당황하지 않고 나는 잽싸게 전권에서 떨어졌다. 광객과 괴선이 발한 가공스러운 경기가 내가 남긴 잔영을 휩쓸고 지나갔다.
나는 오금이 저렸다. 조금만 늦게 피했다면 불덩이가 되거나 전신이 갈가리 찢어졌을 터였다. 그만큼 두 노장이 일으킨 불벼락과 태풍은 강력하고 살벌했다.
탐색전은 필요 없다는 듯 양인은 초장부터 쌍방 강공일변도로 치받았다. 수강(手剛)을 두른 광객은 괴선이 숨 돌릴 틈을 주지 않고 맹폭을 가했다. 완급을 조절해가며 공방의 묘를 발휘할 만도 하건만 양보가 곧 패배이기라도 하듯 괴선 또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장공을 퍼부었다.
나는 두 강호의 격전을 넋 놓고 감상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지만 기대했던 바를 훌쩍 뛰어넘는 성찬이었다. 양인 모두 초절정 극상의 무위에 걸맞은 파괴력과 심오함을 한껏 과시하고 있었다.
형세는 그야말로 백중지세였다. 순식간에 삼사십 초를 교환했지만 어느 쪽도 주도권을 쥐지 못했다. 둘의 무력은 신기하리만치 비등했다. 마치 완벽하게 동일한 힘을 지닌 쌍둥이가 싸우는 것 같았다.
초수가 늘어남에 따라 공터를 둘러싼 절벽을 몸서리치게 만들던 장공과 수공의 위력이 차츰 줄어들었다. 아무리 심후한 공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시작부터 십이 성의 내공을 쏟아 부었으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화염과 수강의 위력은 서서히 경감되었지만 대결의 흉험함은 갈수록 증폭되었다. 양인 모두 이득은 보지 못한 채 내상만 입었고 그 내상이 점점 깊어져갔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시종여일 정면충돌을 고집했다.
나는 갈등했다.
이대로 가다간 파국이 확실시되었다. 괴선과 광객은 끝까지 우열을 가리려 할 것이 틀림없었다. 무력이 기가 막힐 정도로 비등한데다 둘 다 지느니 죽는 게 낫겠다는 태세인지라 결국엔 양패구상을 넘어 동귀어진으로 치달을 터였다.
“제길.”
나는 욕설을 내뱉었다. 남의 사정으로 치부하면 그만이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짐짓 티격태격하긴 했지만 괴선은 강호에 나와 최초로 맺은 선연이자 유일하게 ‘등을 맡길 수 있는 이’로 판단한 인물이었다. 진소월에게도 아꼈던 내밀한 개인사까지 들려준 이유였다.
광객도 외면하기 어려웠다. 이상하게도 그에게 마음이 끌렸다. 그가 우호적으로 대해주어서가 아니라 호기심을 유발하는 성정 때문이었다.
내가 보기에 광객은 열등감 덩어리였다. 유치한 놀림에 눈이 뒤집힌다는 것은 그의 자존감이 발바닥만큼이나 낮다는 방증이었다. 무림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상을 생각하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광객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다. 그러려면 그가 살아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와 괴선을 살리려면 내 목숨을 걸어야 했기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상대로 국면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호신강기까지 거두어들이고 모든 공력을 공격에 쏟아 부었기에 괴선과 광객은 낭떠러지를 걷는 취객들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누구라도 상대의 장공이나 수공을 동체에 허용하는 날엔 지옥으로 곤두박질 할 터였다. 내가 보기엔 십 초 이내에 둘의 죽음으로 종국을 맞이할 가능성이 십 할이었다.
나는 이해난망이었다.
괴선과 광객 모두 죽기 살기로 싸웠지만 어느 쪽도 상대를 끝장내고자 하는 살기를 발산하지는 않았다. 상대에 대한 원한이 그들의 동력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서로가 불구대천의 원수인 양 타협의 여지없이 싸우고 있었다.
고심하던 나는 결단을 내렸다.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염왕의 사자가 두 노인의 목덜미를 낚아채기 전에 그들을 갈라놓아야 했다. 옥소와 철봉을 양손에 거머쥔 나는 모친이 남겨준 원력을 끌어올렸다. 최대치였다.
내 심장이 폭발할 듯했다. 이를 악 문 나는 극상의 섬을 발해 정신 나간 초인들이 사투를 벌이는 전장으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