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80
제179화 그냥 뒈져라, 늙은이
나는 원산 주변을 저공으로 비행하며 최고조로 끌어올린 기감으로써 땅 아래를 훑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비처가 지하 수십 장 아래에 위치해있다면 사왕을 찾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설령 깊이가 오륙 장 정도에 불과하더라도 그가 내기를 철저히 갈무리하고 있으면 역시 탐지하기 어려울 터였다.
그러나 나는 끈질기게 수색을 계속했다. 사왕의 비처가 원산에서 멀지 않을 거라는 흑산응의 주장엔 신빙성이 상당했다. 그에 따르면 도경산에서 귀환한 직후에도 사왕은 거처인 현화원을 나갔다가 닷새 후에야 돌아왔다고 했다. 그러다 마왕의 참사를 듣고는 다시 잠적했다는 것이었다.
기실 나는 처음부터 사왕이 원산 근처에 은신처를 두고 내 도래에 대비할 거라 추측했다. 이를테면 제일감이었다. 그러다 과다할 정도로 촘촘하게 깔아놓은 경계망을 접하고는 예상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숨어있을 거라면 그렇게 요란을 떨 까닭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왕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마왕이 내게 목숨을 잃었음을 알게 된 순간 가뜩이나 작은 그의 간은 숫제 오그라들었을 터였다. 자고로 겁먹은 쥐새끼는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법이었다.
나는 원산을 중심으로 소용돌이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비행하며 서서히 평야 바깥쪽으로 이동했다.
저속으로 날았기에 삼분지일도 끝나지 않았는데 벌써 해가 중천에 올라가있었다. 이 속도라면 밤늦게야 수색이 완료될 듯싶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작업이었으나 집중력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어느덧 천공에 붉은 노을이 깔렸다. 피로도가 극에 달한 나는 내게 휴식을 허락했다. 남아있는 공간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지금까지처럼 해나간다면 족히 서너 시진은 더 소요될 터였다. 자정 어림에야 수색을 마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들판 외곽의 숲들을 보고 있노라니 헛수고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처가 허허벌판 아래에 있으리란 법이 없지 않은가. 그보다는 시야에 걸리지 않을 수림에 두는 게 훨씬 나을 터였다. 그리 하더라도 범인에겐 먼 거리지만 사왕 같은 절대고수에겐 원산에서 지척이나 다름없었다.
구야 외곽까지 수색범위를 넓히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대엿새는 잡아먹을 터였다. 나에겐 그만한 여유가 없었다. 늦어도 사흘 후 오전까지는 의주 소연표국에 가보아야 했다. 나현에게 일러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두긴 했으나 되도록 직접 처리하고 싶었다.
귀찮아서가 아니라 소용이 없을 거라 판단했기에 나는 비처 수색을 중단하기로 했다.
하지만 바로 들판을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런 자세를 취한 건 새벽에 하다말았던 궁구를 재개할 심산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더라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며칠을 보내면 곤란했기에 딱 하루만 몰입하기로 했다. 그래서 내내 눈을 뜨고 있을 작정이었다.
이윽고 해가 지고 대지엔 어둠의 장막이 내려왔다. 원산에 들어있던 사벌의 떨거지들이 모조리 도주했는지 멀리 삼각산에서는 한 점의 불빛도 일렁이지 않았다.
하나둘 떠오르던 별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야천을 가득 채웠다. 인간이 창조한 어떤 불야성도 비견할 수 없을 장관이었다. 그러나 나는 천공에 알알이 박힌 보석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검왕의 순간이동에 담긴 비결을 탐구하는 데 주력했다.
새벽에 나타났던 빛줄기는 완강하게 재림을 거부하다 한참 후에야 모습을 드러내었다. 실처럼 얇았던 광선이 차츰 두꺼워지더니 구체(球體)를 이루었다. 극히 드물게 보는 형태였다. 구체가 서서히 회전했다. 희한하게도 내 감각은 돌아가는 구체의 모든 면을 인지하고 있었다. 무언가 월척을 낚을 것 같은 느낌에 희열감이 올라온 순간 내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제길!”
내 몰아지경을 깨뜨린 것은 사소한 소음이었다. 뱀이 수풀을 지날 때 내는 미음이랄까. 하지만 그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실린 거북스러운 이질감이 내 신경을 건드렸다.
그것은 쥐구멍에서 고개를 내민 쥐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무심코 발한 소리였다. 비유를 거두고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비처를 나오다 사왕의 옷자락이 통로의 어느 부분에 스치는 소리였다.
물론 직접 본 것은 아니었다. 소리의 발원지는 내가 누운 곳으로부터 이십여 장이나 떨어져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사왕인지 아느냐고? 그냥 직감이었다. 따지지 마시라. 틀리지 않았으니까.
경칩 날의 개구리처럼 땅 속에서 톡 튀어나온 머리통이 사왕임을 인지한 나는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첫째, 언제 새날이 밝았는지 사위가 환했다. 잠시 궁구에 들었다고 여겼는데 하룻밤이 지난 것이었다. 어쩌면 이틀,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둘째, 사왕이 나온 지점은 내가 휴식을 취하기 직전에 공을 들여 조사한 곳이었다. 결국 비처가 깊었건, 사왕이 제대로 은신했건, 내 수색은 의미가 없었다는 뜻이었다.
결정적인 대목에서 집중력이 깨져 ‘월척’을 놓쳐버린 나보다 사왕의 불운이 백배는 컸다. 아니, 그의 입장에서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을 터였다. 설마 하고 구멍을 기어 나왔는데 나를 딱 마주칠 줄이야. 모르긴 몰라도 심장이 늑골을 가르고 터져 나올 지경이었을 터였다.
교묘하게 위장한 덮개를 연 사왕이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기음이 신경에 거슬린 내가 불현듯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찰나지간 서로의 눈을 마주본 우리는 여러 감정을 교환했다. 그가 내 눈빛에서 허탈함과 분노를 읽어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그의 안광이 경악, 현실부정, 두려움, 황망함 따위로 범벅이 되어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냈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이 이어졌다. 나를 보자마자 위로 솟구친 사왕은 그대로 달아났고 그를 본 순간 튕겨 오른 나는 바로 추격을 개시했다.
사왕은 도주에 능숙한 이가 아니었다.
직선행로는 달아나는 쪽에서 가급적 삼가야 할 선택지였다. 그것은 오직 속도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했을 때에만 채택할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사왕의 경신공은 나를 능가하지 못했다. 가속을 발할 시 극미하나마 내가 더 빨랐다. 시간이 충분히 흐르면 나에게 따라잡힐 거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나는 의외로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오히려 갈수록 그와의 간격이 점점 벌어졌다. 사왕이 혼신의 힘을 다해 도망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내 심리에 문제가 있었다.
나는 추격전의 와중 검왕의 순간이동을 구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하면 단숨에 사왕을 공격권 안에 두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비법을 체현하기 위해서는 머리를 쥐어짜야 했고 그것은 지체를 대가로 요구했다.
사왕이 사십 장 가까이 멀어지고서야 나는 욕심을 버렸다. 그러고는 사왕을 쫓는 데 전념했다.
* * *
반드시 잡아야 했다.
사왕이 불구대천의 원수라서가 아니었다. 그가 건재한 한 전력은 여전히 우리 쪽의 절대열세였다. 만약 사왕이 검총에 간 도왕과 합류한다면, 그리고 검왕을 포함한 삼왕(三王)이 곧장 명교 침공을 감행한다면 저지할 방도가 없었다.
반면 사왕을 제거하면 충분히 도검의 제왕들과 자웅을 겨룰 만했다. 비록 검왕이 나나 무왕보다 상위의 고수일지라도 우리 편엔 장왕이 있었다. 왼팔밖에 남지 않았으나 그가 장공으로 거든다면 나는 능히 검왕을 상대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실전 상황에서는 예측불가의 변수들이 발생할 테지만 어쨌거나 전력상으로는 꿀릴 게 없었다. 그리고 대등한 전력이라면 나는 천하의 어떤 세력에게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오늘 기필코 사왕을 염왕에게 보내야 했다. 사왕이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인 것만큼 나도 그를 처치하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짤 각오였다.
* * *
벌어졌던 거리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반 식경쯤 후 나는 추격전 초기의 손실을 만회했다. 뒤통수만 보였지만 나는 사왕의 면상이 일그러져 있으리라 확신했다. 필히 똥줄이 타는 심정일 터였다.
드디어 사왕의 십오륙 장 후방에 이른 나는 철봉을 꺼내들었다. 그러고는 광환을 잇달아 쏘아냈다. 아직 타격을 줄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으나 사왕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엔 충분할 것이었다.
철봉에서 발출된 빛줄기들이 공간을 가로질러 사왕에게 날아갔다. 호신강기를 두르고 있었음에도 사왕은 신법으로써 내 공격을 회피했다. 내가 기대한 대로였다. 그의 피신 방향을 예측해 미리 그리로 직행함으로써 단숨에 이삼 장을 번 나는 맹폭을 퍼부었다. 사왕은 맞불을 놓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달아나기에 급급했다.
그는 하다못해 내 접근을 견제할 반격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역시 추격전 방면에서는 나보다 한참 하수였다.
일각 이내에 그를 끝장낼 수 있으리라 보았지만 서둘지 않기로 했다. 궁지에 몰린 사왕이 최후의 발악을 할 시 너무 근접해 있으면 화를 당할 공산이 컸다. 어쨌거나 그는 객관적인 무위만 따지면 검왕 다음 가는 초(超)강자였다. 사파 무림의 지존답지 않은 심약한 성정 탓에 가진 바 무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으나 절대로 방심해서는 안 되는 위험인물이었다. 호신강기를 두르고 있어도 그의 일장을 정통으로 얻어맞으면 즉사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사왕의 칠팔 장 뒤까지 따라잡은 나는 그의 하체를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철봉과 옥소에서 빠져나간 빛줄기의 소나기가 다리를 두드리기 직전 사왕은 수직으로 비상했다. 그러나 위쪽엔 내 광참이 기다리고 있었다.
“헉!”
경악성을 내지른 사왕이 황급히 동체를 웅크렸다. 광참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머리칼을 훑고 지나갔다. 필살의 노림수가 무위로 돌아가 못내 아쉬웠으나 나는 후속타를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사왕은 내 광폭을 호신강기로 버텨냈다. 썩어도 준치라더니 과연 대단한 강자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더라도 폭발의 여파에 휩쓸린 사왕은 추락을 면치 못했다. 지상으로 곤두박질치는 그를 쫓으며 나는 전력을 실은 광우를 쏟아냈다. 이 일수로 사왕을 즉살하기는 어렵더라도 운신불능에 빠뜨릴 수는 있으리라 확신하며.
내 믿음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지상에 처박힌 사왕은 만신창이가 되어 널브러졌다. 이미 광폭에 균열이 갔던 그의 호신강기는 강탄의 폭우로부터 그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전신의 이곳저곳이 으깨진 사왕이 사정했다.
“제발 살려다오.”
나는 사왕을 노려보았다. 강적을 물리쳤다는 쾌감 따윈 한줌도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사왕의 승부수를 경계하고 조심했지만 어이가 없으리만치 시시한 결말에 까닭 모를 분기가 솟구쳤을 뿐이었다. 이런 겁쟁이가 수십 년이나 사파 무림의 지존 노릇을 하며 수백만 민중 위에 군림했다니.
“그냥 뒈져라, 늙은이.”
내가 천천히 다가가며 철봉을 치켜들자 사왕이 흙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다시 애원했다.
“제발 살려다오. 절대로 복수를 꿈꾸지 않으마. 못 믿겠다면 내 단전을 파괴하려무나. 두 팔을 다 잘라도 좋다. 살려만 주면 나만이 알고 있는 보고(寶庫)도 알려주마. 금은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인…….”
쉬익!
일순지간 뱀이 혓바닥을 놀리는 기음이 일었다. 미리 대비를 하고 있었기에 나는 어렵지 않게 사왕이 발한 무형장공을 빗겨냈다. 그러고는 광환으로 그의 목을 그었다. 생각 같아서는 머리통을 부수고 싶었지만 두부의 쓰임새를 고려해 자중했다.
톡.
동체에서 분리된 사왕의 머리가 가을날의 사과처럼 땅에 떨어졌다. 명줄이 끊어졌음에도 그의 부릅뜬 눈에 담긴 원망과 회한은 짙고도 생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