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82
제181화 이제 댁에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왠지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다.
내 또래거나 약간이라도 연배가 위인 줄 알았는데 열두 살이나 어린놈이었다니.
청년, 아니 소년은 내 속을 읽은 모양이었다.
“나는 나이를 속인 적이 없소. 당신의 오해는 내 잘못이 아니오.”
“누가 뭐라 그랬냐? 그런데 한창 팔팔할 나이에 이렇게 골골대다니, 어린놈이 여색을 과도하게 즐기다 정기라도 상한 게냐?”
“차라리 그랬으면 원이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오. 나는 아직 총각 딱지도 떼지 못했소. 내 병마는 여색이 아니라 사기(邪氣)에 지나치게 노출된 탓이라오.”
“뭔 소리냐?”
“더 보태고 뺄 것도 없이 말 그대로요. 적양장에게 반한 후 나는 사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체질이 되어버렸소. 그것이 나를 병들게 하고 요절을 불러올 것임을 알면서도 멀리할 수 없었소. 마치 도박에 중독된 이가 파산과 파국을 예감하면서도 마작과 주사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오.”
“똑똑한 척 으스대더니 제 앞가림도 못하는 종자였군. 그 정도의 절제력도 없다니.”
“부인하지 않겠소. 하지만 당신에게 그런 소릴 듣는 건 좀 황당하구려. 당신도 불타 죽을 걸 알면서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부류잖소? 당신이 화마(火魔)를 모면한 건 팔 할이 운수소관이었다고 생각하오만.”
“죽고 싶냐?”
소년이 호탕한 장한처럼 껄껄껄 웃었다.
“싸움에만 귀신이 아니라 농담도 잘 하는구려. 뭐, 그럴 것 같진 않지만 꼭 그러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소. 해보구려.”
소년의 맹랑한 부추김에 부아가 치밀었지만 나는 그의 목을 틀어쥐지 않고 참았다. 굳이 손을 더럽힐 필요 없이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오늘이 가기 전에 생사의 경계를 넘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기실 나는 소년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사기를 즐기는 놈이 어째서 사왕전에 있지 않고 비전으로 거처를 옮긴 게냐? 이 늙은이야말로 사기의 결정체였을 텐데.”
소년의 눈길이 내가 탁자 위에 올려둔 사왕의 수급으로 향했다.
“벌주의 사기는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소. 한 모금만 마셔도 위장이 녹아내리는 독주라고나 할까. 사왕만이 아니라 사벌에 들고 서너 달쯤 지났을 무렵엔 이미 초절정 급의 고수들이 발산하는 사기에도 견디기 힘들었소. 그래서 부득이 무인들이 드나들지 않는 비전으로 갈 수밖에 없었소.”
“아예 사벌을 나오지 그랬느냐?”
“말했잖소. 나는 중독되어 있었다고. 하루라도 사기를 쐬지 않으면 오한이 들고 현기증이 일었소. 하니 비전 행은 불가피한 결정이자 현명한 선택이었소. 사기에 직접적으로 침탈당하지 않으면서도 항상 사기가 향기처럼 흘러들어왔으니 내겐 아늑한 보금자리나 마찬가지였소.”
돌연 소년의 눈빛에 원독이 서렸다.
“시한부 판정을 받긴 했지만 내 죽음을 이렇게 앞당긴 건 전왕, 당신이었소.”
무슨 소리인지 알 것 같았다.
소년의 원망에 뜨끔해서가 아니라 파리똥만큼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나는 선의를 보였다.
“아직 염왕의 낯짝은 고사하고 그림자도 보지 않았는데 우는 소리 하지 마라. 어떠냐? 원한다면 내가 도와줄 용의가 있는데.”
“독의에게 나를 돌봐주도록 청할 요량이오?”
떨떠름했다. 속을 읽어내는 데 있어 소년은 진소월 못지않은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래.”
소년이 콧방귀를 꼈다.
“내가 그 수단을 쓰지 않았을 것 같소?”
“건방떨지 마라, 인마. 장담컨대 사왕의 권위를 빌어 그 늙은이를 불러올 수는 있었어도 최선을 끌어내지는 못했을 게다. 너는 그 늙은이가 어떤 족속인지 몰라.”
“왜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오?”
“그럼 아냐?”
“물론이오. 단순히 아는 정도를 넘어 독의 자신보다 그를 더 잘 안다고 자부하오.”
“개소리.”
“꼴리는 대로 생각하시구려.”
“뭐?”
소년과 유치한 입씨름을 벌인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도 지지 않고 나를 마주 쏘아보았다. 허어, 이놈 보게나. 갈수록 마음에 드네. 지모도 그렇지만 기개가 사뭇 기특하지 않은가. 사왕 같은 겁쟁이의 여우 노릇만 하다 가기엔 너무 아까운 인재였다.
나는 속을 감추는 데 능숙한 편이었으나 소년의 독심술은 그 이상이었다.
“꿈도 꾸지 마시오. 설령 내가 회복된다고 해도 당신을 위해 머리를 쓸 일은 없소.”
“갸륵하군. 아니, 멍청한 건가. 이런 덜 떨어진 늙은이에게 일편단심의 충정을 바치다니.”
“그런 의미가 아니오. 그건 이를테면 첫사랑에 대한 순정과 같소. 만약 처음에 나를 매혹시킨 이가 적양장이 아니라 마인이었거나 정종무공을 익힌 정파의 협사였다면 내 삶은 완전히 달라졌을 게요. 나중에 양자를 다 접해보았으나 이미 사기에 길들여진 탓인지 역겹기만 했소. 참고로 당신이 발산하는 기는 패기(覇氣)와 독기요. 내가 마기와 정기보다 더 혐오하는 기운이라오.”
나는 소년에 대한 호감을 거두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일방적인 짝사랑은 스스로에게 용납할 수 없는 성정이었다. 뭐 하러 나 싫다는 놈에게 연연하겠는가.
이번에도 내 속을 들여다본 소년이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역시 단순한 사내구려. 사왕 욕 할 것 없소. 당신과는 오십 보 백 보니까. 아, 아전인수를 방지하고자 덧붙이자면 어디까지나 사왕 쪽이 백 보라오. 그가 당신보다는 낫소.”
“어디 더 씨불여봐라.”
“그럴 참이오. 좀 전에 말했듯 매번 불구덩이에 뛰어든 당신이 타 죽지 않은 건 단지 운이 억세게 좋았기 때문이오. 사왕이 내 말만 들었다면 당신은 진즉 한 줌의 잿더미가 되었을 게요. 재작년 십일월, 나는 당신을 잡기 위해 터무니없는 과다투입이라는 비전 안팎의 비난과 반발을 무릅쓰고 기어이 삼절문에 오사(五邪)를 투입해 완벽한 덫을 놓았소. 비록 그들의 엉성한 대처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지만 나는 그 건으로 단번에 사왕의 신임을 얻고 비전의 실질적 통제권을 부여받았소. 그 직후 사왕에게 몸소 전원으로 가서 당신의 숨통을 끊어놓으라고 설득했소. 그가 늑장을 부리지 않았다면, 그리고 내 당부대로 당신의 소재를 파악할 때까지 은밀히 행동하기만 했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그때 이승을 하직했을 거요.”
억지는 아니었으나 어차피 가정(假定)에 불과했다. 가정으로 쌓은 탑은 현실의 파도가 지나가면 속절없이 무너지는 모래성이나 다름없었다. 한마디로 망상이었다.
“독의를 미끼삼아 당신을 사벌로 유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소. 사왕은 끝까지 당신이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할 리가 없다고 반신반의했지만 결국 내 예상대로 되었소. 그날 사왕이 내기를 갈무리한 채 비로전 후면의 잣나무 숲에 은신해 있었다면 당신은 결코 빠져나가지 못했을 거요.”
새삼스레 등줄기가 서늘했다. 소년의 말마따나 사왕이 그의 지시에 따랐다면 나는 그날 불귀의 객이 되었을 터였다. 당시 나와 사왕의 격차는 요행을 바랄 수 없을 만큼 컸다.
“우습게도 나는 그날 사왕에게 된통 혼났소. 독왕의 잠복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실 나는 그럴 일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소. 당신이 독곡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정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오. 그래서 독곡의 간자들에게 독왕의 소재에 관한 정보를 올리도록 명했더랬소. 그런데 나로서는 운 나쁘게도 독왕의 부재를 알리는 첩지가 도착하기 전날 당신이 사벌에 잠입했던 게요.
아무튼 그날 나는 하마터면 자기를 사지에 몰아넣었다며 길길이 날뛰던 사왕의 손에 머리가 깨질 뻔했소. 시급히 십왕 중 하나를 끌어들여 독왕과 당신의 재침공에 대비해야 한다는 간언을 함으로써 가까스로 그의 노여움을 잠재울 수 있었소.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떠든 소리가 아니었소. 당신도 알다시피 실제로 낭왕과의 결맹을 성사시켰으니까. 그것도 내 작품이었소.”
나는 탁자에 두었던 사왕의 머리를 집어 들었다. 의기양양하게 떠들던 소년의 눈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고소했다.
“어딜 가려오?”
“나는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네 넋두리를 무한정 들어줄 만큼 인내심이 강하지도 않고. 공치사는 저승에 가서 이 늙은이와 재회하면 마저 하려무나.”
“그런 법이 어디 있소?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뭘 시작해?”
“당신의 행운 말이오. 아직 몇 개가 남았소.”
“됐어, 인마. 운이 반복되면 실력이라는 말도 못 들어봤냐? 그리고 내가 노는 곳은 물이 달라. 너처럼 잔머리만 굴리는 놈들은 상상도 못할 세계란 말이다.”
“결과론적인 허세일 뿐이오. 언제까지 그 운이 통할 것 같소? 설사 하늘이 돌본다고 해도 반드시…….”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네 갈 길이나 가라.”
나는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소년의 악다구니가 나를 쫓아왔다.
“기고만장하지 마라, 전왕. 너는 지독하게 운이 좋았을 뿐이야. 그 어리석은 사왕이 단 한 번이라도 내 말을 제대로 들었더라면 너는 이미 염왕전에…….”
뒷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충분히 멀어졌거나 청각을 폐쇄해서가 아니라 소년의 숨이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 * *
기분이 더러웠다.
소년은 내 심중에 불안감을 심어놓으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었다. 나는 그의 저주가 그림자처럼 떨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뭐, 상관없었다. 운이 다하면 가면 그만이었다.
소년은 나를 불나방에 비유했지만 나는 시간을 되돌린 대도 똑같은 행동을 반복할 터였다. 내가 삶에서 후회하는 단 한 가지는 작년 이맘 때 비처를 나가며 진소월이 건넸던 충고를 따르지 않았던 처사였다. 한우경과 이모의 죽음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팔 한 짝을 떼 주어도 좋았다. 원력을 상실한대도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 강호에 나온 이후 내가 그 정도의 정을 품었던 이는 그들을 제외하면 진소월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의미한 바람이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미래와 마찬가지로 이미 지나간 날들은 허상이나 진배없었다.
실체는, 그리고 진실은 오로지 ‘지금 이 순간’뿐이었다. 삶은 ‘찰나’들의 영원한 연속이었다. 지금 맞이한 이 순간에 전심전력하기, 그것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가 가르쳐준 삶의 본령이었다.
* * *
소년을 내버려두고 원산을 나온 지 반 시진 후 나는 일월검문이 이백오십 년이나 지배방파로 군림해 온 육관에 당도했다. 바람이 찬 데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지만 사파 무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처답게 거리는 행인들로 북적거렸다.
내가 번화한 저자에 떨어져 내리자 수백 쌍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그리고 바로 소요가 일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사람들을 붙잡았다. 아무도 그 자리에 멈춰 서라는 내 명을 거역하지 못했다.
나는 바닥에 엎드린 군중에게 고개를 들도록 한 후 사왕의 머리통을 들고 외쳤다.
“사왕은 죽었다. 상운과 흑문의 인사들은 이 소식을 세상에 알려라.”
경악과 공포의 눈길만이 만연할 뿐 호응은 없었다. 나는 사왕의 머리통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그대로 비상했다. 이제 이틀이면 대륙 전역에 내 승전보가 전해질 것이었다.
육관을 떠난 나는 만유산으로 향했다.
폐광에 당도했을 때는 어둑어둑해져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희끄무레한 덩어리 두 개가 보였다. 하나는 머리를 잃은 마왕의 몸뚱이였고 다른 하나는 관이었다. 관 속에는 마충의 시신이 들어있을 터였다.
나는 관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관 뚜껑을 열어보니 놀랍게도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한 마충의 얼굴이 나왔다. 나현이 보낸 이들이 으깨졌던 그의 면상과 동체를 원형복구한 모양이었다. 탄복이 나올 만큼 신묘한 솜씨였다.
잠에 든 것처럼 편안하게 보이는 마충을 보고 있자니 울컥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대인. 이제 댁에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대인을 괴롭혔던 문제도 해결해드리겠습니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나는 마충이 미소로써 화답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