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84
제183화 멍청한 작자 같으니
내가 생면부지의 창수(槍手)를 일수에 양단한 것은 무위를 과시함으로써 장내를 장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죽어 마땅한 악당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효성창문 서열 삼위의 거물이자 초절정의 고수인 금선창 이운이었다. 나현이 전한 바에 따르면 이운은 효성창문 내에서 손꼽히는 악종이었다. 살인을 밥 먹듯이 했고 초경도 치르지 않은 여아 간살을 취미로 즐겼다. 그는 지난 달 사벌에서 내게 부역했다는 죄목으로 수많은 이들을 학살한 참극의 주동자이기도 했다. 그러니 나로서는 관용을 베풀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너무 편하게 보낸 게 아쉬울 지경이었다.
나는 공포에 잠긴 와중에도 앞 다투어 바닥에 오체투지 하는 중인을 둘러보았다. 서 있는 자는 황민상과 섬섬옥수의 노인, 그리고 큰 칼을 차고 있는 백염의 노인뿐이었다. 노인 둘도 엎어질 듯 말 듯 엉거주춤한 자세였다. 그들 또한 내가 슬쩍 눈만 부라리면 다른 이들처럼 바닥에 이마를 박을 게 뻔했다.
나는 노인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배꼽까지 내려오는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은 광양 성가의 도호 어린도 성완이었다. 성완은 오늘 오인결의 공식참관인으로 나왔을 터였다.
주름투성이이고 햇볕에 검게 그을린 면상과는 달리 티 한 점 없이 매끈한 소수(素手)를 지닌 노인은 귀수(鬼手) 여태구(呂泰具)였다. 귀수는 대륙 전체에 위명을 떨친 거물이었다. 그는 중원육기의 일인이었다. 그를 상대하려면 오대세가의 가주들이나 사파칠문의 문주들이 나서야 할 터였다. 말하자면 귀수는 부영상단이 준비한 필승의 패였다.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귀수가 눈길을 아래로 내렸다. 지금이라도 엎드려야 할지를 두고 갈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독보강호하는 무호들 중 으뜸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중원육기에 든 이후엔 단 한 번도 남 앞에서 무릎을 꿇은 적이 없었을 것이었다.
나는 귀수를 겨냥해 내기를 발산했다. 그는 반의반 호흡도 버티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당연한 굴종이었다. 그는 내가 검왕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저항불가의 위압감을 느꼈을 터였다.
땅바닥에 개구리처럼 엎드린 귀수를 보노라니 절로 격세지감이 들었다. 재작년 가을 절곡을 나올 무렵이었다면 기운만으로 그를 압도한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미세하나마 열세였던 괴선과의 비무를 참고하건대 그 시기에 귀수와 생사투라도 벌였다면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웠을 공산이 컸다. 객관적인 무력도 딸리거니와 당시엔 강자와의 실전경험이 전무했기에 내 입장에서는 동귀어진이 최상의 결과였을 터였다.
그런데 불과 일 년 반 만에 손도 대지 않고 귀수 같은 강자를 짓누를 수 있게 되었으니 스스로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확신컨대 내 경이로운 성장 속도는 무림이 존속하는 한 역사에 길이길이 남으리라.
귀수를 처리한 나는 아직도 버티고 있는 어린도 성완에게 눈을 돌렸다. 그는 어색한 웃음으로 내 시선을 받았다. 그러나 내가 안구에 힘을 주자 얼른 웃음기를 지우고는 정색했다. 그러더니 포권하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광양 성가의 완이 전왕을 뵙소.”
풍 맞은 이의 손처럼 다리를 후들거리는 탓인지 목소리도 심하게 떨렸다. 나는 성완의 인사를 무시하고 모두에게 기립을 명했다.
“다들 일어서.”
고개를 돌려 눈치를 보던 자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나는 중년인을 불렀다.
“이리 와.”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던 중년인이 내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의외로 강단이 있는 인물이었다.
“네가 부영상단의 양우일이냐?”
“그, 그, 그렇사옵니다.”
“너희 출전자들 나오라고 해.”
“그, 그, 그게…….”
“토 달지 마.”
“아, 아, 알겠사옵니다.”
양우일이 손짓을 했다. 그러자 네 명의 무인이 귀수 옆에 가서 나란히 섰다. 나는 그들의 무위를 가늠했다. 다 고만고만했다. 제일 강해보이는 자도 기껏해야 절정 중하(中下) 어림일 듯했다. 이로써 심중의 의구심이 깨끗이 해소되었다.“나머지는 뭐야?”
“차, 차, 참관인들이옵니다. 셋은 무림의 명숙들이고 넷은 상계의 동료들이옵니다. 한 명씩 소개를 올리자면 먼저…….”
“됐어. 이제 시작하자. 누구부터 나올래? 규칙 상 싸우다 죽여도 무방하다고 했지?”
귀수를 비롯한 오인은 공히 사색이 되었다.
양우일이 그들을 구원해주었다.
“저, 저, 저희는 오인결을 포기하겠사옵니다. 소, 소, 소연표국의 승리임을 인정하고 합의한 대로 배상을…….”
“누구 맘대로. 나를 헛걸음하게 만들 셈이냐?”
“아, 아, 아니옵니다. 제가 어찌 감히. 저, 저, 저는 그저…….”
“그만 더듬어. 짜증나니까.”
“아, 아, 알겠사옵……, 아, 아, 아니…….”
“죽을래?”
나는 공포로 까무러치려는 양우일의 정신 줄을 잡아주었다.
“지금부터 몇 가지 물어보겠다. 정직하게 답하면 곱게 돌려보내주마.”
숨통이 터진 양우일이 부르짖었다.
“뭐든지 하문만 하시옵소서. 제가 아는 것이라면…….”
“시끄러. 일단 너는 마 국주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지? 귀수로 하여금 그이를 처치할 작정이었을 테지?”
“…….”
“대답 안 해?”
“죄, 죄, 죄송하오나 그, 그, 그렇사옵니다. 하, 하, 하오나…….”
“사족 달지 마. 다음 질문이다. 오인결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너하고 작당한 자들이 있나?”
그 질문이 떨어지자 두 사람이 뻣뻣이 굳어버렸다. 하나는 황민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완이었다.
* * *
부영상단에서 귀수 말고는 강자라 할 만 한 자들을 내보내지 않았다는 것은 소연표국에 방수가 있다는 반증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상단의 명운이 걸린 승부에 그렇게 허술한 준비를 했을 리 만무했다.
가장 의심스러운 자는 당연히 양우일과 오인결을 합의한 황민상이었다. 그가 고의 패배를 하면 부영상단은 일승을 확보하는 셈이었다. 오인결에 출전하기로 한 소연표국의 표두들 중 최소한 한 명도 부영상단의 노리개일 터였다. 어쩌면 그들 전부가 한통속이었을지도 몰랐다.
마충은 이러한 사실을 짐작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고뇌로 몇날 며칠을 지새우다 나와의 만남을 계기로 옥쇄를 선택한 게 아닐까. 믿었던 친인들에게 배반당하는 꼴에 처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여기지 않았을까.
그는 나에게 도움을 청할지를 두고도 고심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럴 만한 친분을 쌓은 건 아니었기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냥 용기를 내어 부탁을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기꺼이 들어주었을 텐데. 그에게 귀중한 정보를 얻어서가 아니라 그가 마음에 들었기에.
이제 와서는 다 공염불이었다. 아무리 안타까워하더라도 마충을 되살릴 수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를 배신한 자들을 처단해 그의 넋을 달래주는 것뿐이었다.
* * *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직 양우일의 답변이 나오지 않았음에도 황민상은 하얗게 질린 낯짝으로 자신의 혐의를 자인했다. 일부러 그에게 빈틈을 보였으나 황민상은 나를 암습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더니 작심한 듯 품에서 시커먼 부채를 꺼냈다. 그의 별호이자 독문병기인 흑선이었다.
양우일이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황민상이 그를 즉살해 살인멸구를 꾀하려 든다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황민상의 부채는 양우일의 목이 아니라 그 자신의 목을 베어갔다. 나는 황민상이 편하게 자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쉭!
일순 황민상과 양우일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황민상의 손에 들려있던 부채가 내 손으로 옮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혀를 깨물거나 제 목을 꺾을 수도 있었기에 나는 그의 혈도를 점했다.
“나는 독한 놈들을 싫어하지 않아. 나쁜 놈들도 어지간하면 봐 줄 수 있어. 하지만 신의를 저버리는 쓰레기들은 용서할 수 없어.”
중인에게 취향을 공개한 나는 황민상의 부채를 휘둘러 그의 오른팔을 베어냈다. 아혈이 찍혀있었음에도 황민상의 입술에서 비명이 새어나왔다.
“이건 너무 싱거운가?”
부채를 던져버린 나는 황민상의 왼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손목과 팔꿈치, 그리고 어깨를 차례로 부러뜨렸다. 황민상은 고통을 참는 데 능숙한 편이 아니었다. 그는 올가미에 걸린 짐승처럼 꺽꺽거렸다. 공포에 질린 그의 눈빛이 나를 흡족하게 했다. 그를 쓰러뜨린 나는 양 다리를 잘근잘근 짓밟았다. 발목이 으스러지고 무릎이 깨지고 사타구니가 짓뭉개질 때마다 마비된 황민상이 경련을 일으켰다.
원시적인 폭행이었으나 효과는 상당했다. 다음 차례가 될 거라 지레짐작한 성완이 돌연 칠공에서 피를 분출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자기 차례가 오기 전에 스스로 혈맥을 터뜨려 자결한 것이었다.
명줄만 붙어있는 황민상을 걷어 찬 나는 양우일을 보았다. 그의 하초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세 번째 질문이다. 네가 저치들이 마 국주를 배신하도록 부추겼을 테지?”
양우일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제 혀를 깨문 자는 말을 할 수 없는 법이었다. 나는 과다한 출혈로 서서히 죽어가는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멍청한 작자 같으니. 정직하게만 답하면 곱게 보내준다고 했잖으냐? 내 약속을 안 믿었군. 뭐, 자업자득이니……, 아니 자승자박인가? 어쨌거나 네 잘못이니 나를 원망하지는 마.”
내 말에 양우일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이승에 남긴 마지막 표정이었다.
* * *
의주로 돌아간 나는 야산에 두었던 마충의 관을 소연표국에 들고 갔다. 그러고는 놀라는 이들에게 마충과 나의 우정을 설명한 후 표국을 떠났다. 후사는 미리 합의한 대로 나현이 처리해 줄 터였다.
명교로 향하며 나는 금의환향하는 기분이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한 달 전 적들의 집결지였던 도경산으로 출정했을 즈음엔 절대열세였던 국면을 완벽하게 뒤집어 우세한 국면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아직 도검의 제왕들이 남아있지만 그들이 사마의 잔당들을 규합해 당장 쳐들어오지 않는 한 형세는 내 쪽이 월등히 유리했다. 검왕과 도왕이 즉각적인 침공을 결행할 가능성은 희박하리라 보았지만 설령 그런다 한들 얼마든지 대처할 자신이 있었다.
나는 미래를 낙관했다. 마왕과 사왕의 목을 날려 대세를 장악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시간이 내 편이었다.
현재 내 무력은 무왕과 대등했다. 꾸준히 증가된 원력이 어느새 그의 공력과 비슷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거니와 도경산 혈전과 마왕과의 혈투를 통해 무학에서도 진일보를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실질적인 최강자인 검왕을 따라잡을 날도 머지않았으리라 확신했다. 당장이라도 그와 생사투를 치른다면 그를 저승길의 동반자로 만드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를 죽이는 대가로 내 목숨을 내놓는다면 너무 손해였다. 그러니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에게 필적하는 무위에 도달할 때까지 자중할 참이었다. 아무리 늦게 잡더라도 올해 안으로는 가능할 터였다. 나는 내심 두어 달 이내에 목표를 이룰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기 위해 더욱더 분발할 작심이었다.
은천에 당도했을 때는 이슥한 밤이었다.
마치 잠입하듯 몰래 명교에 들어간 나는 백운당으로 갔다. 우선 소면통달을 만나 향후의 과제를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장왕의 처소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허름한 모옥에 이른 나는 인기척을 냈다. 삐거덕거리며 방문이 열리더니 소면통달이 튀어 나왔다. 쌍수를 들고 내 귀환을 환영하리라 여겼던 소면통달의 낯짝엔 암운이 드리워있었다. 나는 무언가 잘못 되었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