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85
제184화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 신세지요
소면통달이 억지웃음을 머금었다.
“어서 오시오, 전왕. 이번에도 혁혁한 전과를 올렸더구려. 사마의 왕들을 처치하다니, 가히 천장(天將)의 위용이 아닐 수 없소. 덕분에 이제부터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게 되었구려. 전왕이 수고하는 동안 아무 보탬도 되지 못해 송구스럽소. 전왕에겐 늘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오.”
나는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장왕 어르신께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애써 미소를 지었던 소면통달의 면상이 우그러졌다.
“교주는 폐인이 되었다오.”
“네? 어쩌다가?”
소면통달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
“낭왕 때문이오. 그자가 팔을 자르는 통에……. 교주는 자기 상태도 잊고 오시(午時)면 어김없이 발작했다오. 하지만 팔이 사라졌음에도 무작정 내기를 불어넣다가 기혈이 역류한 모양이오. 그러다 결국 주화입마에 들고 말았소. 지금은 전날의 괴선처럼 운신불능에 똥오줌도 가리지 못하는 신세라오.”
“…….”
“그자는 어디 있소? 청컨대 본교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해주시오. 아무리 우군이라고 하나 교주를 그 꼴로 만들었으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구려.”
“그는 한 달 전 도경산에서 전사했습니다.”
“아!”
소면통달은 탄성을 내질렀지만 사려 깊게도 ‘그것 참 잘 됐구려.’와 같은 뒷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일단 들어가십시다.”
소면통달은 옆방으로 나를 이끌었다. 장왕의 침소에 들러 그를 살펴볼까 했지만 주군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을 소면통달의 심사를 헤아려 자중했다.
소면통달과 나는 향후의 정국과 대응방안을 주제로 논의에 들어갔다. 원래는 진소월이 할 일이었으나 그녀가 그럴 형편이 아닌 탓에 내가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방면에 관심이 부족했고 소면통달은 장왕의 변고로 인해 의욕을 크게 잃어버린 탓에 논의는 지지부진했다. 천하를 경영하는 대사를 다루고 있음에도 그와 나 모두 열의라고는 한줌도 없었다.
소면통달은 심지어 애초에 합의했던 사안조차도 이행하기를 마다했다. 자기들은 한 게 없으니 내가 사벌과 마련의 영토를 다 차지하고 지배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으나 실상은 손 하나 까딱하기 싫다는 뜻이었다. 그의 심정을 이해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엔 열불이 났다.
“어르신도 아시다시피 저는 통치에는 문외한입니다. 사파 무림은 저와 결연한 의인들이 어찌어찌 떠맡더라도 마련의 영역까지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귀교에는 경험과 경륜이 풍부한 분들이 수두룩하지 않습니까? 부디 마인들의 폭정에 시달리며 축생만도 못한 삶을 강요받아온 수백만 민중을 위해서라도 그 땅에 들어가 선정을 펼쳐 주십시오.”
말은 정중하게 했으나 나는 거절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소면통달을 압박했다. 소면통달이 마지못해 내 요구를 수용했다.
“알겠소, 전왕. 그렇게까지 바란다면 그리 하리다. 상황이 정리대는 대로 본교의 능력 있는 신하들을 계양에 파견하겠소.”
기가 막혔다. 마치 선심을 쓴다는 듯한 언사가 아닌가. 부아가 치밀었지만 나는 시비를 걸지 않고 다음 사안으로 넘어갔다.
“기실 당면한 과제는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사벌과 마련의 잔당들을 쓸어버리는 것입니다. 검왕과 도왕은 차치하더라도 적들에겐 아직 삼사(三邪)와 육마(六魔)가 건재합니다. 사마 무림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그들부터 우선적으로…….”
소면통달이 내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그자들은 전왕이 처리하면 안 되겠소?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이잖소? 누구라도 전왕에겐 일초지적도 되지 못할…….”
나는 더 참지 못하고 분기를 터뜨렸다.
“정말 이러시깁니까? 저는 귀교와 동맹을 맺은 이래 제 친인들과 귀교를 지키기 위해 몇 차례나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어르신은 원수로 여기시지만 그 과정에서 소중한 전우인 낭왕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연실색한 소면통달이 내 손을 잡아왔다.
“진정하시구려. 내가 잘못했소. 전왕이 전장에 나가 사투를 벌이는 동안 여기서 편하게 손가락이나 빨고 있던 주제에 가당찮은 망언을 내뱉었소. 내가 미쳤나 보오. 청컨대 한 번만 용서해주구려. 다시는 이런 망발을 떨지 않겠소. 미안하오. 정말 미안하오.”
소면통달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으나 나는 그간의 의리를 고려해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장왕 어르신의 일은 참으로 유감입니다. 하지만 만백성의 안녕을 위해 늘 노심초사하고 불철주야 분투하셨던 그분을 위해서도 어르신께서 힘을 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할 일이 태산입니다.”
“맞소. 전왕의 말이 다 맞소. 이 늙은이, 면목이 없구려.”
고개를 숙인 소면통달이 엄친에게 야단맞은 소동처럼 눈물을 뚝뚝 떨궜다.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그를 위무했다. 이러나저러나 목전의 노인은 오랫동안 함께 해야 할 동반자였다.
* * *
새벽녘에 백운당을 나섰을 때는 진이 빠져있었다.
서천으로 기운 만월을 올려다보며 나는 진소월을 떠올렸다. 사뭇 그리웠다. 그녀만 있었다면 만사를 그녀에게 맡기고 나는 오로지 무력증진과 남아있는 강적들과의 대결에만 집중할 수 있었을 터였다.
보름달 속에서 진소월이 특유의 쓴웃음을 머금고서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고생이 많네요, 전 가가.’
“언제 돌아올 거요?”
‘알잖아요? 내가 아니라 독의에게 달려있다는 걸.’
상상 대화에서 진소월이 독의를 언급하자 새삼스레 분통이 터졌다. 그는 백향산의 장원에서 했던 약속대로 명교를 찾아와 괴선을 거동이 가능한 상태로 돌려주었지만 그 이후 감감무소식이었다.
나는 내 골수를 긁어주는 대가로 그에게 두 가지를 요구했다. 하나는 진소월의 용모를 원상회복시키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녀를 다시 구세원에 데리고 와서 치료하라는 것이었다.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즉시 실행할 수 있는 요구였다. 그럼에도 스무 날이 넘도록 연락조차 없다는 것은 내 조건을 수락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로 보아야 했다.
골수가 필요 없는 걸까. 아니면 다른 사정이 있는 걸까. 독의의 의도를 알 수 없고 그를 강제할 방도도 없는지라 답답할 따름이었다.
* * *
구세원으로 가려다 무왕에게 먼저 들르기로 했다.
명교 서편의 황무지는 찬연한 월광과 숨 막힐 듯한 고요에 잠겨있었다. 명교의 울타리인 낮은 담벼락을 넘어 무왕의 움막으로 걸어가는 동안 나는 기운을 철저히 지웠다. 무왕은 언제 내 도래를 알아차릴 수 있을까.그 질문에 대한 답은 얻지 못했다. 분명 도중에 감지했을 터임에도 무왕은 내가 움막 앞에 이를 때까지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호흡도 일정했고 내기도 안정적이었다. 내가 그냥 가만히 서있자 움막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내가 거적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데 무왕이 움직이는 기척이 났다.
“아니다, 내가 나가마. 소아가 깨겠다.”
무왕이 밖으로 나왔다. 나는 슬쩍 안을 들여다보았다. 곱상한 얼굴의 아이가 두툼한 솜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리고서 쌔근쌔근 잠들어있었다. 예닐곱 살쯤 되었을까. 일견해서는 남아인지 여아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저 아이입니까?”
“그래. 이름이 소(小)라고 하더구나. 노예 출신이라 성(姓)은 없는 모양이다.”
심히 당혹스러웠다. 괴상한 이름 탓이 아니었다. 아이에게 향한 무왕의 눈길에 담긴 건 분명 정(情)이었다. 아이를 다시 보았다. 미소녀처럼 예쁘장하게 생기긴 했으나 특출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도왕에 이어 무왕의 마음도 사로잡은 것이었다. 대체 저 꼬마에게 무슨 매력이 있는 걸까.
“저 아이가 어째서 여기에서 자고 있습니까?”
민망한 질문이라도 받은 듯 무왕이 얼굴을 붉혔다.
“나한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더구나. 그래도 서로 불편할 것 같아서 명교에 돌아온 이후 떼어놓았는데 진종일 나를 찾으며 운다기에 어쩔 수 없이 데려왔다.”
납득하기 어려운 해명이었다. 내가 물고 늘어질 것을 간파했는지 무왕이 화제를 돌렸다.
“도왕과는 어떻게 된 일이냐?”
“이미 자세한 내용을 적은 서신을 보내드렸지 않습니까?”
전날 나현을 만났을 때 나는 그간의 경과를 담은 서찰을 무왕과 명교에 전해달라고 부탁한 바 있었다.
“그래도 네 입으로 듣고 싶구나.”
“서신에 적힌 그대로입니다. 도왕은 제가 마왕과 혈투를 벌이다 마무리를 지을 찰나 뒤에서 저를 암습했습니다. 중상을 입긴 했지만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하고 도주에 성공했습니다.”
“마왕과 싸우기 전에 그이에게 소아를 구출했음을 확실히 알렸더냐?”
“물론입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렇게 방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도무지 믿기 어렵구나. 대체 그이가 왜 그랬을까?”
“그야 저도 모르지요. 하지만 빤하지 않겠습니까?”
“빤하다니?”
“제가 마왕을 처치하는 모습을 보고는 욕심이 났을 테지요. 저만 제거하면 자기 세상이 올 거라고요. 아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련에 협력하는 시늉을 했을 뿐이라는 식으로 변명하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 어르신과 합작하려고 했겠지요. 검왕이 검총으로 돌아갔으니 사왕을 없애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라고 계산하고서요. 뭐,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 공산이 크지요. 그리고 그리 되었으면 그는 척박한 평북 무림에서 벗어나 광대한 영토의 주인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사벌이나 마련, 둘 중에 하나는 자기 차지가 되었을 테니까요.”
“……내가 아는 그이는 그렇게 사욕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전날 어르신께서 그의 전모를 파악하지 못하셨을 수도 있고요. 동기가 무엇이건 그가 제게 용납할 수 없는 살수를 썼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저는 결코 그의 비열한 행동을 묵과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
무왕은 여전히 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쐐기를 박았다.
“저를 놓친 이후 그의 경로를 추적해보니 이리로 향했더군요. 그가 무슨 의도로 그랬겠습니까? 제 생존으로 인해 어르신과의 합작은 물 건너 간 셈이니 이번에는 어르신을 암습한 후 사왕과 손을 잡을 심산이 아니었겠습니까? 만약 제가 서둘러 그의 실체를 폭로하는 전갈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를 철석같이 믿고 계시던 어르신은 속절없이 그의 암수에 당하셨을 것입니다. 도중에 그가 명교 행을 포기하고 방향을 튼 것은 자기가 만유산에서 범했던 행위가 들통 났음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어르신이 경계를 할 터이니 감히 모험을 할 수 없었겠지요. 장왕 어르신도 신경이 쓰였을 테고요. 아무튼 그는 어르신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잔머리를 굴리는 데 능한 능구렁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이는 지금 어디에 있더냐?”
“검총에 기어들어간 것 같습니다만, 그 이후의 행적은 불명입니다. 아직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고 이미 떠났을 지도 모릅니다. 전자라면 ‘독 안에 든 쥐’고 후자라면 조만간 소재가 드러나겠지요. 온 천하에 제 이목이 깔려있는 것이나 진배없으니.”
“그이가 검총에 있다면 그리고 갈 생각이더냐?”
“당연하지 않습니까? 저는 당하고는 살지 못하는 성미입니다. 그에게 누구를 건드렸는지 똑똑히 알려 줄 참입니다.”
“그곳에는 검왕도 있지 않으냐?”
“상관없습니다. 그 꺽다리가 제 행사를 방해하려 들면 둘을 한꺼번에 날려버리면 그만입니다.”
무왕의 눈빛이 바람 맞은 촛불처럼 흔들렸다.
“벌써 그 경지에 이르렀더냐?”
“그럴 리가요. 간다고만 했지 언제 간다고는 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뭐, 일 년, 아니면 이 년 후에는 그들을 싸잡아 물리칠 무력에 이를 수 있겠지요. 아무리 늦어도 삼 년 안으로는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쨌거나 괴로운 건 제가 아니라 도왕입니다. 저를 기다리는 매일 매일이 전전긍긍의 연속일 테니까요.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달아나자니 걸릴까봐 두렵기는 매한가지일 테고요. 그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이니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 신세지요.”
무왕이 입 꼬리를 말아 올리는 특유의 고소를 지어보였다. 그러고는 그의 진짜 관심사를 꺼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