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87
제186화 너는 대체 누구냐?
무왕은 움막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새 깼는지 아이가 무왕의 다리를 잡고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동그란 눈이 꽤 귀여웠다. 나 같은 거한은 처음 보았는지 약간 겁을 먹은 듯했다. 그러면서도 눈빛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아이와 시선이 마주치자 별안간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건 뭐지?
난데없는 기현상에 당황하고 있는데 무왕이 손에 들고 있던 첩지를 내밀었다.
“보거라.”
나는 두 겹으로 접힌 첩지를 펴고 내용을 살폈다. 그리고 무왕이 어째서 나를 급히 불렀는지 알았다.
“어떡할 테냐?”
“그는 제가 아니라 어르신께 부탁한 것이잖습니까? 어쩌시렵니까?”
정맹을 통해 첩지를 보낸 이는 도왕이었다. 도왕은 무왕에게 나를 공격했던 이유를 간략히 설명한 후 성급한 판단이자 행동이었음을 인정하고 중재를 청했다. 그러면서 마련에서 구출한 자신의 시동을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무왕이 매미처럼 그의 다리에 달라붙어있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소아에게 물어보았더니 그이를 만나기 싫다고 하더구나.”
무왕의 말을 들은 아이가 돌연 울먹거리며 애원했다.
“주인님은 무서워요. 제발 저를 주인님에게 보내지 마세요.”다시 한 번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방금 전 느꼈던 낯선 감정이 보호본능임을 깨달았다. 아이를 지켜주고 싶었다. 세상 무엇으로부터건.
무릎을 꿇고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 무왕이 그를 다독였다.
“걱정 말거라, 소아야. 아무 데도 보내지 않을 테니. 내가 옆에 있으마. 항상.”
일순 소름이 돋았다. 마지막 단어만 빼고 나도 무왕과 똑같은 말을 하려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안고 일어선 무왕이 전에 없이 날 것 그대로의 분노를 여과 없이 분출했다.
“그이는 소아에게 몹쓸 짓을 했더구나. 생각 같아선 내가 가서 따지고 싶으나 소아를 두고 갈 수는 없다. 데리고 가는 건 더더욱 곤란하고. 그이를 보면 소아가 경기를 일으킬 수 있으니.”
“그렇다면 중재는 하지 않으실 작정이십니까?”
“내가 그런다고 네가 받아들이겠느냐?”
“……죄송하지만 그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뜻대로 하려무나. 하지만 결정을 내리기 전에 그이의 얘기를 충분히 들어야 한다. 그이의 말마따나 사정을 모른 데서 비롯된 실수라면 목을 요구하는 건 과도한 처사다.”
“알겠습니다. 신중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빈말이었다. 무왕도 알았을 터이지만 더 이상 잔소리를 늘어놓지는 않았다. 그의 목을 끌어안고서 나를 빤히 쳐다보는 아이를 일별한 나는 작별을 고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 * *
나는 정맹으로 직행하지 않고 구세원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상부(商府)의 일로 은천 외부에 나가있는 진청운을 제외한 친인들 전원이 일층의 다실에 모여 있었다. 문을 열고 직방형 탁자에 둘러앉은 친인들을 보니 새삼스레 진소월의 빈자리가 커보였다. 이광의 부재도 심장이 아렸다.
다실에 들어서기도 전에 괴선의 걸쭉한 욕설이 나를 반겼다.
“이 빌어먹을 놈아. 어디서 뭐하다 이제야 돌아온 게냐? 네놈 기다리다가 목이 빠지는 줄 알았다.”
“제길, 내가 노인장처럼 한가한 사람이오? 얼마나 일이 많은지 아쇼? 그리고 노인장이 내 정인이라도 되오? 목이 빠지긴 왜 빠져?”
“허어, 이놈 말본새 좀 보게. 원체도 존장에 대한 예의라고는 개구리 코털만큼도 없는 종자이긴 했다만 좀 컸다고 완전히 삶아먹었네 그려.”
“나는 원래부터 컸소. 그리고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고운 법이오. 보자마자 욕부터 내뱉는 노인네에게 어떻게…….”
“뭐라? 노인네? 지금 나더러 노인네라고 했더냐? 보자보자 하니까 이놈이…….”
“아, 말하다 보니 잠시 엇나온 것 같고 꼬투리 잡지 마쇼. 그리고 솔직히 노인네든 노인장이든…….”
“닥쳐라, 이놈아.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더니 딱 그 짝일세. 세상물정 모르는 천둥벌거숭이를 물심양면으로 돌보며 키워줬더니 은혜는 갚지 못할망정…….”
“그건 또 무슨 헛소리요?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진짠 줄 알겠소. 노인장이 언제 나를 키웠다고…….”
“됐다, 이놈아. 까마귀 고기를 생으로 뜯어먹어 기억을 상실한 놈하고는 더 이상 말 섞기 싫다. 네놈 같은 후안무치한 종자한테 도리를 가르치느니 길가의 돌멩이에게…….”
“흥, 할 말 없으니까 빼기는. 졌으면 졌다고 솔직히…….”
“지긴 누가 져, 이놈아! 정말 끝까지 해보자는 게냐? 오냐, 어디…….”
서로의 말을 끊으며 입씨름을 벌이는 우리 노소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던 친인들이 뒤늦게 말리고 나섰다.
우리의 언쟁에 놀랐는지, 아니면 내게 막말을 하는 이가 있다는 데 충격을 받았는지 무영이 안절부절못했다. 점박이 노인이 귓속말로 괴선과 나의 관계와 습성을 알리며 그를 안심시켰다.
나와 괴선은 언제 싸웠냐는 듯 덕담을 주고받았다.
“망아지처럼 팔팔해 보이는구려.”
쇠꼬챙이처럼 앙상하게 말랐지만 괴선은 혈색이 좋았다.
“제법 기특한 짓을 했더구나. 사마의 수괴들을 골로 보내다니. 처음부터 상세히 고해 보거라.”
“미안하지만 다음에 합시다. 급히 가봐야 할 데가 있소. 가기 전에 잠시 들른 거요.”
“어딜 가는데?”
“정맹이오.”
“거긴 왜?”
“도왕을 만날 참이오.”
좌중이 술렁거렸다. 괴선이 손을 휘저어 소란을 가라앉혔다. 내가 그를 존중했기에 모두들 그의 뜻에 응했다.
“도왕은 마왕의 편을 들어 너를 기습했다며? 그가 어째서 정맹에 있다는 게냐? 그리고 너는 왜 만나자고 한 게냐?”
“변명을 하려는 모양이오. 그러고는 화해를 청할 테지.”
“들어줄 참이냐?”
“그럴 리가 있소?”
“이놈아. 어지간하면 아량을 베풀어라. 어쩌다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이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살다보면 누구나 실수하기 마련…….”
“아, 됐소. 그 늙은이를 본 적도 없으면서 두둔할 건 뭐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쇼.”
“또 그 소리. 이놈아, 여기 무식쟁이하고 기생오라비한테도 사마 잔당 소탕전에 나서라고 했다면서? 이치들이든 네놈 명에 따르는 다른 이들에게든 함부로 살생하지 말도록 단단히 주의를 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네놈부터 솔선수범해서 관용의 덕을 보여야 할 터. 월척들을 낚아 염왕에게 보냈으니 사실상 끝난 전쟁이 아니더냐. 굳이 잔챙이들까지 쓸어버릴 필요는 없단 말이다.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악행을 저질렀거나 개전의 여지가 없는 악종들만 단죄하고 나머지 인사들에겐 널리 선처를 하려무나. 사파나 마도에 몸담았다고 무조건 죽이는 건 가혹한 처사다. 부디 살업을 쌓지 말거라. 못 말리는 싸움닭이긴 하나 네놈은 잔학한 성품은 아니지 않으냐.”
나는 슬쩍 광객을 보았다. 괴선이 가장 싫어하는 별명을 불렀음에도 그가 발광하지 않는 건 서글픈 일이었다. 역설적으로 괴선의 처지를 되새기게 했기 때문이었다. 전신불수에서 벗어났으나 선력을 회복하지 못한 괴선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구였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나는 괴선의 당부에 순응했다.
“안 그래도 강호 사정에 밝은이가 노인장이 말한 것과 유사한 기준으로 살생부를 작성하고 있소. 피바람은 오직 그 명단에 오른 자들에게만 불 터이니 너무 염려 마시오.”
“잘했다. 정말 잘했어.”
“그럼 나중에 봅시다.”
괴선이 방을 빠져나가려는 나를 잡았다.
“잠깐.”
나는 고개만 돌렸다.
“또 뭐요?”
“꼬맹이하고 곰보 말이다.”
“…….”
“고것들이 없으니까 영 허전하구나. 찾아서 불러올까 하는데, 어떠냐?”
“…….”
“어째서 대답이 없냐? 웬만하면 이제 그만 풀고 용서해주려무나.”
“……맘대로 하쇼.”
내 눈치를 보느라 환성을 지르지는 않았으나 이광에게 얽힌 사정을 모르는 무영을 뺀 모두들 반색했다. 나는 조용히 문을 열고 다실을 나왔다.
* * *
복도를 걸어가며 왠지 비감했다. 무왕이 그랬던 것처럼 낭왕에 관해 언급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장왕의 일로 그를 명교에 들이지 않고 다른 곳에 두고 왔다고 여기는 걸까. 그렇더라도 그의 안부조차 묻지 않는 것은 너무 매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세원을 나서 백운당으로 가려는데 마침 소면통달이 달려왔다.
“전왕의 정보통에게서 급전이 왔소이다.”
초절정의 고수답지 않게 숨을 헐떡이며 소면통달이 첩지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내가 펴보기도 전에 내용을 알렸다.
“도왕이 정맹에 나타났다는구려.”
첩지엔 실제로 딱 그 한 문장만 쓰여 있었다.
“어찌 하려오?”
“가 봐야지요. 그에겐 받을 빚이 있잖습니까?”
“아! 그렇구려. 헌데 혼자 가려오? 무왕도 같이 가는 게 좋을 듯싶소만.”
나는 소면통달이 무엇을 우려하는지를 알았다. 작년 쌍십절에 나를 정맹에 보내며 진소월이 했던 걱정과 맥락을 같이 했다.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물론 전왕을 믿소.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도왕과 일전을 벌이다 양패구상이라도 당하면 그 이후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잖소? 그러니 무왕이 아니라면 광객과 내 아우들이라도…….”
나는 소면통달의 말을 끊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어르신. 염려 마십시오.”
“알겠소. 부디 무운을 빌겠소.”
“곧 돌아오겠습니다.”
신형을 솟구치려던 나는 도약을 위해 구부렸던 자세를 폈다.
“한 가지 여쭙고자 합니다만.”
“말씀해 보구려.”
“무왕 어르신이 구해온 아이를 보셨습니까?”
어인 일인지 소면통달은 긴장한 기색이었다.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긴 하오만, 우리가 그 아이의 보호를 무왕에게 떠넘긴 건 아니외다. 하도 무왕과 떨어지기 싫다고 울어대는 통에 무왕 본인이 자기가 맡겠다고 했소. 그이의 수련에 방해가 될 터이니 아이들 다루는 데 능숙한 여자들을 부려 그 아이를 달래려고 했으나 막무가내였소. 그렇더라도 조금만 시간을 주면 구슬렸을 터인데 무왕이 그냥 데리고 있겠다고 했소이다. 전왕이 마땅치 않아 하리라는 걸 알지만 우리로서는 최선을 다했다오. 하지만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무왕과 아이를 설득해…….”
“아닙니다, 어르신. 저는 단지 그 아이에 대한 어르신의 느낌을 묻고자 했을 뿐입니다.”
“느낌이라면, 어떤?”
“말 그대로입니다. 그 아이를 보고 어떤 느낌이 드셨습니까?”
“글쎄, 딱히 특별한 느낌은 없었던 것 같소만. 그저 곱상한 아이라는 인상 정도랄까. 약간 불쌍한 느낌도 들었고. 그런데 그 아이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소?”
“아닙니다. 무왕 어르신이 정을 주고 있는 듯싶어서 여쭤본 겁니다.”
“그랬구려. 나는 전왕이 그 아이를 무왕에게 붙여놓은 우리의 처사를 질책하려는 건지 알고 뜨끔했지 뭐요. 그나저나 생각해보니 전왕 말마따나 좀 뜻밖이구려. 사람들과의 접촉을 꺼려 허허벌판에서 홀로 생활하는 무왕이 심부름꾼으로도 쓸 수 없는 코흘리개를 곁에 두다니. 혹시……, 아, 아니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소면통달이 무슨 상상을 했을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무왕을 변호하고 싶었지만 나 자신도 확신할 수가 없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문득 나를 빤히 쳐다보던 아이의 순진무구한 눈망울과 도왕에게 보내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러자 또 다시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 아이의 무엇이 이런 기변을 일으키는 걸까.
‘너는 대체 누구냐?’
나는 마음속으로 아이에게 물었다. 물론 답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