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89
제188화 이제 집에 갑시다
처참하게 짓이겨진 수백 구의 시체들.
나를 물러서게 하려고 도왕이 날린 칼바람이 남긴 참상이었다. 관전하는 이들과의 거리가 이십여 장에 달했음에도 그의 일도는 순식간에 족히 오륙백 명은 되어 보이는 사상자를 만든 것이었다.
최초의 비명은 추종자들을 이끌지 못했다. 모두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두부를 잃고 쓰러진 도왕의 몸뚱이와 참혹하게 널브러진 시체들을 번갈아가며 바라볼 뿐이었다.
질식할 듯한 정적을 깨뜨린 건 내 욕설이었다.
“제길.”
철봉과 옥소를 품에 갈무리한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안면이 있는 자를 찾았다. 아직도 충격을 면상에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귀빈전주 옥주완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미덥지는 않았으나 그에게 뒤처리를 맡기기로 했다.
“저들을 돌봐주십시오.”
내가 시선을 맞추며 수습을 부탁하자 옥주완이 감격에 겨운 목소리를 토해냈다.
“아아, 이 옥 모, 전왕의 명을 받드오이다.”
그가 소리를 지르며 시체더미 쪽으로 달려가자 그제야 마비가 풀린 듯 빙산처럼 굳어있던 이만 군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도왕을 일별했다. 두부가 사라졌음에도 그의 우수는 칼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약간 울컥해졌다. 언젠가 나도 저런 꼴로 최후를 맞이하지 않을까. 숨이 끊어졌음에도 철봉과 옥소를 움켜쥐고 있지 않을까.
달갑지 않은 감상을 떨쳐버린 나는 옥주완에 이어 눈에 들어왔던 집법전주 소웅성에게 걸어갔다. 소웅성이 큰 체구를 웅크렸다. 위축된 기색이 확연했다.
“가기 전에 정맹의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잔뜩 긴장했음에도 소웅성은 신속하게 반응했다.
“알겠소이다. 즉시 원로회의를 소집하겠소.”
곁에 있던 수하들에게 명을 내린 소웅성이 나를 직접 태평전까지 안내하겠다며 나섰다. 길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굳이 그의 친절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정맹에서 호감을 느낀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원로회의는 나에 대한 찬사와 아부의 향연이었다.
오대세가의 명숙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앞 다투어 사마의 제왕들을 처단한 나의 위업을 칭송하고 내가 도왕을 상대로 현시한 신위에 경외감을 표했다. 그들은 한 달 전에도 나를 어려운 상전 모시듯 했지만 지금의 내 위상은 그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나는 어느새 무림지존의 위(位)에 올라있었다.
내가 용건을 꺼내기에 앞서 나와 도왕의 일전에서 희생된 이들에 대해 유감을 표하자 너도나도 내 잘못은 일 푼도 없다며 무도한 도왕을 성토하기 바빴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림맹 결성을 입에 올리며 나를 맹주로 추대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알아서 기는 원로들의 행태에 실소가 나왔으나 거만을 떨지 않도록 주의했다. 예의를 삶아먹었다는 괴선의 얼토당토않은 비난과 달리 나는 나름 겸양지덕을 갖춘 위인이었다. 아주 조금은.
나는 무림맹 창립의 건의를 일소에 붙였다. 그러면서 사벌과 마련의 영토는 장차 나와 명교가 장악할 것을 분명히 했다. 원로들은 찍소리도 못했다. 그러다 내가 삼대원칙, 즉 상호 불침과 불간섭, 그리고 상호 협조를 제시하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굴종과 복속을 자처했던 그들로서는 횡재한 기분이었을 터였다.
원로들의 기쁨은 사마 잔당의 토벌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하고 전과에 따른 전리품의 공유와 분배를 보장하자 절정에 달했다. 나는 구체적인 협의는 향후 내 동료들과 하도록 이르고는 태평전을 나섰다. 원로들은 양떼처럼 우르르 따라 나와 나를 배웅했다.
나는 바로 정맹을 떠나지 않고 얼마간 귀빈전에 머물렀다.
옥주완이 와서 사망자는 사백오십칠 명이고 부상을 당한 이들은 그 두 배 가까이 된다고 보고했다. 도왕이 휘두른 단 한 칼에 물경 일천오백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었다. 그는 본의 아니게 절대지경에 이른 무존의 위엄을 과시한 셈이었다.
나는 희생자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그리고 그들의 친인들에게 보상해주고 완치될 때까지 부상자들을 돌봐줄 것을 당부했다. 명령이 아니었음에도 옥주완은 존명을 받든다며 연신 굽실거렸다. 나는 그의 안내를 받아 급히 마련한 분향소에 갔다. 그러고는 죽은 이들의 명복을 빌며 성의를 표한 후 야천으로 비상했다. 다음 목적지는 우한이었다.
* * *
자정이 훌쩍 지난 시각이었으나 중립지대 최고의 향락도시인 우한은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불야성을 이룬 도시 상공을 가로지른 나는 서편의 장원으로 갔다. 한 평의 땅 값이 한 움큼의 금싸라기보다 비싸다는 널찍한 부지에 달랑 단층와옥 하나만 들어있었다. 솔숲을 병풍처럼 두른 마당에 떨어져 내린 나는 와옥의 문으로 걸어갔다. 기척을 내지 않았음에도 문이 활짝 열리더니 나현이 버선발로 달려 나왔다.
“어서 오시오, 전왕. 아니, 이제 무황(武皇)이라고 불러야 하겠구려.”
무황이라. 입에 쩍 달라붙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받을 수 없습니다, 대인.”
겸손의 발로가 아니었다. 무황의 명칭을 얻으려면 기존의 왕들을 압도하는 무력을 가져야 했다. 도왕을 삼 초 만에 날리긴 했으나 엄밀히 따졌을 때 내 무위는 그들을 압도하기는커녕 한 치도 능가하지 못했다. 검왕에겐 여전히 반 뼘은 처지는 수준이었다.
“그렇지 않소. 사마의 왕들을 참수한 데 이어 어제 오후엔 수만 군중의 눈앞에서 만도(萬刀)의 제왕까지 가볍게 날려버리지 않았소? 누가 무황의 자격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소? 실은 이미 정맹에서 그 별호가 발원되었다오. 며칠 내로 온 세상 사람들이 전왕을 무황으로 고쳐 부르게 될 게요.”
나는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어차피 조만간 검왕을 꺾음으로써 자격을 입증하면 그만이었다. 처음 전왕이란 별호를 얻었을 때도 실질적인 무위는 그에 한참 못 미쳤다. 하지만 결국 넉 달 남짓 만에 그 명칭에 부끄럽지 않은 무위에 도달하지 않았던가. 무황도 곧 그렇게 될 터였다.
“자, 들어가십시다. 술을 즐기진 않지만 오늘은 무황과 더불어 축배를 들어야겠소.”
나현은 그의 침소가 아닌 별실로 나를 들였다.
빈말이 아니었던 듯 탁자 위에 술병과 주기(酒器)가 차려져있었다. 내 손에는 너무 작은 술잔에 옥색의 액체를 따르며 혈접이 나현에게 잔소리를 했다.
“딱 한 잔 만이에요.”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뭐가 그리 좋은지 나현이 파안대소했다.
“크하하핫, 걱정 마오, 희매. 열 잔을 마셔도 끄떡없을 테니까. 자, 어서 드십시다, 무황.”
나는 나현과 잔을 부딪친 후 쭉 들이켰다. 순간 불덩이가 지나간 것처럼 목구멍이 화끈거렸다. 감미로운 주향과 달리 엄청난 독주였다. 술에 약한 듯 나현은 대번에 불콰해졌다.
면상을 대춧빛으로 물들인 나현이 전에 없이 격정을 쏟아냈다.
“이날이 이렇게 일찍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소. 이제야 하는 말인데 아예 오지 않으리라 비관하며 늘 두려움에 떨었다오. 기실 나는 처음 무황의 제안을 수락했을 때 몇 달 못 가 사벌의 촉수에 걸릴 것을 각오했더랬소. 아무리 보안을 유지하더라도 한계가 있는 법이고 그들도 바보는 아니니까. 헌데 목숨을 걸었던 보람이 있구려. 평생 숱한 고비를 넘어가며 나 자신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결정들을 내렸지만 무황과의 결연보다 훌륭했던 선택은 없었던 것 같소. 살아서 이런 날을 맞이하게 해주다니, 정말 고맙소.”
내가 화답하기도 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던 나현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혈접이 황급히 품에서 약통을 꺼내 단환 두 알을 그의 입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장심을 그의 등에 대고 내기를 불어넣었다. 잠시 후 원래의 혈색을 되찾은 나현이 내게 사과했다.
“미안하오, 무황. 추태를 부렸구려.”
“아닙니다, 대인. 부디 건강을 잘 챙기십시오. 앞으로 할 일이 태산이잖습니까?”
“명심하겠소. 하지만 나는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소. 진심이라오.”
“그런 말씀 마십시오.”
“허허, 알겠소. 그러나 혹시 내가 급사하더라도 염려하지 마시구려. 후사를 맡길 아이들을 키워두었다오. 다음번에 올 땐 그 아이들을 소개해 주리다. 아직 덜 여물긴 했으나 무황을 도와 태평성대를 일굴 수 있는 재목들이라 자부하오.”
“알겠습니다, 대인. 어떤 분들인지 만나보고 싶군요.”
“실망하지 않을 게요. 고르고 고른 인재들이니.”
나는 나현이 키웠다는 후계자들이 어떤 인물들일지 궁금했다. 하지만 나현은 그들에 대한 설명을 잇지 않고 자기 관심사를 꺼냈다.
“만사가 더 할 나위 없이 잘 풀렸지만 나는 도왕의 처신을 이해할 수가 없구려. 어째서 검총이나 비처에 숨어있지 않고 무황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까요? 배신자에겐 가차 없는 무황의 성정을 모르지 않았을 터인데.”
짐작하는 바가 있었으나 나는 시치미를 뗐다.
“글쎄요. 그에게 물어보지 않았으니 저도 그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나현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 더 캐묻지 않았다.
* * *
한 마디로 말하자면 도왕은 어리숙한 위인이었다. 낭왕을 두고 전략적 사고가 부족하다고 했던 진소월의 평은 도왕에게 적용되어야 마땅했다.
나현의 말마따나 도왕은 검총에 머물러있어야 했다. 그로서는 그게 유일한 살 길이었다. 물론 언젠가는 그곳 또한 사지로 변하겠지만 그랬다면 꽤 오랜 기간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을 터였다. 아무리 나라도 검왕과 그를 동시에 감당할 무위에 이르려면 최소한 일이 년은 필요로 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도왕이 좀 더 머리가 돌아가는 자였다면 보다 적극적인 타개책을 모색할 수도 있었다. 검왕을 설득한 후 그와 더불어 사마의 잔당들을 규합해 쳐들어왔다면 심히 난처했을 터였다. 그들이 검총의 검호들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전체적인 전력은 우리 쪽의 열세였다. 그 경우에 대비해 나는 정맹을 끌어들이는 한편 잠적한 삼사(三邪)와 육마(六魔)를 찾아내어 서둘러 제거할 작정이었다. 쉽지 않은 과제였다.
그런데 도왕이 검총을 나와 정맹에 나타난 덕분에 고민이 일거에 해소되었다. 고립된 그를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니었고 그리 되면 위협요소는 검왕밖에 남지 않을 것이었다. 이제 와서 검왕이 나를 잡겠다며 검총을 나설 가능성은 희박하니 나는 사실상 대륙 어디든 활개치고 다닐 수 있게 된 셈이었다. 검왕을 제외하면 천지간에 나를 어찌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그 시점에서는 그렇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아직 중원이라는 우물 밖에 도사린 강적들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 * *
도왕을 소재로 나현과 좀 더 사담을 나눈 후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낭왕의 시신은 수습하셨는지요?”
“마침 어제 저녁에 관이 도착했소. 지금 보시려오?”
“그래주시겠습니까?”
나현의 눈짓을 받은 혈접이 주렴을 걷고 별실을 나갔다. 잠시 후 그녀가 어깨에 큼직한 목관을 지고 다시 들어왔다. 갈대처럼 야위고 연약해 보이는 몸이었으나 장정 열 명이 들어도 쩔쩔 맬 법한 무거운 관을 들고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고 걸음걸이도 흔들림이 없었다.
혈접이 관을 바닥에 내려놓자 나는 뚜껑을 열었다. 전날 마충의 시신이 그러했듯 낭왕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완벽하게 복원되어 있었다. 얼핏 보면 그저 잠이 든 듯한 모습이었다. 양쪽 눈두덩이가 똑같은 것을 보니 내 광환에 파열되었던 우안에도 의안을 집어넣은 모양이었다.
서역의 복색을 갖춰 입은 낭왕의 가슴팍엔 그의 깃발이 곱게 쟁여져 있었다. 도경산에서 떨어뜨린 걸 나현이 회수해 관에 넣어둔 것이었다. 나는 거북이 등딱지 같은 질감의 깃발을 쓰다듬으며 낭왕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 보이는구려. 이제 집에 갑시다.”
내 말을 들은 나현이 당혹스러운 목소리를 토해냈다.
“설마 친히 저이를 천랑성에 데려다주려는 게요?”
“그럴까 합니다, 대인. 길을 아는 이를 구해주시길 바랍니다.”
“지금 당장 말이오?”
“부탁드립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현은 이내 혈접에게 지필묵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그러고는 그녀가 갖고 온 종이에 몇 자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