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9
제18화 나를 이용해 먹은 빚은 꼭 받아내겠소
“헙!”
내가 날린 뇌전에 헛바람을 들이켠 괴선이 우장의 화염으로 맞불을 놓았다. 그러면서 체면불구하고 땅바닥을 굴렀다. 목숨을 부지하려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광객도 사정이 비슷했다. 내가 천라도망을 펼치자 좌수를 내 쪽으로 할애하며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기의 그물에 걸리는 날엔 그의 몸뚱이가 몇 조각의 육편으로 분리될 터이기 때문이었다. 수강(手剛)을 발출함과 동시에 광객은 우측으로 튕겨나갔다.
내 개입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
첫째, 오륙 장이나 굴욕적인 나려타곤을 시전한 덕분에 괴선은 별다른 외상을 입지 않았다. 물론 후속공격을 가했더라면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테지만 나는 그럴 의사가 없었고 그럴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둘째, 광객은 괴선보다는 사정이 나빴다. 내 천라도망은 벗어났지만 그 여파의 가장자리에 걸린 탓에 전신에 칼자국을 새기고 말았다. 피투성이가 된 광객이 망연한 눈길로 그를 그 꼴로 만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광객에게서 사오 장 떨어진 땅바닥에 대(大)자로 뻗어있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일 터이나 속은 엉망진창이었다. 내 원력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두 노인의 진력을 동시에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신형을 추스른 괴선이 한 움큼 피를 토해내고는 비틀거리며 내게로 다가갔다. 역시 토혈로 속을 다스린 광객이 뒤질세라 걸음을 옮겼다. 거리가 더 가까웠기에 나에게 먼저 이른 것도 그였다. 하지만 말은 괴선이 빨랐다.
“무슨 짓이냐, 이놈!”
질문이 아니었다. 힐책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감사인사였다.
울화통이 치밀었다.
나를 초대한 괴선의 의도를 간파해서였다. 그는 결국 결정적인 순간 싸움을 말려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안평에서 우연히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역할을 할 다른 이를 물색했을 게 틀림없었다.
괴선에게 욕설을 퍼붓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입을 열면 욕과 함께 내장이 쏟아져 나올 터이기 때문이었다. 회(回)나 퇴(退)로써 빗겨내지 않고 초절정 극상의 고수들이 최후의 힘을 쥐어짠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내야 했으니 온전할 리가 없었다. 원력의 상당량을 보호막으로 두르지 않았더라면 내 몸은 괴선의 화염에 불덩이가 된 채 광객의 수강에 박살이 났을 터였다.
희한하게도 광객이 나만큼이나 살벌한 눈으로 괴선을 쏘아보았다.
“이 젊은이를 비난하지 마시오, 괴선. 모르겠소? 우리는 이 젊은이에게 구명지은을 입었소. 이 젊은이가 아니었다면 괴선이나 나나 여기 시체가 되어 뒹굴고 있을 거요.”
광객의 말이 사실임을 모를 리 없을 터임에도 괴선이 몽니를 부렸다.
“무슨 소리. 오히려 이놈 때문에 불필요한 위기에 처했는데. 이놈이 우리의 힘이 빠졌을 때 끼어들었다면 이렇게 중한 내상도 입지 않았을 걸세. 그러지 않고 마지막까지 방관하는 통에 자네나 나나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야 했지 않은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리고 이놈의 수가 조금만 어설펐더라면 우리 셋 다 황천길의 동반자가 되었을 터. 사정이 이러한데 어찌 구명지은을 입에 담는 겐가.”
광객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거야 말로 물에 빠진 이를 건져주었다니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하는 격이오.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일면식도 없었던 나를 구하기 위해 사지에 뛰어든 이 젊은이의 덕성과 용기에 깊은 감동을 받았소.”
바닥에 누운 나에게 눈을 돌린 광객이 비장한 음성을 토해냈다.
“짐승도 은혜를 입으면 죽을 때까지 잊지 않는다고 들었네. 하물며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럴 수 없는 법일세. 반드시 보답하겠네. 언제든 자네가 원할 때 나를 부르게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라도 상관없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기꺼이 바침세.”
듣고 있던 괴선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 차별하는 겐가, 태산? 나는 옛날 옛적에 살기등등한 성가의 칼잡이들로부터 자네를 구해주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이십 년이 넘도록 나한테는 이런 갸륵한 언사를 반의반 토막도 꺼내지 않았잖은가? 그뿐인가? 나를 이겨보겠다고 매번 아득바득 덤비지 않았던가? 생각해 보니 열 받는구먼. 이놈과 무관하게 이게 가당키나 한 소리냔 말이지.”
제삼자의 입장에서 나는 괴선의 심정에 공감이 갔다.
* * *
이십이 년 전 광양 성가의 도호들이 광객을 응징하기 위해 고양호로 몰려갔을 때 거기엔 불청객이 와 있었다. 불청객은 자신이 한 발 먼저 도착했으니 광객을 상대할 우선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발언을 묵살하고 광객을 징치하려던 여덟 도호는 다음 순간 안구가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다짜고짜 광객에게 달려든 불청객이 무지막지한 화염을 쏟아냈기 때문이었다.
광객의 응수도 만만치 않았다. 선연한 강기를 두른 그의 양수(兩手)는 무시무시한 태풍을 일으켰다.
양인의 무력에 충격을 받은 성가의 원로들은 넋 놓고 그들의 용호상박을 지켜보았다. 순식간에 사오십 초의 공방전을 벌인 불청객과 광객은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차단막이 떨어진 듯 뚝 갈라졌다.
태연하게 방금 전까지 격렬한 비무를 치렀던 광객을 등지고 선 불청객이 성가의 도호들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자기가 중재할 터이니 광객과의 악연을 정리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성가는 사단이 그들 후기지수의 경솔함과 무례함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정하고 광객은 그 이후 성가 체포대를 상대로 행한 과한 손속을 사과하는 선에서 매듭을 짓자는 불청객의 말에 팔인(八人)의 도호는 고민에 빠졌다. 그의 권고를 거절할 시엔 중립적인 태도를 거둘 수밖에 없다는 뒷말 때문이었다.
이는 광객의 편에 서서 성가에 맞서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고심 끝에 성가는 타협을 택했다.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으나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불청객과 광객은 공히 당시 도호들을 인솔했던 가주 성찬보다 윗길의 강자였다. 전면전을 벌인다면 그들을 처치할 수는 있을 테지만 성가도 그 대가로 최소한 서너 명은 목을 내주어야 할 터였다. 어쩌면 절반 이상이 월하의 고혼으로 화할 지도 몰랐다. 자존심을 살린답시고 결행하기엔 지나치게 큰 손실이었다.
불청객은 그의 제안을 수용한 성가의 덕과 아량을 칭송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앞으로 성가의 벗이 되겠노라고 떠벌였다.
광객의 시큰둥한 유감 표명을 전리품으로 받아든 도호들은 씁쓸히 발길을 돌렸다. 나중에 그날의 불청객이 선인(仙人)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에겐 괴선이라는 별호가 붙었다. 그리고 괴선은 그 후 고양호변에서 보였던 것과 유사한 행보를 이어가며 ‘강호 최고의 참견장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 * *
광객이 항변했다.
“경우가 다르지 않소? 그때 괴선은 나를 구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밥 먹기보다 좋아하는 오지랖을 떨려고 나선 것이었잖소? 나는 바보가 아니오. 실제로 그자들이 나를 합공했으면 발을 뺄 속셈이었음을 모를 줄 아오?”
내 예상과 달리 괴선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어쨌거나 내 중재 덕분에 자네는 목숨을 부지하지 않았는가?”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동기요.”
말문이 막힌 괴선이 애꿎은 나에게 분풀이를 했다.
“이게 다 네놈 때문이다. 싸움 구경에 정신이 팔린 네놈이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나나 태산이나 쓸데없이 몸을 상하지 않았더냐? 네놈도 그 꼴이고. 자업자득이니 나를 원망치 말거라, 이놈.”
괴선의 억지와 면상에 쏟아지는 그의 침에 분통이 터졌으나 나는 옴짝달싹 못했다. 내상 때문이 아니었다. 이 일시적 마비는 최대치의 원력을 무리하게 끌어올린 것의 후유증이었다.
고맙게도 광객이 나를 대신해 화를 내주었다.
“그게 생명의 은인에게 할 소리요? 저리 비키시오.”
괴선을 밀쳐낸 광객이 내 머리맡에 쪼그리고 앉았다.
“괜찮은가, 자네? 좌정할 수 있겠는가? 자네가 운공에 든 동안 내가 호위해 줌세.”
괴선이 뒤에서 구시렁거렸다.
“흥, 보면 모르는가? 순전히 엄살이지.”
나는 누운 채로 눈알을 굴려 괴선을 노려보았다.
“이놈 보게? 눈깔을 부라릴 힘이 있으면 냉큼 일어날 것이지 계속 엄살일세. 어디 내가 거들어주랴?”
괴선이 내 하초로 손을 뻗었다. 사타구니의 불룩한 부위에 손바닥이 닿았음에도 내가 꼼짝도 하지 않자 괴선도 당황했다.
“정말 탈이 난 게냐? 그냥 시늉이지? 사지육신 멀쩡하고 눈도 말똥말똥 뜨고 있으면서. 어디 말 좀 해 보거라, 이놈아.”
나는 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내 두툼한 입술을 빠져나온 것은 욕이 아니라 핏덩이였다. 광객이 다급히 내 머리를 받쳐 들었다.
“내상이 심한 모양이군, 젊은이. 힘들더라도 앉아서 운기조식을 취하는 게 어떻겠는가? 내가 지켜줌세.”
괴선이 끼어들었다.
“자네부터 챙기게나, 태산. 자네 꼴을 보라고. 이놈 칼질에 당해서 만신창이가 되지 않았는가. 아등바등 내 화염장을 받아내느라 내상도 상당할 테고. 당장 운공에 들지 않으면 몇 달은 고생할…….”
광객이 괴선의 말을 잘랐다.
“나는 상관 말고 괴선이나 스스로를 돌보시지. 지금 죽을 지경일 텐데.”
“웃기는 소리. 자네나 이놈 같은 알량한 무인들이나 아파 죽네, 어쩌네 하며 요란을 떨어대지 나 같은 선인은 고통 따위는 초월한지 오래라네. 더욱이 운공에 들지 않으면 내상이 악화되는 자네들과 달리 나는 호흡만으로 자연치유가 된다네. 그러니 괜한 고집 부리지 말고…….”
괴선이 말을 멈췄다. 한 고비를 넘긴 내가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었다.
“제 머리를 놔주십시오, 어르신.”
깜짝 놀란 광객이 얼른 내 요구에 응했다.
“드디어 입을 열었구나, 이놈.”
괴선이 장광설을 쏟아내기 전에 내가 선공했다.
“딱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으쇼. 나를 이용해 먹은 빚은 꼭 받아내겠소. 일 각 후에 봅시다. 그리고 어르신, 제 걱정 마시고 어서 운공에 드십시오. 저는 이 상태가 편합니다.”
쿨럭. 말을 마치자마자 나는 또 다시 한 덩이의 울혈을 뱉어냈다.
괴선과 광객이 내 요청에 차례로 반응을 보였다.
“빚? 무슨 빚? 그리고 일 각이라니? 설마 일 각이면 나하고 한판 벌일 만큼 회복이 될 거란 말이더냐?”
“그럴 수는 없네. 자네의 운신이 가능해진 걸 본 연후에 운공에 들겠네.”
입을 다문 나는 숫제 눈도 감아버렸다. 괴선이든 광객이든 피곤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전자는 얄미웠고 후자는 답답했다.
이상한 기척에 실눈을 떴다.
슬그머니 몸을 일으킨 괴선이 살금살금 걷고 있었다. 골짜기 입구를 향해.
광객이 나를 대신해 물었다.
“어디 가오, 괴선?”
“자네와 한바탕 어울렸더니 땀이 나지 않았는가. 바람 좀 쐬고 올 터이니 자네는 그 동안 그놈이나 잘 지키고 있게. 원하면 같이 가도 좋지만 자네까지 자리를 비웠다가 독수리나 까마귀 떼가 내려와 그놈을 물어뜯으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절벽 위에 늘어선 시커먼 그림자들을 올려다 본 광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여기 있겠소.”
“그럴 줄 알았네. 그럼 다녀옴세.”
고소하게도 광객이 괴선의 조문을 찔렀다.
“혹시 일 각 후에 빚을 받겠다는 이 젊은이가 두려워 도망치려는 게 아니오?”
괴선이 과도하게 흥분했다.
“뭐라? 나를 뭐로 보고. 무왕과 장왕 앞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던 나일세. 그런 내가 저런 애송이가 무서워 피할 것 같은가?”
“언제 그들을 상대했었소? 금시초문이오만.”
“자네가 과문한 건 내 탓이 아니지 않은가? 아무튼 터무니없는 오해 따윈 거두고 그 엄살쟁이나 돌보고 있게. 금방 돌아오겠네.”
괴선은 가지 못했다. 이번에 그를 잡은 이는 나였다.
“어딜 가쇼, 노인장. 나하고 볼 일이 남았잖소?”
“벌써 일 각이 지났더냐? 잠시 바람이나 쐬고 올 터이니 나 때문에 괜히 무리하지 말고 충분히 쉬려무나.”
“짐승 살 썩는 냄새밖에 없는 골짜기에서 무슨 바람을 쐰단 말이오?”
“그거야 네놈 알 바 아니고. 아무튼 나는 갔다 올 테니…….”
“정말 다시 올 거요?”
“이놈이! 내가 네놈을 피해 달아나기라도 한단 말이냐?”
“그야 알 수 없지.”
“안 되겠다. 당장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괴선은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워하고 있었다. 외람된 표현이지만 나는 허장성세를 부리는 노인이 귀여웠다. 그렇더라도 그를 봐 줄 생각은 지렁이 다리만큼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