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90
제189화 각자가 생각하는 최적의 경로를 말해보오들
혈접은 우한의 저자로 나가 오밀전(娛蜜殿)의 ‘장(張) 전주’에게 첩지를 전해주고 그가 길잡이를 구하기를 기다려 함께 장원으로 오라는 나현의 지시를 거부했다.
얼굴을 붉힌 나현이 언성을 높였으나 그녀는 그에게서 그렇게 오래 떨어질 수 없다며 계속 버텼다. 두 사람이 벌이는 실랑이가 흥미로웠으나 나는 관전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혈접의 편을 들어주었다. 나현의 상태를 염려해서였다. 흥분은 그의 심장에 해로웠다.
“부인의 말대로 다른 이에게 시키십시오. 화급을 다투는 일이 아니니 천천히 구해도 됩니다.”
혈접이 나에게 보일 듯 말 듯 감사의 목례를 했다. 내 요청을 수용했지만 분이 덜 풀린 듯 나현이 그녀를 꾸짖었다.
“무황의 면전에서 내 체면을 상하게 하다니. 차후 죄를 묻겠네.”
혈접은 태연했다.
“그러세요.”
나현이 요란스레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러고 산다오.”
“믿음직한 동반자를 두셔서 든든하시겠습니다.”
나는 혈접을 치켜세웠다. 그녀에 대한 호감을 표시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보기와는 다르다오. 이거 해라, 저거 하지 마라, 얼마나 잔소리가 심한지 모르오.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오.”
“자기 관리를 잘 하면 내가 왜 그러겠어요?”
나현의 불평에 고소를 지으며 반박하는 혈접을 보니 불현듯 진소월이 떠올랐다. 그녀 특유의 쓴웃음과 나의 안위를 염려하며 늘어놓던 잔소리가 새삼스레 그리웠다.
와옥 내의 수하에게 자신이 했어야 할 심부름을 전가하려고 혈접이 별실을 나가자 나현이 목소리를 낮췄다.
“딱 한 잔씩만 더 하십시다.”
내가 응답할 겨를을 주지 않고 혈접의 뾰족한 음성이 날아왔다.
“다 들려욧!”
나현이 울상을 지었다. 그의 새로운 면모가 다소 거북스러웠지만 너그럽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나현에게 정맹의 원로들과 합의한 바를 알렸다.
“그들은 멸사단(滅邪團)에 중점적으로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척마단(斥魔團)에도 일부 가세할 겁니다.”
전공에 따라 사마 무림에서 취한 이권을 일정 정도 분배해 주기로 했음을 덧붙이자 나현이 못마땅하다는 심사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좋아서 난리가 낫겠구려. 생색을 낼 수 있는 데다 생각지도 않은 떡고물이 떨어지게 생겼으니.”
“그러더군요.”
내 일방적인 처사에 불만을 표할 법도 했건만 나현은 그냥 넘어갔다.
“구민단(救民團)은 이미 구성에 착수했소. 이제 보다 박차를 가할 참이오. 전날 무황이 말했던 명교의 도움은 그다지 필요치 않을 듯싶소. 무황이 도왕마저 처리함으로써 대세가 완전히 우리 쪽으로 기울었으니 눈치를 보고 있던 각계의 유능한 재원들이 물밀 듯이 몰려올 게요. 당분간 그들 중 옥석을 가리는 작업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것 같구려.”
“이미 다 추려두지 않으셨습니까?”
“그래도 재삼재사 살피고 또 살펴야지요. 능력이 있다 해도 사욕에 눈이 먼 자들에겐 중책을 맡길 수 없소. 고양이에게 생선을 지키라는 격이 될 테니 말이오. 그런 의미에서 하루 속히 무황의 정인과 함께 하고 싶소만. 공헌으로 보나 재량으로 보나 그이가 전권을 쥐고 구민단과 해원사의 결성과 활동을 지휘하는 게 순리라고 생각하오.”
“적어도 반년은 그녀가 없다고 보시고 과업을 추진하시기 바랍니다.”
혈접이 소리도 없이 별실에 들어왔다. 그녀를 힐끔 쳐다본 나현이 넌지시 내 의중을 떠봤다.
“이제 사벌에 보복당할 위험이 사라졌으니 독의의 행방을 추적할 수 있을 것 같소만.”
“제가 따로 말씀 드릴 때까지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그보다 계양 총단에서 사라진 마인들의 소재는 파악하셨는지요?”
“부끄럽지만 아직 그들의 은신처를 알아내지 못했소. 마왕 사후 팔마류가 뿔뿔이 흩어진 건 확실하오. 수장을 잃은 검마류와 철마류는 동선이 잡혔는데 나머지는 오리무중이구려. 하지만 머지않아 찾아내리라 확신하오. 마련의 영토가 넓다 하나 척마단의 고수들이 본격적으로 휘젓고 다니면 반드시 꼬리가 잡힐 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구려.”
“알겠습니다. 참, 혹시 마뇌의 처소를 알게 되면 최우선적으로 제게 알려주십시오. 그리고 마인들의 소굴을 치다가 혹여 그를 발견하면 가급적 생포하란다고 척마단에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소?”
“그에게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게 뭔지 내가 알아도 되겠소?”
“실은…….”
나는 마련이 인질로 잡았던 도왕의 시동에 빠진 무왕의 근황과 그 아이를 접하고 내가 느꼈던 석연치 않은 감정에 대해 나현에게 들려주었다. 나현은 그 아이가 도천에 들어가 도왕을 시중들게 된 일이 우연의 산물이 아닐 거라는 내 추측에 동의했다. 단지 눈을 보는 것만으로 원초적인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아이는 십중팔구 도왕을 낚기 위해 마뇌가 보낸 미끼였을 터였다.
* * *
오밀전의 장 전주는 나현 이상으로 비만한 청년이었다. 서른 살이나 되었을까. 살이 너무 쪄서 세 사람이 들어가도 남을 듯한 장포가 몸에 꽉 끼었고 아직 삭풍이 이는 날씨임에도 삼복 날처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정수리 높이가 내 명치 어림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나보다 더 무거울 것 같았다.
왕 뚱보는 나에게 예를 차린답시고 별실 밖에서부터 기어서 들어왔다. 기립을 명했지만 혼자 힘으로는 일어설 수도 없어 혈접이 도와주어야 했다. 숙여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떨구고 안절부절못하던 뚱보가 경과를 보고하라는 나현의 명을 듣고는 의외로 침착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천랑성까지 곧장 전왕을 모시고 갈 길잡이를 찾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우선은 서역의 대도인 스앙카로 가셔서 그곳에서 따로 구하셔야 할 듯싶습니다. 죄송하오나 스앙카까지도 세 군데를 경유해야 합니다. 즉, 길잡이가 세 명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서천의 산맥들을 넘어 대막의 초입인 유관으로 가셔야 합니다. 그곳까지 모실 자를 밖에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유관에는 천벽(天壁)까지의 지리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잘 아는 길잡이들이 여럿 있습니다. 유관 진학원의 초(草) 원주에게 사막 최고의 길잡이를 알선해주도록 서신을 써놓았습니다. 천벽에 이르시면 상인들의 중간 집결지인 현소(玄所)에 들르십시오. 대부분 스앙카로 가거나 거기서 오는 자들이니 길을 알 것입니다.”
“고맙소. 큰 도움이 되었소.”내가 수고를 치하하자 뚱보는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뚱보가 붙여준 길잡이는 오십대의 민머리 사내였다. 눈이 찢어지고 하관이 얄팍해 교활한 느낌을 주었으나 길만 잘 안다면 인상 같은 건 상관없었다. 민머리 사내는 뚱보 이상으로 나를 어려워했다.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나는 왼쪽 어깨에 낭왕의 관을 올린 후 오른팔로는 민머리 사내를 껴안고 날아올랐다. 그러나 우한을 벗어나자마자 도로 나현의 장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늘에 낀 먹구름 때문이었다. 민머리 사내는 내공을 지니지 않은 범인이었기에 어둠 속에서 시야를 확보할 안력을 돋울 수가 없었다.
새벽녘까지 나현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때우다 해가 뜨자 다시 출발했다. 여전히 어두웠으나 지형지물을 식별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민머리 사내는 훌륭한 길잡이가 아니었다. 일단 그는 공중에서 지리를 가늠하는 데 익숙지 않았다. 몇 번이나 이정표를 삼을 봉우리를 헷갈리는 통에 경로를 재조정해야 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사내가 내 속도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적응하기는커녕 갈수록 겁을 먹었다. 비에 젖은 참새마냥 하도 떨어대는 통에 하마터면 공중에서 내팽개칠 뻔했다.
장원으로 다시 돌아가 새로운 길잡이를 물색할까 했지만 귀찮기도 하거니와 이미 칠팔백 리가량 날아온 상태였기에 그냥 계속 가기로 했다.
민머리 사내를 아주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서천은 팔 할이 산악지대라더니 보이는 곳은 죄다 험산준령이었다. 모양도 엇비슷했다. 그러니 그로서는 빠른 속도로 지나면서 정확히 분별하기가 어려웠을 터였다.
뚱보가 말하길 우한에서 일차 목적지인 유관까지는 직선거리로 채 이천 리가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정오 무렵이면 당도할 수 있을 거라 계산했다. 그러나 가속만 하면 비명을 지르며 토악질을 하는 민머리 사내를 배려해 속도를 줄인데다 갈지자 행보를 지속한 탓에 해가 떨어지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유관에 이르렀다.
그나마 구름이 개어 시야가 트여서 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소경이 되었을 민머리 사내에게 묶여 영락없이 첩첩산중에서 하루를 묵어야 했을 터였다. 민머리 사내가 멀리 보이는 불빛을 가리키며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저기가 유관일 듯싶습니다.’라고 했을 때는 나도 진이 빠져있었다.
유관은 황량한 곳이었다.
제대로 된 가옥들은 거의 없었고 도처에 천막들만 가득했다. 민머리 사내는 그나마 번듯한 단층 목조건물로 나를 이끌었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 낡은 현판에 진학(進學)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뚱보의 말을 상기해보면 원래는 진학원일 터인데 마지막 글자가 떨어져나간 모양이었다. 보아하니 일종의 객잔 같은데 어째서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 궁금했다.
민머리 사내가 문을 열고 나를 안으로 들이자 십여 쌍의 시선이 나에게 달라붙었다. 나도 그들을 일별했다. 여기저기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객들은 전부 상인들로 보였다. 무인 같은 느낌을 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두건을 두른 중년인이 민머리 사내에게 알은체를 했다.
“환락루의 고(高) 형이 아니오? 일전에 우한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소? 어째서 다시 돌아온 게요? 그리고 그 덩치는 누구요? 호위무사로 고용한 게요?”
민머리 사내가 사색이 되었다.
“마, 마, 말조심하게나, 초 원주. 이, 이, 이분은…….”
민머리 사내는 내 신분을 밝힐 필요가 없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두건 중년인이 돌연 바닥에 엎드리며 내 별호를 입에 올렸기 때문이었다.
“저, 전왕을 몰라 뵙고 주, 죽을죄를 졌사옵니다.”
일순 어리둥절해 하던 객들이 너도나도 경악성을 토해내고는 앞 다투어 오체투지 했다. 나는 초 원주란 자에게 걸어갔다. 그러고는 단도직입했다.
“천벽 현소까지 나를 안내할 길잡이를 구해줄 수 있소?”
부랴부랴 중년인에게 달려온 민머리 사내가 뚱보에게서 받았던 서신을 내밀었다. 재빨리 서신을 훑어본 중년인이 흙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분부를 받드옵니다. 일각만 주시면 최고의 길잡이들을 데려오겠사옵니다.”
“부탁하오.”
내 면전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 문까지 간 중년인이 냅다 밖으로 튀어나갔다. 그러고는 반각도 안 돼 세 명의 노인을 대동하고 돌아왔다.
길잡이들을 본 나는 실망했다. 다들 비실비실했고 늙었으며 겁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이래서야 제대로 안내할 수 있을까. 민머리 사내로 인해 진종일 애를 먹은 터인지라 나는 되도록 야무지고 빠릿빠릿한 이를 고르고 싶었다. 하지만 풍이라도 맞은 것처럼 벌벌 떨고 있는 양이 셋 모두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두건 중년인에게 다시 나가서 내 구미에 맞는 자를 물색해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일단 응수타진을 했다.
“초 원주에게 들었을 테지만 나는 천벽 현소까지 가고자 하오. 길을 안내해 줄 이는 한 명이면 족하니 각자가 생각하는 최적의 경로를 말해보오 들.”
서로 미루며 눈치를 보던 노인들이 내 독촉을 받고는 동시에 입을 열기 시작했다. 셋 다 심하게 더듬거렸고 공히 횡설수설했다.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그들을 보며 나는 모종의 결심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