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93
제192화 이제 진실을 알려주시지요
마치 일 년 반 전으로 되돌아 간 것 같았다.
행인의 대부분은 걸음을 멈추고 나를 흘깃거렸다. 내 정체를 알아보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내가 너무 커서 눈길을 준 것이었다. 이는 전날 무림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안평으로 향하며 일상적으로 접했던 대중의 반응과 동일했다.
나에게 달라붙었던 시선들은 그때 그랬던 것처럼 이내 떨어져나갔다. 나 같은 거한은 극히 드물지만 관심을 유지해야 할 정도의 구경거리는 아니었다. 마웅이라는 별호를 얻은 이후로는 어디를 가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기에 나는 이러한 상황이 낯설었다. 그러나 부정적인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딱지들을 떼버린 듯 시원한 기분이었다.
나는 모처럼 관찰자가 되어 편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축제일이라도 되는지 새벽임에도 이국적인 거리는 각양각색의 이족들로 붐볐다. 말로만 들었던 검은 피부의 장정들과 백분을 처바른 듯 허여멀건 한 피부의 여인들이 대로를 활보하고 있었다. 절반은 술에 취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떠들어대고 있었고 나머지 절반도 과한 흥분상태였다.
복색들도 희한했다. 하초에 손바닥만 한 천 조각 하나만 걸친 채 거의 나신으로 돌아다니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전신을 가리고 눈만 내놓은 이들도 눈에 띄었다. 면상에 기괴한 문신을 새긴 사내들도 많았다.
언뜻 무질서해보였으나 거리 어디에서도 시비나 소동이 일지 않았다. 혼란스럽기보다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늘 이런지 아니면 오늘이 특별한 날인지, 그도 아니면 이곳만 그런지 알 수 없었으나 나는 도시의 독특한 분위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 * *
이변이 발생한 것은 스앙카에 당도한 지 한 식경쯤 지난 후였다. 동녘에 아른거리는 미명이 임박한 일출을 알리고 있을 때 나는 중원 상인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는 동방별지(東方別地)를 찾고 있었다. 뚱보가 알려준 바에 따르면 그 구역은 스앙카 최대 환락가에 인접해있다고 했다.
귀에 익은 언어가 들려 그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뒤편에서 소요가 감지되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멀리 준마를 타고 달려오는 일군의 무사들이 보였다. 행인들은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길을 터주었다. 열 명 남짓한 기마병들은 모두 머리에 이리 대가리 가죽을 모자처럼 쓰고 있었다. 천랑성에서 나온 무인들일 터였다.
저자 중앙에 멈춰 선 기마대가 무어라 소리쳤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대꾸가 나왔다. 나는 위화감이 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내가 선 쪽으로 몰렸기 때문이었다.
히이이잉!
요란한 울음소리를 토해낸 말들이 내게로 질주해왔다. 선두에 선 자가 내 바로 앞에서 말을 세우더니 어눌한 중원어로 물었다.
“귀하 동방에서 전왕이냐?”
나는 수염이 면상의 삼분지이를 덮은 털보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그렇소만.”
길잡이를 물색할 수고를 덜고 천랑성으로 직행할 수 있을 듯했지만 나는 찜찜함을 금치 못했다.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서역 행을 극비리에 추진한 것은 아니지만 중원에서 정보가 날아왔을 리는 만무했다. 사막에서 보낸 며칠을 감안하더라도 전서구가 오갈 수 있는 조건이 아니니 시간 상 내 도래가 전해지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천벽의 현소가 출처일 듯싶지도 않았다. 가령 초절정의 무위를 지닌 고수가 건물 주변에 흩어진 막사들 중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내가 출발한 직후 지름길로 달려갔다고 해도 나보다 먼저 스앙카에 이르기는 어려울 터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한 가지였다. 이곳에 도착한 이후 거리의 누군가 나를 알아보고 천랑성의 무인들에게 보고한 것이었다.
나는 이 추론이 확실하다고 확신했지만 틀렸음을 깨닫는 데는 반각도 걸리지 않았다.
털보가 대장인 모양이었다. 그가 말에서 내리며 중원 식으로 내게 포권을 취하자 모두들 그를 따라했다.
“수라 온다. 기다려.”
이해 못할 말을 하더니 털보가 품에서 피리 같은 걸 꺼냈다. 그러더니 입에 물고 힘껏 불었다.
삐이익.
호각소리 같은 기음이 공기를 찢어발겼다. 내공을 실었는지 음량이 상당했다.
나는 관을 내려놓고서 털보에게 말을 걸었다.
“수라가 누구요?”
털보는 우물쭈물했다. 민감한 질문이라 답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중원어가 서툴기 때문인 듯싶었다. 답답했다. 동방별지에 가서 통역해 줄 상인을 구해오겠다고 하려는 찰나 무언가 내 기감을 자극했다. 나는 우측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검은 인영이 극상의 경신을 과시하며 허공을 뚫고 내개로 쇄도해왔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벼락이 내리꽂히듯 내 면전에 떨어져 내린 흑의인은 상당한 강자였다. 신법만으로도 만리풍에 못지않았지만 발산하는 기운이 한우경에 버금갈 정도였다. 천랑성에 이런 인물이 있었던가.
나이는 육십 전후로 보였는데 어딘가 낭왕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특징 없는 얼굴이었으나 안광은 화염을 뿜어낼 듯 강렬했다.
흑의인이 착지하자 털보를 비롯한 기마대의 무인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는 ‘타우치니 이하딴 수라!’라고 외쳤다.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나는 ‘수라’가 일종의 별호이리라 짐작했다.
신장이 오 척 어림에 불과한지라 턱을 한껏 쳐들어 나를 응시하던 흑의인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유창한 중원어가 흘러나왔다.
“어서 오시오, 전왕. 명성은 익히 들었소. 본국 방문을 환영하오. 나는 천랑성의 총수(摠帥)인 사울이라고 하오.”
나는 내 소개를 생략하고 불쑥 물었다.
“수라는 뭡니까?”
흑의인, 사울이 쓴웃음을 지었다.
“총수를 일컫는 이곳 말이오.”
별호가 아니라 직위였군.
“지난밤부터 동방별지에서 전왕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소. 어서 갑시다. 천랑성까지…….”
사울의 말에 깜짝 놀란 나는 그에게 방금 내뱉은 발언의 의미를 캐물으려 했다. 그러나 잠시 보류해야 했다. 내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대뜸 관을 들쳐 메더니 사울이 몸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황당했지만 짐작하는 바가 있었기에 나는 잠자코 그의 뒤를 따랐다.
* * *
내가 잘 따라가는 지 확인하지도 않고 쏜살같이 날아가던 사울이 스앙카를 벗어나자마자 깎아지른 절벽으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단애 끝에 서서 관을 내려놓더니 침중한 음성을 토해냈다.
“이 안을 봐도 되겠소?”
눈을 부라리는 양이 불허하면 나와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태세였다. 설마 내 무력을 모르는 걸까.
“그러십시오.”
내 허락이 떨어지자 심호흡을 한 사울이 관 뚜껑을 열었다. 일순 그의 면상이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관 위에 엎어져 낭왕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통곡했다. 나는 낭왕과 사울이 단순한 군신 관계 이상임을 알아차렸다. 사울의 비통한 울음소리는 내게 전날 한우경과 이모의 시신을 수습하며 느꼈던 슬픔과 아픔을 상기시켰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한참동안이나 울부짖던 사울이 거짓말처럼 울음을 뚝 그치더니 고개를 들었다.
“누가 그랬소?”
“검왕이란 자에게 당했습니다.”
사울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검왕? 어째서 사왕이나 마왕이 아니라 그가 나오는 거요?”
“그자가 그들과 연수했기 때문입니다.”
“성주는 사왕과 결별하고 그대와 손을 잡았다고 들었소. 헌데 그대는 성주가 적들에게 죽도록 방치하고 혼자 이리로 도망쳐 온 거요?”
나는 사울이 아직 중원의 최근 소식을 접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내가 마왕의 목을 날린 게 불과 이십 일 전이니 그럴 만했다.
“나는 도망쳐 온 게 아닙니다. 낭왕 어르신의 유해를 돌려드리려 왔을 뿐입니다. 그리고 나는 낭왕 어르신이 죽도록 방치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함께 적들과 싸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변을 당하신 것뿐입니다. 나로서도 낭왕 어르신의 죽음은 심히 유감입니다.”
내 말의 진위를 가리겠다는 듯 사울이 뚫어져라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무언의 심문이 불편하고 불쾌했다. 하지만 사울의 입장을 이해했기에 분기를 절제했다. 사울도 감정을 추슬렀는지 눈빛을 누그러뜨렸다.
“저간의 사정을 듣고 싶소.”
나는 사왕과 함께 명교에 쳐들어왔던 낭왕과 혈투를 벌였던 일부터 도경산의 전투에서 그가 전사할 때까지의 과정을 사울에게 들려주었다. 사왕이 낭왕을 내버려두고 혼자 도주한 장면에서는 욕설이 틀림없을 말을 내뱉으며 이를 갈던 사울이 불귀곡에서 낭왕이 나와 결맹에 합의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성주가 그 조건을 받아들였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이해가 안 가는구려. 설사 승리하더라도 얻는 게 사실상 전무한 셈인데?”
적잖이 언짢았다. 나와의 우정이 얼마다 대단한 전리품인지 모르다니. 사울에게 현재 중원 무림에서의 내 위상에 대해 알려주려다 내 낯짝에 금칠하는 꼴이 될 터인지라 자중했다.
“뭐, 나중엔 나를 사위나 손녀사위로 삼고 싶다는 말씀을 하긴 했습니다.”
“아! 성주는 어지간히 그대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구려. 그렇더라도 성주답지 않은 결정이었소.”
나는 사울이 여전히 반신반의하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를 납득시키기 위해 수고할 생각은 개구리 코딱지만큼도 없었다.
“나는 낭왕 어르신과 했던 약속을 지킬 것입니다. 앞으로 천랑성이 어떤 제약도 없이 중원과 자유로이 교류할 권리를 보장하겠습니다. 그리고 천랑성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물심양면으로 돕겠습니다.”
사울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이미 중원의 주인이 된 것처럼 말하는구려.”
“그리 보더라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무슨 소리요?”
“적들 중 남아있는 자는 검왕 뿐입니다.”
“어째서? 자중지란이라도 일어난 게요?”
“아닙니다. 근래 마왕과 사왕, 그리고 도왕이 차례로 내 손에 목이 날아갔습니다. 아, 도왕은 머리가 터졌다고 해야겠군요.”
사울의 안면에 경련이 일었다. 흐뭇한 반응이었다.
“설마 그대의 무력이 그들을 능가한다는 거요?”
“그러니 그렇게 되지 않았겠습니까? 검왕도 조만간 처리할 작정입니다. 낭왕 어르신의 원수를 갚아야지요.”
사울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사울이 침묵하는 틈을 타 나는 목구멍에 걸려있던 질문을 토해냈다.
“아까 어젯밤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는데, 잘못 말한 거 아닙니까?”
아직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는지 사울은 답을 주지 않고 계속 나를 멍하니 올려다 볼뿐이었다.
“나는 새벽녘에 스앙카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니 그때서야 내가 저자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았을 텐데요.”
상념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흔들더니 사울이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그렇지 않소. 어젯밤부터 그대를 기다린 게 맞소. 나는 그대가 동방별지로 올 줄 알고 거기에 있었더랬소. 그래도 혹시 몰라 스앙카 전역에 수하들을 깔아두었는데 아리스가에서 그대를 찾았다는 신호가 오더구려. 그래서 그리로 달려간 게요.”
도무지 이해난망이었다. 어젯밤이면 천벽의 현소에 있지 않았던가. 그 전엔 사막을 횡단하고 있었으니 천랑성이 내 도래를 사전에 알 방도는 전혀 없었다. 나는 내 의문을 솔직히 밝혔다.
“미안하지만 믿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내가 올 줄 알았단 말입니까? 설혹 누군가 나를 발견하고 북이나 징 같은 도구를 이용해 천랑성에 연락을 취했더라도 소리가 났을 것 아닙니까?”
사울이 고소를 지었다.
“우리에겐 따로 방법이 있소.”
그러니까 그 방법이 뭐냐고?
내 표정에서 속내를 읽었을 터임에도 사울은 뜸을 들였다. 그러더니 엉뚱한 소리를 했다.
“루아에 올라 허공에 이름을 쓴 거한!”
일순 소름이 돋았다. 루아는 필히 천왕산을 가리킬 터였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더라도, 아니 그렇다면 더더욱 이해불가였다. 내가 천왕산에서 그 행위를 한 게 바로 어젯밤이었다. 설령 누군가 숨어서 나를 보고 있다가 천랑성에 알렸다고 해도 그 시점에서는 스앙카에서 기다릴 수 없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적으로 불가능했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행인들 중 누군가, 아마도 중원에서 왔을 상인이 나를 알아보고는 천랑성의 무인들에게 알린 게 진상일 터였다. 하지만 천왕산에서의 일은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이제 진실을 알려주시지요?”
내가 정색하며 압박했음에도 사울은 시치미를 뗐다.
“한 치의 어김도 없는 진실이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