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94
제193화 동서남북의 여자들이라뇨?
화가 났지만 참았다. 사울이 나를 놀리는 게 아님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찌증보다는 인내가 필요한 때였다. 하여 나는 차근차근 풀어나가기로 했다.
“루아에서 나를 본 사람이 누굽니까?”
“성모(聖母)라오.”
성모? 여자란 말인가?
“그녀는 어디서 나를 보았습니까? 산정엔 아무도 없었는데.”
천왕산 인근의 봉우리에서 보았을 리는 만무했다. 천왕산보다 낮아서가 아니라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이었다. 절대지경의 무존이라도 내 동작을 살피는 건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이름을 쓰고 있다는 걸 무슨 수로 알았겠는가.
그러니 나를 지켜본 여자는 산정 주변에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무영과 같은 은신공의 대가라면 내 기감에 걸리지 않고 숨어있는 게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성모는 그대를 꿈에서 보았다오.”
사울의 대답에 일순 맥이 풀렸다. 이건 또 무슨 전개인가.
“이상하게 여길 줄 아오. 하지만 진실이라오. 성모는 그대를 꿈에서 보았고 스앙카로 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소. 그래서 그대를 마중하도록 나를 내보낸 거라오.”
“그녀가 언제 그런 꿈을 꿨습니까?”
“그건 나도 모르오. 하지만 그대를 마중하라는 명을 받은 게 어제 해질 무렵이니 그보다는 앞서서 꾸지 않았겠소?”
다시 한 번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면 내가 천왕산에 오르기 전에 미래를 보았다는 뜻이 아닌가.
“성모가 묘사하는 거한의 모습이 어딘가 익숙하게 들려 그대의 용모파기를 보여드렸더니 맞다고 하십디다. 성주가 그대와 연수했음을 알고 있었기에 서둘러 성을 나왔소. 그리고 아리스가에서 그대 옆에 있는 관을 보고는 간이 철렁 내려앉았소. 수하들 앞이라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불길한 예감이 눈앞이 캄캄해지더구려. 그랬는데 정말로…….”
사울이 말을 잇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가 다시 오열할 기미인지라 나는 얼른 예방조치를 취했다.
“성모란 분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미래를 볼 수 있습니까?”
“미래만이 아니라 과거도 모두 알고 계신 분이라오. 수천 년 동안 환생을 거듭하면서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지켜보셨으니. 하지만 성모로서도 예지몽을 꾸는 건 특별한 경우요. 엄청난 재난이 닥칠 거라는 징조이기도 하고. 지난번에는 해일을 예언하셨소. 벌써 팔 년이 지났구려. 미리 안 덕분에 동해안의 백성들을 피신시켜 참사를 막을 수 있었소. 반나절만 조치가 늦었어도 수십만 명이 희생되었을 게요.”
소름의 연속이었다.
“엄청난 일이군요. 그건 그렇고 내가 재난이란 말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소? 그랬다면 성모가 그대를 귀인이라 칭하지 않았을 게요. 자, 이제 그만 갑시다.”
원래는 낭왕의 시신을 건네주는 과제를 완수했으니 중원으로 돌아갈 작정이었으나 나는 생각을 바꿔 성모라는 여인을 만나보기로 했다. 이렇게 신기한 얘기를 들었는데 어떻게 안 보고 갈 수 있겠는가.
* * *
반 시진 후 우리는 일천 장 높이의 바위산에 이르렀다.
천랑성은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다. 암벽을 깎고 다듬어 만든 석조건물들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중원에는 난공불락의 요새이자 북해 빙궁과 더불어 천하제일비처를 다투는 절지로 알려진 천랑성은 당대 서역의 지배자였다. 그들이 통치하는 영토는 중원대륙만큼이나 광대하다고 했다.
변방의 일개 패자(霸者)에 불과했던 천랑성이 서역 전체를 일통할 수 있었던 건 낭왕이라는 절대강자를 보유한 덕분이었다. 낭왕은 일당백이 아니라 일당백만의 위용을 과시하며 서역을 분할한 일곱 왕국을 차례로 굴복시켰다.
단 일 년 만에 정복전쟁을 마무리 지은 낭왕이 중원에 눈독을 들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막을 건너자마자 마왕에게 가로막혀 발길을 돌려야 했다. 중원에 마왕 급의 무존(武尊)들이 여섯이나 도사리고 있었기에 온 천하를 발아래 두겠다던 낭왕의 야망은 백일몽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왕을 고금제일인을 넘어 영세제일인으로 추앙했던 서역 신민의 입장에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진소월에게 들었던 천랑성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들을 떠올리며 나는 사울을 따라 천길 벼랑을 올랐다. 경공을 구사하는 무인들이 등장하기 이전이라면 아무리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어도 공략이 불가능했을 터였다.
계단을 두고 수직으로 비상한 사울은 초절정 극상의 고수답게 몇 번의 발돋움만으로 천랑성에 이르렀다. 나는 물론 도약을 위한 디딤판이 필요 없었다.
사울과 함께 석굴입구에 올라서니 삼면의 동굴에서 삼십 명가량의 무인들이 쏟아져 나와 반원진의 형태를 만들며 우리 앞을 둘러쌌다. 모두들 상당한 수준의 고수들이었다. 사울이 그들에게 뭐라고 말을 하자 중간에 길이 열렸다.
“갑시다.”
나는 관을 진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사울을 쫓아 석굴 안으로 들어섰다. 무인들은 우리를 따르지 않고 뒤에 남았다.
바닥과 양편의 벽들엔 인공의 흔적이 약여했지만 애초에는 천연 동굴이었던 듯 천장에 고드름 같은 종유석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통로를 이십여 장 걸어가니 희한하게도 햇볕이 스며드는 타원형의 공간이 나왔다. 원의 중심에는 나이를 분별하기 어려운 백발노파가 가부좌를 틀고 꼿꼿하게 앉아있었다.
작아도 너무 작았다.
주름으로 덮인 얼굴과 손등만 아니라면 서너 살 여아라고 해도 믿었을 터였다. 일어서도 이 척이 안 될 것 같았다. 관을 내려놓으며 사울이 바닥에 엎드렸다. 똑같은 예를 차려야 할 듯싶었지만 그냥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사울은 나에게 눈치를 주지 않고 노파에게 보고했다.
“말씀하신 귀인을 모셔왔습니다, 오라.”
“수고했어요, 수라. 그런데 그 관은 뭔가요?”
사울의 침중한 음성이 동굴을 울렸다.
“성주의 시신입니다.”
놀랍게도 노파는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그래요? 어쩌다가?”
“동방의 검왕이란 자에게 변을 당했다고 합니다.”
“저런. 딱해라.”
말과는 달리 노파는 사울의 약을 올리듯 싱글벙글했다.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수라. 파이는 살업이 산을 이루지만 공덕도 그만 못지않으니 무간지옥에 떨어지진 않았을 거예요. 설사 그랬다고 해도 자업자득이니 어쩌겠어요? 그러니 파이의 혼이 어찌 되든 신경 쓰지 말고 그의 운명에 맡겨요.”
기가 막혔다. 저걸 위로랍시고 하는 건가? 과연 사울은 떫은 감을 씹은 표정이었다.
“아무튼 수고했어요. 이제 나가 봐요. 할 일이 많잖아요?”
차라리 쫓겨나서 다행이라는 듯 사울이 얼른 다시 관을 지고는 나를 일별도 하지 않고 부리나케 동굴을 나갔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졌지만 노파는 생글거리며 나를 빤히 쳐다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저는 중원에서 온 전충이라고 합니다.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는데요?”
“나는 할머니가 아니에요, 귀인. 오라라고 불러요. 그리고 좀 앉아 줄래요. 올려다보려니 목이 아프네요.”
내가 엉덩이를 붙이자 노파가 더 뒤로 물렸다. 물러서라는 노파의 손짓이 계속되는 바람에 결국 나는 그녀에게서 이십 보나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한결 낫군요. 근데 실제로 보니 좀 괴상하긴 해도 사람처럼 생겼네요. 안심했어요. 꿈에서는 유부에서 튀어나온 악귀 같았거든요. 너무 징그럽고 무서워요 오줌을 지렸지 뭐에요. 호호, 아이, 창피해라.”
혹시 이 할망구는 괴선의 누나가 아닐까. 목전의 노파가 예의를 삶아먹고는 똥으로 배출해버린 족속임을 간파한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를 부른 용건을 재차 물으려는데 노파가 선수를 쳤다.
“관상을 보니 여간 신나는 삶을 살아온 게 아니겠어요. 어디, 들을 수 있을까요?”
“별로 재미없을 겁니다. 그보다 할머니, 아니 오라의 인생이나 들려주시는 게 어떨는지요? 수천 년을 살았다면서요?”
“어머, 수라가 쓸데없는 소리를 한 모양이군요. 근데 어떡하나? 내 인생사를 읊으려면 백일로도 부족할 텐데.”
“진짜 환생을 거듭했습니까?”
“그렇게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쏘아보면서 물으면, 실례에요.”
“불신이라뇨? 호기심을 착각하신 거 아닙니까?”
“그런가? 서글프네요. 갈 때가 됐나 봐요. 젊었을 때는 누구든 보기만 하면 속내는 물론이고 전생과 현생과 내생도 단박에 꿰뚫어보았는데.”
“…….”
“하나도 믿지 않는군요. 근데 거짓말인지 어떻게 알았나요? 여기 사람들은 다 속는데? 어머? 어딜 가려고요?”
“저는 바쁜 사람입니다, 할머니. 특별히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성질도 급해라. 알겠어요. 앉아요. 내가 재미 난 이야기를 해 줄 게요.”
노파의 말을 무시하고 동굴을 나갈까 하다가 더 들어보기로 했다. 엉터리 사기꾼 같았지만 어쨌거나 천왕산에서의 일을 미리 본 건 기이하지 않은가.
* * *
옛날이야기예요. 아주, 아주 오래된 이야기죠. 최초의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일이니까.
태곳적에 지상에는 사람의 심장을 주식으로 삼는 무시무시한 마귀들이 득시글거렸어요. 그들의 우두머리는 아리따운 여자였어요. 마귀들의 여왕이니 동방 식으로 표현하면 마후(魔后)라고 할까요.
방금 아리땁다고 했지만 마후는 그냥 아름다운 정도가 아니었어요. 그녀의 미모는 인세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죠. 남녀와 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든 그녀를 보기만 하면 홀렸대요. 그러고는 너도나도 자기 심장을 바쳤다더군요.
그녀의 마력은 하찮은 인간들에게만 통한 게 아니었어요. 마귀들을 소탕하기 위해 천군을 이끌고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神將)도 그녀에게 반했어요. 그녀의 목을 자르고 심장을 터뜨려 영원한 죽음을 선사해야 했지만 그녀를 사랑하게 된 신장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어요. 그렇다고 그녀를 살려두자니 천신께서 공을 들여 창조한 인세가 멸망하게 될 터라 그럴 수도 없었죠.
고민 끝에 신장은 자신을 희생해 그녀를 묶었어요. 스스로 뇌옥으로 화해 그녀를 가둔 거죠. 신장의 신력에 눌려 옴짝달싹 못하게 된 마후는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어요. 수천 년 동안이나. 어쩌면 일만 년도 넘었을지 몰라요. 그래도 소용이 없었어요. 아이, 고소해라.
어때요? 재미나지 않나요?
* * *
나는 나의 인내심에 감탄했다. 이런 유치찬란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다니.
몸을 일으키며 나는 노파에게 배운 사람의 예의를 보였다.
“뭐, 그럭저럭 심심풀이는 됐군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예상과 달리 노파는 나를 잡지 않고 동굴을 나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수작에 말려드는 걸 알았지만 나는 결국 모퉁이에서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 얘기를 하신 이유는 뭡니까? 그 마녀가 봉인을 풀고 현세에 나타나기라도 한다는 겁니까?”
“그야 나도 모르지요.”
아니, 이 할망구가.
“실은 나도 답답하다오. 어제 귀인을 꿈에서 보고 깬 직후 난데없이 그 이야기가 떠오르지 뭐에요. 대체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요?”
“그걸 저한테 물으시면 어쩝니까?”
“그럼 누구한테 묻나요?”
노파의 반문에 나는 더 이상 그녀와 말을 섞을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거두절미하고 작별을 고했다.
“안녕히 계세요.”
‘잘 가요’나 ‘어딜 가요?’라는 응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노파가 뚱딴지같은 말을 꺼냈다.
“동서남북의 여자들.”
이건 또 무슨 수작인가? 마지막으로 속는 셈치고 나는 노파가 던진 미끼를 물었다.
“동서남북의 여자들이라뇨?”
“뭐가요?”
“방금 할머니가 말했잖습니까?”
“내가요? 그런가? 나도 늙었나 봐요. 금방 말해놓고도 까먹으니. 근데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그건 그렇고 왜 나를 할머니라고 부르는 거예요. 오라라고 했잖아요.”
이런 제길. 이제 보니 노망난 할망구였어. 그런데 대체 천왕산의 일은 어떻게 안 거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지만 노파를 더 상대하다간 열통이 터질 것 같아서 나는 동굴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