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95
제194화 이제 내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석굴 입구로 나오자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무인 둘이 나를 맞았다. 그 중 왼편에 선 자가 불명료한 발음으로 말했다.
“따다오시오(따라오시오).”
입구의 절벽에서 뛰어내리면 혼자서도 스앙카를 찾아갈 수 있을 듯싶었지만 나는 요청에 응하기로 했다. 사울에게 간다는 얘기는 하고 떠나야 할 것이었다.
나에게 말을 걸었던 무인이 사람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나가기에도 좁아 보이는 통로로 나를 이끌었다. 나머지 하나가 내 뒤를 쫓았다. 나는 그들의 배치가 불편했지만 묵인하기로 했다.
통로는 높낮이의 변화도 심했고 몹시 구불구불했다. 갈림길도 수시로 나왔다. 게다가 길었다. 한참을 가도 출구가 나오지 않자 나는 앞서가는 자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하오?”
무인은 묵묵부답했다. 재차 물으려는 데 뒤에서 답을 주었다.
“다 와또(왔소).”
거짓말이었다. 그 말이 나오고도 족히 한 식경이 지나서야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도중에 몇 차례나 따지려 했지만 꾹 참았다. 낭왕을 배려해서였다. 되도록 소란을 피우지 않고 점잖게 굴다가 조용히 떠날 작정이었다.
통로 밖은 광장이었다. 바위산 내부의 공간일 터임에도 엄청나게 넓었다. 전날 친인들과 피신했던 비처 지하광장의 두 배는 될 듯싶었다. 하지만 일만 평에 달하는 광장은 텅 비어있었다. 곳곳에 밝혀둔 등불의 그림자만 일렁거려 괴기스러워 보였다.
나를 안내하는 무인들은 넉넉한 공간으로 나가고도 내 전후 위치를 고수했다. 다소 언짢았지만 그들의 방식이라 여기고 묵인했다. 하지만 광장을 가로질러 또 다른 통로에 들어섰을 때는 더 이상 인내심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요?”
이번에도 뒤에 선 자가 답했다.
“다 와또.”
동문서답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어디로 가는지 물었잖소?”
앞에 있는 자가 내 말을 받았다.
“따다오시오.”
약을 올리듯 뒤에 있던 자가 덧붙였다.
“다 와또.”
나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이 무인들은 내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둘째, 이들은 내 말도 이해하지 못했다. 중원어를 모른다는 뜻이었다.
사울의 엉성한 처사에 짜증이 일었지만 쌍둥이에게 분풀이를 하지는 않았다. 명령을 수행할 뿐일 터인데 그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두 번째 통로는 첫 번째 것보다 더 길었다. 그래서 석실에 도착했을 즈음엔 울화통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냥 석굴 입구에서 기다렸다가 작별인사를 나눌 것이지 뭐 하러 여기까지 데려왔단 말인가. 못 해도 반 시진은 걸었을 터였다.
석실엔 두 사람이 있었다. 하나는 사울이었고 다른 하나는 머리통이 기형적으로 큰 노인이었다. 둘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있었는데 내가 들어서는 걸 보고도 일어서지 않고 고개만 돌렸을 뿐이었다. 무인들이 사울이 아니라 대두노인에게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쏼라쏼라 보고하더니 석실을 나갔다. 그렇다면 저 노인이 나를 골탕 먹인 원흉인가.
“어서 오오, 전왕.”
나는 사울의 인사를 퉁명스럽게 받았다.
“왜 불렀습니까?”
쓴웃음을 짓는 사울을 대신해 노인이 내 질문에 답했다.
“그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소.”
형식적으로는 정확한 답변이었으나 내용적으로는 불충분했다. 그 점을 인지했는지 노인이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었다.
“불편을 끼쳐드려 미안하오. 중대사를 의논해야 하는데 그곳은 보안을 보장할 수 없이 부득이 이곳으로 모셨소. 양해 부탁드리오.”
납득하기 어려운 해명이었으나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다. 노인이 말귀를 알아듣는 위인이라 판단해서였다.
착석을 권하며 노인이 자기소개를 했다.
“여기 앉으시구려. 나는 이곳의 이탄이라오. 그대의 땅에서 부르는 식으로 하자면 재상(宰相)쯤 될 게요.”
나는 노인이 가리키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로써 세 사람이 삼각형을 이루었다. 누구와 눈을 맞춰야 할지 헷갈리는데 노인이 내 상대가 자기임을 알렸다.
“수라에게서 얘기는 들었소. 번거롭지만 내게도 들려주시겠소?”
노망난 할망구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물을 거라 예상했던지라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그런 데다 같은 내용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기 귀찮아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더하고 뺄 게 없습니다.”
내 거절에도 불쾌감을 내색하지 않고 노인이 재차 청했다.
“그렇더라도 그대에게 직접 듣고 싶구려. 들으면서 몇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소. 부탁하오.”
노인의 정중한 언사에 마지못해 낭왕과 인연을 맺었던 과정을 되풀이했다. 도중에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경청한 이후에야 노인이 질문공세를 시작했다.
“사왕은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서 건너는 신중한 성정이라고 들었소. 그가 성주와 단 둘이서 명교를 쳐들어갔을 때는 최소한 구 할의 승산을 확신했기 때문일 터인데 어째서 싸우다 말고 도망친 게요?”
나는 노인이 무엇을 의심하는지 알았다. 하지만 구질구질하게 설명하지 않고 핵심만 밝혔다.
“그가 겁쟁이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여전히 석연치 않구려. 실례되는 말인 줄 아오나 그대의 무위는 다른 왕들에 비해 처지는 것으로 알고 있소. 거기에 장왕은 정신에 문제가 있어 정상이 아니라고 들었소. 하면 전력 차가 상당하잖소? 설사 명교의 삼대호법과 광객이 그대의 편에 가세했다고 하더라도 변수가 되기는 어려웠을 터인데.”
나는 노인의 예리한 분석력에 감탄했다. 그래서 성의를 보이기로 했다.
“물론 우리는 꽤 고전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실전에 특히 강한 유형입니다. 아! 낭왕 어르신도 그 방면으로는 나와 동류더군요. 아무튼 내가 실전에서 유독 강미를 발하는 데 반해 사왕은 정반대의 유형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대로 생사를 다투는 혈전에서는 간이 졸아드는 겁쟁이지요. 더욱이 그가 제 보신을 우선시한 반면 나와 장왕 어르신은 서로를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던졌습니다. 그것이 차이를 낳았고 승패를 갈랐지요. 사왕이 도주하는 바람에 낭왕 어르신도 퇴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한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나와 장왕 어르신을 감당하긴 어려우니까요. 그렇게 된 겁니다.”
“그대와 장왕은 다치지 않았단 말이오?”
“아닙니다. 나는 낭왕 어르신 이상의 중상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장왕 어르신의 내-외상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수준이었고 나도 전투불능에 처한 건 아니라서 낭왕 어르신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겁니다. 기껏해야 동귀어진이 최선이었을 테니까요.”
“그랬구려.”
잠자코 듣고만 있던 사울이 끼어들었다.
“내가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최근에 그대가 거두었다는 전과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성주와 초전을 치르고 채 두 달도 지나지 않아 세 명의 왕을 홀로 해치웠다는 말이잖소? 그대의 주장대로 사왕이 겁쟁이라고 하더라도 마왕과 도왕은 어찌 된 게요? 그들도 실전에 약한 부류였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내 손에 죽은 건 단지 내가 그들보다 강했기 때문입니다.”
대두 노인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 말인즉슨 그대의 무위가 근래 급성장했다는 뜻이오? 기존의 왕들을 능가할 만큼?”
“그렇습니다. 하지만 충고컨대 이곳의 기관 장치로 내 말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닥과 뒷벽에서 뭐가 튀어나오건 나를 어찌할 수 없을 터인데다 그 경우엔 두 분을 봐드릴 수 없습니다.”
노인은 안면이 굳고 사울의 낯짝엔 경련이 일었다. 신음성을 흘린 노인이 억지미소를 그렸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을 뿐, 맹세컨대 그대를 해할 의도는 추호도 없었소.”
씨알도 먹히지 않을 변명이었다. 사울은 사내답게 사과했다.
“미안하오. 솔직히 우리로서는 그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웠소. 그래서……, 아니오. 다 구차스러운 변명일 뿐. 헌데 그대의 무력을 직접 볼 수 있겠소?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나는 사울의 말을 끊었다.
“알겠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보여드리면 되겠습니까?”
백문이 불여일견이었다. 실력을 현시하면 양인의 의문이 불식될 터였다. 그들이 아니라 낭왕을 위해 그 정도의 수고는 해 줄 참이었다.
* * *
두 사람이 석실의 반대편 통로를 통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일천 평가량 되는 거대한 석굴이었다. 높이도 십여 장에 달했다. 광장도 그랬지만 바위산 내부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나는 이 석굴이 낭왕의 수련장이었음을 알아차렸다. 사방의 벽에 그의 깃발이 할퀸 자국이 가득했다.
대두 노인을 입구에 대기시킨 사울이 석굴 중앙으로 향하더니 칼처럼 허리에 차고 있던 한 자 반 길이의 단창을 꺼냈다. 그러고는 묵묵히 나를 응시했다. 나는 그에게로 걸어가 그의 오륙 장 전면에 섰다. 대치 상태가 길어졌음에도 내가 무기를 뽑지 않고 팔을 늘어뜨리고 있자 사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조심하구려. 성주도 가끔 내 창에 피를 흘렸다오.”
나에게 경고성을 발한 사울이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라 내게로 쇄도했다. 강기를 뻗어낸 그의 단창은 어느새 장창으로 변해있었다.
나는 신법만으로 사울을 상대했다.
내가 피하기만 할 뿐 반격을 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하자 자존심이 상한 듯 사울의 공격이 한층 사나워졌다. 짐작했던 대로 그는 초절정 극상 이상의 무위에 이른 강호였다. 한우경과 겨룬다면 팽팽한 승부가 될 터였다.
나는 사울의 파상공세를 반경 칠팔 장의 원 안에서 버텨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두 달 전의 나였다면 치명상은 허용하지 않았을 지라도 이삼십 초 만에 작지 않은 외상을 입었을 것이었다. 그만큼 사울의 창법은 매서웠다.
하지만 일백 초가 지나도록 사울은 내 털끝도 건드리지 못했다. 내 신법이 절정에 달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사울의 수법이 익숙했다. 그는 낭왕과 동일한 절기들을 구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준의 차이가 확연했다. 그의 창은 낭왕의 깃발이 과시했던 현란함과 날카로움을 담아내지 못했다. 예측불가의 변초를 특장기로 삼은 무공에서 이러한 단조로움과 둔함은 내게 위협이 되기 어려웠다.
그래도 나는 방심하지 않았다. 사울에게도 비장의 한 수가 있을 터였다. 과연 그는 막판에 내 간담을 서늘케 하는 절초를 선보였다. 낭왕에게선 보지 못한 비기였다. 미리 대비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왼팔이 걸릴 뻔했다.
내가 아슬아슬하게 최후의 승부수를 빗겨내자 사울이 싹싹하게 창을 거두고 물러섰다. 나를 주시하는 그의 동공에 경외감이 어렸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단창을 허리춤에 수습하며 사울이 감상을 밝혔다.
“실로 놀라운 솜씨였소. 성주라 해도 제한된 공간에서 내 일방공격을 아무 탈 없이 받아내지 못했을 게요.”
“이제 내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오. 단 한 점의 의심도 없소.”
입구에 있던 노인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보고도 믿기 어렵구려. 마치 실체가 없는 유령이 날아다니는 것 같았소.”
사울이 노인의 표현에 동의했다.
“맞습니다, 이탄. 정말로 유령을 상대하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아니면 바람이라 할까요? 분명 무언가 내 창기(槍氣)에 걸리긴 했습니다. 그러나 설령 번개라 한들 바람을 쪼갤 수는 없잖습니까?”
사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노인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대의 힘도 몸놀림 못지않게 대단한지 궁금하구려. 어떻소? ‘천신의 돌’로 그대의 힘을 시험해보는 게?”
뭔가 거창한 단어에 귀가 솔깃했다.
“그게 뭡니까?”
노인이 팔을 들어올렸다. 그의 검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니 집채만한 바위가 보였다. 방금 전까지는 있는 지도 몰랐던 거암이었다.
“저것이 천신의 돌이라오. 성주는 저걸로 본인의 발전정도를 측정하곤 했소.”
구미가 당겼다. 바위로 가까이 가서 만져보니 쇳덩이의 질감이 났다. 문득 기묘한 친숙감이 들었다. 철봉을 꺼내 두드려보니 깡깡 소리가 났다. 놀랍게도 시커먼 바위는 운철덩어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