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96
제195화 그자들이 그녀를 깨우기 전에
내 곁으로 다가온 노인이 운철덩어리를 쓰다듬었다.
“이 생채기들은 성주의 번이 새긴 흔적이라오. 보시오. 차츰 깊어지고 커지지 않소? 이건 작년 가을 성을 나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자취였소.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끝내 베지 못했다고 몹시 아쉬워하셨소.”
나는 바위 위에 올라가 노인이 어루만지는 틈 너머를 살폈다. 반 자가량이 남아있었다. 운철을 완전히 가르기엔 낭왕의 공력이 일 푼 모자랐던 것이었다.
노인이 나를 부추겼다.
“한 번 해 보시구려. 사마의 왕들을 처단했으니 그대의 무위는 이미 성주를 넘어섰을 게 아니오?”
실제로는 꼭 그렇지는 않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 무위는 이제 비로서 그들과 대등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었다. 실전이라면 검왕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무력 자체만으로는 왕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내공만 따지면 사왕이나 장왕에게 미치지 못했고 무학의 경지에서는 무왕이나 도왕을 겨우 따라잡은 형국이었다. 내-외상을 입기 전의 낭왕과는 양면에서 비슷할 터였다.
그럼에도 나는 도전해보기로 했다. 어제라면 모를까 지금이라면 해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비켜서십시오.”
노인과 사울을 뒤로 물린 나는 골수에 깃든 원력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일시마비가 될 우려도 있었으나 뒤편에 선 이들을 믿어보기로 했다. 기실 그들을 신뢰해서라기보다는 최대치를 뽑아내지 않으면 운철을 양단할 수 없을 것 같았기에 욕심을 부린 것이었다.
철봉에 원력을 주입한 나는 일 장 정도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현재 내가 터득한 최강의 초식이라 할 광참을 날렸다. 다음 순간 운철이 쩍 갈라졌고 지켜보던 사울과 노인의 입들도 쩍 벌어졌다.
운철이 발한 반탄력으로 인해 팔은 물론이고 어깨의 뼈까지 욱신거렸다. 만약 일도에 운철을 쪼개지 못했다면 골절 이상의 중상을 입었을 것이었다. 다행히 마비는 찰나지간만 발생했을 뿐이었다.
무사히 착지한 나는 전력을 쏟아내느라 격탕한 기혈을 다스렸다. 뒤에서 노인이 탄성을 토해냈다.
“아아! 실로 엄청나구려. 단칼에 천신의 돌을 쪼개다다니. 그것도 가장 두꺼운 부위를. 가히 신장(神將)의 위용이었소.”
노인의 찬사가 아니더라도 나는 크게 고무되었다. 어젯밤 현소에서 전갈독수를 들이켠 후 급작스럽게 증가한 원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독수에 자극받은 내단은 전에 없이 많은 원력을 내보냈다. 나는 그 원력을 착실하게 골수에 챙겨두었다. 정확한 양을 가늠하지 못했는데 이 정도였을 줄이야.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어디의 누구였더라. 오파? 어파? 우파? 어린? 우린? 아린? 대충 그런 이름이었는데.
어쨌거나 그자를 찾아 전갈독수를 구입해야 했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부작용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내게 천고의 영약이나 진배없었다. 만약 전갈독수의 효능을 빌어 독왕의 내단을 이른 시일 내에 전부 체화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미증유의 원력을 얻게 될 터였다. 독왕은 내단에 담긴 원력이 무림의 왕들이 가진 공력의 두 배에 달하리라 호언했다. 거기에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원력을 더한다면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 될 것이었다. 상상만 해도 흥분으로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들끓는 내기를 가라앉힌 나는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오파인지 우파인지가 여기서 멉니까?”
노인이 맥락 없는 질문에 의아해하면서도 즉시 답을 주었다.
“오파는 그리 멀지 않소만 우파는 사천오백 야아, 즉 육천여 리는 떨어져 있소. 그런데 거기에 무슨 볼 일이 있소?”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문사건에게 좀 더 확실히 물어볼 걸.
“오파인지 우파인지에 어린, 아니면 우린, 그도 아니면 아린이란 이름의 약재상이 있습니다. 아무튼 그자를 징치하고자 합니다. 악인들에게 고약한 독을 팔아 선량한 사람들을 해치는 데 일조했더군요.”
“그렇소? 그자가 그대의 심기를 건드렸다면 우리가 잡아다주겠소.”
“죽이지는 마십시오. 물어볼 게 있으니까.”
“알겠소.”
“얼마나 걸릴까요?”
“그자가 든 곳이 오파일 경우엔 사흘이면 충분할 터이고 우파라면 한 달은 잡아야 할 게요.”
한 달이라니. 너무 길었다.
“우선은 그자의 소재부터 파악해 주십시오. 어디이든 길잡이를 붙여주시면 내가 직접 가보겠습니다.”
육천여 리라고 해도 직선경로로 비행하면 일곱 시진 이내에 당도할 수 있었다. 좀 여유를 부려도 왕복에 이틀이 걸리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알겠소. 당장 알아보리다.”
* * *
우리는 자리를 옮겼다. 나를 제거할 장치를 갖춘 최초의 살풍경스러운 석실이 아니라 번듯한 방이었다. 압도적인 무력을 과시함으로써 나는 낭왕의 죽음을 둘러싼 노인과 사울의 의혹을 해소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호의를 얻어냈다. 역시 강하고 볼 일이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노인이 장광설을 쏟아냈다.
“이제야 성주의 깊은 뜻을 알았소. 탁월한 선택이었소. 본성은 향후 그대와 영원히 변치 않는 우정을 이어나가겠소. 그런 의미로 성주와 그대가 한 약속을 철저하게 이행할 작정이오. 성주에겐 아홉 명의 여식과 마흔일곱 명의 손녀가 있소. 여식들은 모두 혼인했고 손녀들도 열두 명은 혼례를 치렀으나 그대가 원한다면 누구라도…….”
나는 노인의 말을 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잠깐만요. 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 겁니까?”
“그대가 성주와 그런 계약을 맺었다고 수라에게 들었소만.”
“전혀 아닙니다. 낭왕 어르신은 다만 나를 손녀사위로 삼고 싶다고 했을 뿐입니다. 나는 그때 바로 거절했고요. 나에겐 이미 정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인이 있다고 해도 상관없잖소? 동방에도 다처를 두는 게 일반적이라고 알고 있는데. 첩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만 성주의 자손들을 첩으로 들이는 건 이쪽의 체면이 상하니 가급적 정식 부인으로…….”
“글쎄, 처든 첩이든 관심 없습니다. 그러니 이 문제는 앞으로 꺼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노인이 고집하면 낭왕에게 했던 협박을 되풀이할 참이었으나 노인은 내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다소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나는 화제를 바꾸었다.
“그건 그렇고 어째서 할머니, 아니 성모의 예언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것입니까? 뭔가 엄청나게 중요한 일인 것처럼 운을 띄우더니.”
내 눈길을 받은 사울이 노인과 쓴웃음을 교환했다. 나는 그들이 이미 나와 성모의 대화 내용을 알고 있음을 알았다. 필히 누군가 동굴 밖에서 엿듣고는 쌍둥이가 나를 석실로 데려가는 동안 미리 달려가 보고했으리라.
사울에게 말을 걸었지만 응답은 노인에게서 나왔다.
“물론 매우 중대한 사안이오. 이제껏 성모가 예언한 바가 빗나간 적이 없었으니까. 이번에도 대비를 하지 않으면 크나큰 재앙이 일어날 게요.”
“그렇다면 태초에 신장에게 봉인되었다는 그 마후인가 뭔가 하는 여자가 정말로 부활할 거라는 말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소. 성모의 말씀은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하오.”
나는 눈빛으로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했다. 사울을 흘긋 쳐다보며 뜸을 들이더니 노인이 말을 이었다.
“성모가 말씀하신 전설에 나오는 마후는 실존인물이 아닐 게요. 하지만 그녀를 본 뜬 마녀가 실제로 인세에 출현한 적이 있소.”
“언제요?”
“대략 일천삼백 년 전쯤이었소.”
맥이 풀렸다. 이것도 까마득한 옛날의 이야기이지 않은가. 중원으로 따지면 무림이 태동하기 훨씬 이전이었다.
“당시 푸잔 지역에 나타난 마녀는 닥치는 대로 양민을 학살하며 그 일대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소. 대륙의 서편을 지배하고 있던 고대 삼왕국의 일만 정병이 그녀를 가로막았으나 몰살당하고 말았소. 기록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도검으로도 그녀의 살갗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고 하오. 당시로서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절대무적의 괴물이었던 게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명을 해친 마녀는 간지의 화산폭발에 휩쓸려 사망했다고 하오. 만약 용암이 그녀를 삼키지 않았다면 인세가 멸망했을 지도 모른다고 사가들이 적어두었다오.”
“그렇다면 할머니, 아니 성모의 말은 그 마녀 같은 귀물이 조만간 지금 세상에 등장할 거란 뜻입니까?”
“그렇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소?”
너무나 태평한 노인의 음성과 표정에 위화감이 들었다.
“그 경우에 대책은 있으십니까?”
노인이 다시 사울을 힐끗 보았다.
“물론이오.”
이대로 종결하기엔 찜찜했다. 보아하니 사울이 마녀를 상대하겠다는 소리 같은데 그렇다면 노파가 굳이 나를 부를 까닭이 없지 않은가. 대체 노인과 사울은 뭘 믿고 나를 배제한 채 재앙에 대처하겠다는 걸까.
나는 사울에게 눈을 돌리며 단도직입했다.
“마녀를 처치할 자신이 있으십니까?”
이번에도 대답은 노인에게서 나왔다.
“그러리라고 보오.”
이미 작심했기에 나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근거는요? 외람되지만 마녀가 사울 총수보다 강할 수도 있잖습니까?”
나는 그러니 나에게 기댈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뒷말을 생략했다. 내 질문에 답변하지 않고 노인이 되물었다.
“혹시 이곳의 역사에 대해 아시오?”
뚱딴지같은 반문이었다.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온단 말인가. 노인의 의도를 몰랐지만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거의 없습니다.”
전날 낭왕에 관해 대화를 나누다 진소월이 간략하게 들려준 게 전부였다. 그나마도 온전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구려. 이곳의 역사는 동방보다 훨씬 복잡하다오. 문자와 언어를 공유하는 동방과 달리 이곳엔 별개의 언어와 풍습을 고수하는 수백 개의 종족이 존재하기 때문이오. 하지만 대부분의 종족에게 공통된 문화가 있소. 다름 아닌 ‘안지’를 숭배하는 전통이오.”
“안지가 뭡니까?”
“원래는 제사를 주재하던 자들이었소. 그러다 세월이 지나며 무소불위의 권위를 지닌 지배층이 되었다오. 다만 그들은 왕족 위에서 군림할 뿐 직접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지는 않았소.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이 대륙에 존재하는 어떤 왕국이라도 하루아침에 무너뜨릴 힘이 있었소. 그 힘을 증명한 적도 여러 차례였소. 그런 연유로 그들은 이 땅의 민중에겐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추앙받았소.”
나는 감을 잡았지만 굳이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자들이 마녀와는 무슨 관계입니까?”
“성모께서 예언한 마녀는 필히 그들의 작품일 게요. 그대와 같은 동방인의 시각에서 보면 안지는 일종의 사술집단이오. 약과 독, 그리고 술법을 이용해 온갖 종류의 마물(魔物)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오.”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시시해졌지만 마무리는 지어야 했다.
“그러면 그자들이 그녀를 깨우기 전에 일망타진할 생각이시군요?”
“그게 최상일 터이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선제조치는 불가능하오. 방금 말했듯 안지는 민중의 절대적 지지와 비호를 받고 있소. 성주가 대륙을 일통한 후 그자들을 소탕하려고 본성의 총력을 기울였고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뿌리를 뽑지는 못했소. 기실 이번 일은 생존한 안지의 복수극일 공산이 크오. 어쨌거나 아까 보고를 받자마자 전 대륙에 비상 연락망을 가동했소. 마녀가 나오는 즉시 대응할 참이오. 그러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게요.”
나는 애초의 질문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총수가 마녀를 처치할 거라 확신하십니까?”
노인이 답을 미루자 오랫동안 침묵하던 사울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 간 안지에 관해 집중적으로 연구해왔소. 결론부터 말하자면 설사 그들이 일천여 년 전 세상을 멸망시킬 뻔했던 마귀의 제조에 성공했다고 해도 대책이 있소. 우리가 분석하건대 그 마귀의 무력은 최대치로 잡아도 동방 무림의 기준으로 초절정 극상 어림이오. 그대 앞에서 이런 말을 하기는 민망하지만 나 혼자서도 능히 처리할 자신이 있소.”
“하지만 그들은 낭왕 어르신을 염두에 두고 마녀를 만들었을 것 아닙니까?”
내 의문을 풀어준 이는 노인이었다.
“성주는 대륙을 일통하는 과정에서 본연의 무력을 온전히 드러낸 적이 없다오. 상대가 너무 약한지라. 따라서 그들은 성주의 진정한 무위를 꿈에서도 알지 못할 게요.”
설득력이 충분했다. 하여 나는 마녀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