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98
제197화 거기부터 가보지요
시산혈해(屍山血海)!
문자 그대로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일견에도 수만 명은 될 듯싶었다.
나는 기시감이 들었다. 목전의 광경은 재작년 가을 철마류 본단을 치기 전에 목격했던 참상과 흡사했다.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신들이 쌓여 있었으나 인간의 목숨이 파리만도 취급받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나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는지 단창을 쥔 사울의 오른팔이 풍을 맞은 것처럼 덜덜 떨렸다. 그의 입에서 알아듣지 못할 말이 튀어나왔다. 욕설일 터였다.
“저 뒤쪽에 생존자들이 있습니다.”
내 말에 넋이 나가있던 사울이 정신을 차렸다.
“어디요?”
나는 사울을 이끌고 태풍에 직격당한 듯 처참하게 부서진 건물들의 잔해 쪽으로 갔다. 그러고는 아래를 가리켰다. 사울이 돌 더미를 들어내자 지하로 통하는 입구가 나왔다. 내게 눈짓을 한 사울이 밑으로 내려갔다. 나는 그의 뒤를 따르지 않고 밖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사울에게 내몰린 사람들이 지상으로 올라왔다. 모두들 공포에 절어있었다.
스무 명 남짓한 남녀노소로 이루어진 무리는 사울의 앞에 오체투지 했다. 사울은 그들 중 머리가 하얗게 샌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의 내용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나는 사울이 노인의 횡설수설에 애를 먹고 있음을 알았다. 결국 상대를 중년 여자로 바꾼 사울은 그녀와 한참 문답을 이어갔다. 그러더니 나에게 알아낸 바를 알렸다.
“이들은 어둠 속에 숨어 있었기에 날짜의 경과를 알지 못하오. 열흘 이상 지난 것으로 착각하고 있구려. 추정컨대 사흘 전 일출 전후로 아데 백성들이 안지 대법사의 명을 받고는 광장에 모여들었던 모양이오. 법사는 이족의 오랑캐들에게 굴종하는 자들에게 천신이 노여워한다며, 그리고 천신의 벌이라며 ‘마후’를 불렀다고 하오. 하늘에서 떨어진 마후는 닥치는 대로 백성들을 학살했다는구려. 이들은 무슨 일이 벌어진지도 모르고 멍하니 있다가 정신없이 이 피신처로 달아났다고 하오. 아마 다른 곳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을 게요.”
짐작이 아니라 기감으로 나는 사울의 말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지하 곳곳에서 생기가 잡혔다.
“마녀가 어디로 갔답니까?”
기대하지 않았는데 뜻밖에도 답이 나왔다.
“법사가 다음 천벌이 떨어질 곳은 지두라고 했다는구려.”
“거기가 어딥니까?”
“북녘의 도시라오. 여기서 사오백 리쯤 되오.”
“그러면 꾸물거릴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어서 출발하시지요.”
내가 재촉하자 사울이 사람들에게 뭐라고 이른 후 몸을 날렸다. 그를 쫓으며 그에게 말했다.
“시간이 급박하니 내가 총수를 안고 달리겠습니다. 방향을 지시해주시기 바랍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사울은 거부하지 못했다. 그에게서 ‘알겠소.’라는 답이 나오자마자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는 전속력으로 비행했다. 지두까지는 사오백 리라니 반시진이면 갈 수 있을 것이었다.
지두의 상태는 아데와 대동소이했다.
아데에서처럼 민중을 집결시킨 후 학살한 듯 대부분의 시신이 한 데 몰려있었다. 생존자들을 찾아 물어보니 술사와 마후는 사흘 전 오후 지두에 나타났다고 했다. 그렇다면 반나절을 번 셈이었다. 하지만 아직 따라잡으려면 한참 멀었다.
법사와 마후의 다음 행선지는 오낭이었다. 오낭은 지두에서 동북으로 삼백여 리 떨어진 대도였다. 아데와 지두보다 훨씬 컸기에 피해도 다대했다. 헤아려 보이는 않았지만 사망자가 십만이 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로 끔찍한 참변이었다.
나는 안지란 무리에게 원초적인 분노가 일었다. 천랑성에 복수를 하려면 그곳으로 마녀를 끌고 가서 그들만 칠 것이지 어째서 무고한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을까. 백번 양보해 천랑성에 굴종했다고 벌을 내리는 것이라면 왕족이나 장수들 같은 대가리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게 아닌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단 말인가.
나는 상상도 못한 혈겁을 일으킨 악마들을 응징해 하루아침에 불귀의 객이 된 수많은 이들의 영혼을 달래주기로 결심했다.
오낭에서는 특이점도 발견되었다.
이전 두 도시에서 이미 알아차리긴 했지만 마녀는 일종의 장공을 구사하는 것 같았다. 정확한 위력은 측정하기 어려웠지만 범위가 상당함은 분명했다. 그런데 오낭엔 장공의 파괴력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흔적이 여럿 남아있었다. 전날 사울이 분석한 대로 초절정 극상의 고수가 발한 장공과 비슷한 수준으로 보였다.
하지만 나는 마녀의 무위가 그 이상일 거라 추측했다. 오낭 광장의 탑에 새겨진 기이한 자국 때문이었다. 사울은 탑이라고 했지만 기실 엄청나게 큰 원뿔이었다. 아래쪽은 반지름이 사오 장에 달했다. 그런데 마치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맹수의 발톱이 할퀴고 지나간 것처럼 그 부위가 움푹 패어있었다.
사울의 단창으로는 단번에 그런 자국을 만들기 어려웠다. 아니,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가 원기둥에 그 정도의 흠집을 내려면 창을 최소한 세 번은 휘둘러야 할 터였다. 이 사실을 지적하자 사울의 표정이 침중해졌다. 나는 둘러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마물은 내가 상대하는 게 낫겠습니다. 총수는 그녀를 부리는 법사란 자를 잡아주십시오.”
사울은 미련을 보였다.
“좀 버겁더라도 가급적 내 손으로 마귀를 처단하고 싶소.”
나는 사울과 실랑이를 벌일 생각이 없었다. 그러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알겠습니다. 일단 갑시다.”
한 팔로 사울을 안아든 나는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비상했다.
네 번째 도시는 ‘자리’였다.
예상했던 참상이 우리를 맞았다.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광경이었다. 자리에서 목숨을 부지한 이들은 이틀 전 정오를 전후해 그곳에 나타났던 법사와 마녀가 학살극을 벌이기 전 도옹으로 간다고 했음을 알렸다. 암담했다. 한 시진 반 만에 하루치를 따라잡았으나 마녀와의 거리는 아직도 까마득했다.
정보를 얻은 후 지체 없이 사울을 안고 날아오르며 그에게 물었다.
“혹시 그들의 경로가 천랑성으로 향하고 있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막 그 말을 하려고 했소. 다소 갈지자 행보이긴 하나 도중의 도시들을 경유하기에 그런 모양이오.”
그렇다면 우리와 엇갈렸다는 의미였다. 만약 우리가 아데까지 일직선의 최단경로로 나아가지 않고 도시들을 들렀다면 진즉 마주쳤을 것이었다.
“그러면 그들이 현재 어디쯤에 있을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도옹이란 곳에 가지 않고 그리로 직행했으면 합니다만.”
“조금만 시간을 주구려.”
그렇게 말하고는 사울은 한참 후에야 추측한 바를 꺼내놓았다.
“둘 중 한 군데일 듯싶소. 오마, 아니면 지동이오.”
“어느 쪽이 앞입니까?”
“오마요.”
“좋습니다. 거기부터 가보지요.”
한 시진 후 나는 사울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 * *
오마 역시 앞선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목불인견의 지옥도를 그리고 있었으나 다른 점이 있었다. 혈해의 피가 아직 덜 말랐다는 것이었다. 참화에서 목숨을 부지한 이들을 찾아 물어보니 법사와 마녀가 다녀간 지 두 시진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했다. 법사가 밝혔다는 다음 행선지는 사울의 예측대로 지동이었다.
신속하게 확인을 끝낸 우리는 지동을 향해 출발했다. 잘 하면 살인마들이 그곳에 이르기 전에 저지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오마에서 북동으로 삼백삼십 리가량 떨어져있다는 대도에 이를 때까지 법사와 마녀와 조우하지 못했다. 지동에 가까워졌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기시감이 들었다.
마기충천(魔氣衝天)!
전날 철마류 본단을 찾았을 때 보았던 묵운 같은 마기 덩어리가 지동 상공에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가속을 발했다. 단숨에 수백 장의 거리를 지우고 현장에 당도하니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이 펼쳐져있었다.
살겁의 원흉에게 쏜살같이 날아가며 나는 사울을 공중에서 떨어뜨렸다.
“법사를 잡으십시오.”
사울의 답변이 나오기 전에 마녀의 지척에 이른 나는 숨을 들이켰다. 마녀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부용아씨.
일순지간 놀라서 안구가 튀어나올 뻔했으나 나는 간신히 진정했다. 그녀일 리가 없었다. 그녀와 똑같이 생겼지만 다른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일 년 반 전 전원 소월루에서 아버지를 빼닮은 진청운을 만났을 때의 충격을 다시금 체험한 나는 부용아씨의 얼굴을 가진 마녀에게 광환을 쏘았다. 그 일수로 그녀의 명줄을 자르리라 확신하면서.
오판이었다.
최대치의 칠 할의 원력이 실린 내 광환에 이마를 적중 당했지만 마녀는 고개만 살짝 뒤로 젖혔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일점의 감정도 깃들어있지 않는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성난 고양이처럼 하악질을 하더니 입에서 무지막지한 태풍을 내뿜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처참하게 짓뭉갰던 장공의 진원지는 손바닥이 아니라 입술이었다.
나는 강풍을 뚫고 마녀에게 쇄도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녀의 입김은 나의 호신강기를 침범하지 못했다. 철봉을 꽉 움켜쥔 나는 마녀의 목덜미를 인정사정없이 내리쳤다.
캉!
쇳덩이들이 부딪치는 기음과 함께 마녀가 휘청거렸다. 그리고 나는 나도 모르게 고통의 신음성을 토해냈다. 철봉으로 마녀를 가격했던 왼팔의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극통이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마녀는 단순한 도검불침의 수준이 아니라 금강불괴였다. 세상에 이런 괴물이 존재하다니.
느긋하게 충격을 추스를 겨를이 없었다. 철봉에 얻어맞자마자 마녀가 마치 고양이가 할퀴듯 횡으로 오른팔을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극상의 절(折)로써 아슬아슬하게 빗겨냈지만 모골이 송연해졌다. 찰나지간만 대처가 늦었어도 마녀의 길고 뾰족한 손톱에 목이 걸려 두부가 절단되었을 터였다.
나는 방심을 버렸다. 마녀의 무위가 기껏해야 초절정 극상 어림일 거라던 대두 노인과 사울의 말은 완벽한 헛소리였다. 마녀는 사마의 왕들을 능가하는 강자였다. 어쩌면 검왕 이상일지도 몰랐다. 머나먼 이역에서 전혀 예기치 않았던 강적을 만난 나는 투지를 끌어올렸다.
투지를 일으켰다고 흥분한 것은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단 이 초의 공방으로 마녀의 무력이 심상치 않음을 간파한 나는 냉정하게 전술을 구상했다.
근접전은 불리했다. 마녀의 몸뚱이는 한때 나에게 암담함을 선사했던 철마의 철갑보다 열 배는 딴딴했다. 철봉이나 옥소로 때려서 작살낼 수 있는 강도가 아니었다. 몇 번을 내리쳐도 별 타격을 주지 못할 터였다. 맹수의 이빨이 날카롭다한들 악어 껍질이나 거북이 등딱지를 파고들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마녀와의 육박전은 공격의 효용성이 떨어지는 반면 방비의 약점은 두드러졌다. 반사적으로 마녀가 휘둘렀던 팔의 속도는 무시무시했다. 그녀에게 잡히거나 손톱에 걸리면 좋은 꼴을 기대하기 어려울 게 명약관화했다. 그러니 멀리 떨어져서 광환이나 광우, 혹은 광망으로 견제한 후 광폭이나 광참으로써 승부를 매조지하는 게 현명한 방책이었다.
마녀의 반격을 흘려낸 순간 이미 수읽기를 마친 나는 훌쩍 물러섰다. 그러면서 마녀에게 광환을 쏘았다. 이번엔 최대치에 준하는 원력을 실었다. 내 수를 예측하지 못한 듯 마녀는 두 개의 빛줄기를 고스란히 양안에 허용했다.
펑!
눈알들이 터지는 소리가 동시에 울려 마치 한 개만 적중한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손끝에 전해지는 감각은 이번 일수가 마녀를 맹인으로 만들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때 이른 전과에 나는 승리를 낙관했다. 아무리 사나와도 눈먼 암고양이는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는 내 두 번째 오판이었다.
두 눈을 다 잃었음에도 마녀의 전투력은 급감하지 않았다. 앞이 보이기라도 한 듯 그녀는 정확히 내가 후퇴한 지점으로 날아와 내게 달라붙었다. 신법을 발해 그녀를 떨쳐내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녀가 나보다 빨랐기 때문이었다.
속도에서만 열세에 처한 게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철봉과 옥소로 그녀의 팔들을 쳐내며 나는 마녀의 완력이 내 원력을 능가함을 알았다. 실로 무지막지한 괴력이었다.
빠른데다 강하니 육탄전의 상대로는 최악의 난적이었다. 실제로 나는 금세 비세에 처했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마녀의 팔들에 속절없이 밀리다 결국 석벽에 몰렸다. 격렬하게 저항하며 탈출을 도모했으나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눈앞이 캄캄해진 순간 마녀의 손톱이 내 가슴팍을 찢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