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
제01화 딱히 사문은 없소
입추가 지났건만 삼복 같은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씨임에도 안평(安平)의 거리는 십일 장이 선 저자처럼 붐볐다. 평소 같으면 다들 그늘을 찾아 들어갔을 사람들이 땡볕에 나온 이유는 간단했다. 잠시 후 치러질 나와 태극검문 후예 간의 비무를 관전(觀戰)하기 위해서였다.
세상에 싸움 구경보다 재미있는 일은 드물었다. 더욱이 시중잡배들의 어설픈 주먹질이 아니라 제대로 무공을 익힌 이들이 펼치는 격렬하고도 치열한 승부는 운우지락 못지않은 흥분과 쾌감을 선사할 터였다.
돈을 내고서라도 보겠다는 이들이 수두룩할 터인데 그깟 더위 때문에 공짜싸움구경을 포기한다는 건 횡재수를 스스로 걷어 차버리는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비무대 주변이 인산인해를 이룬 것도 당연지사였다.
진로를 가로막는 인파를 헤치고 나간 나는 세 번째 징이 울리기 전에 간신히 제삼(第三)비무대에 도달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감점을 당할 뻔했다. 만약 다섯 번째 징이 울릴 때까지 나타나지 않으면 아예 탈락이었다.
일 각이나 지각한 나를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는 공식참관인들에게 출전자임을 알린 후 비무대에 올라서자 수백 쌍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기분이 묘했다. 좋은 쪽은 아니었다. 뭐랄까, 희극패의 어릿광대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거머리 떼처럼 내 면상에 달라붙었던 시선들은 이내 비무대 반대쪽으로 옮겨갔다. 나도 그리로 눈길을 보냈다.
산뜻한 백색 무복을 차려입고 검병에 수정이 박힌 보검을 허리에 찬 청년이 오연히 서 있었다. 초면이었지만 나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조우성(趙宇成).
열흘 전 안평에 들어온 직후부터 귀가 따갑게 들은 이름이었다. 기실 제삼비무대 주위에 다른 비무대들의 서너 배에 달하는 인파가 몰린 건 전적으로 그의 이름값에 기인했다.
내가 들은 바에 따르면 태극검문의 잠룡은 십오 세 무렵에 이미 자기 문파의 중견검사들을 넘었고 최근에는 장로들에게 필적하는 무위에 이르렀다고 했다. 어느 정도 과장이 섞여있을 터이나 태극검문이 장차 문파를 빛낼 기린아를 길러냈음은 분명해 보였다.
실제로 조우성은 예선전을 거치며 그의 무력에 관해 떠도는 풍문이 허위가 아님을 입증했다. 모든 상대를 단 삼 초 만에 굴복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놀라운 건 초수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의 예선 마지막 판의 상대가 장산파의 소만중이라는 점을 두고 쑥덕거렸다. 소만중은 철옥수(鐵獄手)라는 별호를 지닌 일류무사였다. 우승 후보라고 부르기엔 부족한 바가 없지 않으나 사강이나 적어도 팔강에는 들고도 남을 강자라 했다. 그런 자에게서 삼 초 만에 항복 선언을 받아내는 것은 태극검문의 원로들이라 해도 장담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소만중을 가볍게 꺾음으로써 강호 일각의 의구심을 지워버린 조우성은 강력한 우승 후보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모든 이들이 그가 결승에 올라 백도방(百刀幇)의 초신성 차무진(車武眞)과 자웅을 결하리라 예상했다. 누가 이기든 성주(星州) 일대를 넘어 중원 전역을 아우르는 명성을 얻을 거라며.
나를 주시하는 조우성을 마주 바라보았다. 그의 동공에 확연한 멸시감이 떠올라있었다. 약간 언짢았으나 그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본선 대진표는 무작위 추첨으로 짜인다고 했지만 성주 제(諸)문파 간의 사전 조정을 거쳐 정해진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강자들이 초반에 충돌하는 사태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유력한 우승후보인 조우성의 본선 첫 판 상대로 나를 택한 것은 내가 약체, 그것도 최약체로 평가받았다는 뜻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무명소졸이나 다름없는데다 예선에서 오연승을 기록했지만 매판 겨우 승리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그랬을 거라는 말이다.
굳이 변명하자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도무지 긴장할 수가 없었다. 호랑이는 토끼 한 마리 사냥하는 데도 최선을 다한다고 하지만 토끼를 상대로 싸울 때 전력을 다하지는 않지 않은가.
나는 태극검문의 기린아가 예선전의 상대들이 잠재운 내 투지를 일깨워주기를 바랐다.
강직한 인상의 오십대 중년인이 비무대로 올라왔다. 나와 조우성의 중간에 선 그가 멀리까지 들리도록 우렁찬 목소리를 토해냈다.
“본 삼십이강전의 판정관 대표를 맡은 복룡무관의 장선(張宣)이오.”
박수갈채는 없었다. 중년인이 좌우로 고개를 돌리더니 말을 이었다.
“인사들 하라.”
웬일인지 조우성이 먼저 포권했다.
“나는 태극검문의 조우성이오. 멋진 승부를 기대하겠소.”
일순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일었다. 조우성의 인기를 반영한 반응이었다.
나도 오른 주먹을 왼 손바닥에 갖다 대며 답례했다.
“전충이오. 여러 어른들께 이런 저런 가르침을 받았으나 딱히 사문은 없소.”
전장의 아저씨들로부터 썰면 열 접시라는 놀림을 받던 내 두꺼운 입술과 대조적인 조우성의 얄따란 입술에 노골적인 조소가 걸렸다. 나도 그에게 씩 웃어주었다. 내 대응이 불쾌한지 조우성이 찢어진 눈을 부라렸다.
나와 조우성을 번갈아 쳐다보며 자신의 결정에 무조건 승복해야 된다는 등의 몇 가지 규칙을 늘어놓던 판정관 장선이 마무리를 지었다.
“준비들 하라. 고성(鼓聲)이 나면 시작하도록.”
장선이 비무대를 내려가자 조우성이 검을 뽑았다. 검갑을 빠져나온 검신이 은빛 광채를 뿜어냈다.
나는 무기를 빼들지 않았다. 무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였다.
조우성은 적수공권으로 맞서는 내가 가당찮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기색이었다. 예선전을 치르는 동안 나는 모든 승부를 주먹으로 매조지었다. 그 정보를 들었을 조우성은 나를 권객으로 착각하고 있을 터였다.
조우성이 슬쩍 왼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손가락 세 개를 펼쳐보였다. 예선 때와 마찬가지로 삼 초에 끝을 볼 거라는 선언이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양손을 오므렸다 펴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몇 십 초가 지나도 안 될 거라는 반박이었다. 조우성이 검미를 찌푸렸다. 내 응수의 함의를 이해했다는 반증이었다.
조우성이 인상을 구긴 것과 동시에 비무 개시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예상과 달리 조우성은 곧바로 나에게 달려들지 않고 검만 비스듬히 쳐들었다. 나도 제자리를 고수했다.
한참이 지나도록 우리 둘이 움직이지 않자 관중 일부가 야유를 보냈다. 압박을 견디지 못한 조우성이 하는 수 없이 바닥을 박차고 내게 돌진해왔다.
조우성은 나를 얕보고 있었다.
그의 첫 수는 검을 익히지 않은 자라도 구사할 수 있다는 청룡출수(靑龍出手)였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그저 팔을 쭉 뻗어 검 끝을 상대의 명치에 찔러 넣는 단순한 수법이었다.
나는 조우성의 속셈을 간파했다. 어느 쪽으로 피하더라도 검으로 쫓아 내 양팔 중 하나를 벨 심산임에 분명했다. 그의 의도대로 해줘도 상관없었으나 나는 굳이 상체를 뒤로 뉘여 피했다.
각도 상 보지는 못했으나 조우성의 만면에 퍼졌을 비웃음이 눈에 선했다. 기실 철판교(鐵板橋)는 청룡출수에 대한 최악의 대처였다. 당장의 위기는 모면할 수 있지만 후속공격에 대한 방도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외통수를 자초하는 하지하책이었다.
예상한 대로 조우성이 검을 내리그었다. 그의 검이 내 무릎에 닿기 직전 다리를 쭉 폈다. 내 반격에 놀란 조우성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하지만 내 발차기에 정강이를 허용하지 않고 재빨리 발을 뺐다. 그와 동시에 검을 횡으로 그었다.
조우성의 가일수는 꽤 효과적이었다. 퇴로는 한 군데밖에 없었다. 나는 바닥을 굴렀다. 뒷골목의 파락호들도 창피해서 꺼린다는 나려타곤(懶驢打滾)이었다. 하지만 이 공방전의 승자는 나였다.
조우성에게서 떨어진 나는 벌떡 일어서며 손가락 세 개를 폈다. 조우성의 면상이 독주를 들이켠 취객처럼 붉어졌다.
삼 초가 지났음을 알린 내 조롱은 조우성의 분기를 촉발시켰다.
비무대 주위에서 지켜보고 있을 경쟁문파의 관계자들에게 진신실력이 노출될 위험을 무릅쓰고 조우성이 검기를 일으켰다. 그의 검첨에서 은빛 아지랑이가 피어오르자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절정검사의 상징과도 같은 검사(劍絲)였다. 그 정도의 선명함이라면 검인(劍刃)이 닿지 않고도 능히 사람을 해칠 수 있을 터였다. 이른바 검기상인(劍氣傷人)의 경지였다.
전력에 준하는 힘을 끌어낸 조우성이 기세등등하게 쇄도해왔다. 나는 정면충돌을 피해 후퇴했다. 말하자면 도망친 것이었다.
하지만 마냥 달아날 수는 없었다. 비무대의 면적이 무한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모서리에 몰린 나는 뒤로 돌아섰다.
이미 내 면전에 이르러있었던 조우성이 인정사정없이 검을 내 좌견에 찔러 넣었다. 성질 같아서는 어깨가 아니라 심장을 겨냥하고 싶었을 터였다. 하지만 비무에서 상대를 죽이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회피할 공간이 없었기에 나는 몸으로 조우성의 검을 받아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검을 내 겨드랑이 사이에 낀 것이었다.
내 대응에 당황한 조우성이 황급히 퇴보를 밟았다. 실착이었다. 그냥 검을 위로 쳐올렸으면 내 팔이 잘렸을 터였다. 물론 그 경우에는 나도 다르게 응수했을 테지만.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조우성이 재차 검을 뻗어냈다. 하지만 내가 한 발, 아니 한 손 빨랐다. 그의 소매를 낚아챈 나는 그를 냅다 던져버렸다. 내 완력을 못 이긴 조우성의 몸뚱이가 비무대 밖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조우성이 낙하한 지점에 모여 있던 이들이 경악성들을 토해냈다. 그들로서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을 터였다.
그나마 비행도중 공력을 일으켜 속도를 늦춘 조우성의 임기응변 덕분에 충돌로 인한 불상사는 없었다. 조우성은 운수 사나운 관전자들과 부딪치자마자 상승의 경신술을 선보이며 비무대로 되돌아왔다.
그의 반반한 안면이 찌그러져 있었다. 눈동자엔 흉흉한 청광이 번득였다.
바람직하지 않은 징조였다. 단순한 승부욕을 넘어 살기를 드러내면 나로서도 응징이 불가피하기 때문이었다. 원수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예방조치를 취했다. 그가 무리수를 두기 전에 원천봉쇄하려는 것이었다.
조우성이 비무대에 착지한 순간 나는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발이 바닥에 닿은 후의 전진이었으니 규칙 위반은 아니었다. 분기로 인해 평정심을 잃은 데다 내 기습을 예상하지 못한 조우성은 검을 크게 휘둘렀다. 힘만 잔뜩 들어간 대응이었다.
나는 조우성의 바로 앞에서 미끄러졌다. 그가 사선으로 내리그은 검이 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그의 가랑이 사이로 들어간 내 우족을 차올렸다. 묵직한 타격감과 함께 그의 동체가 떠올랐다. 나는 그가 신형을 추스르기 전에 그를 떠밀었다.
다시 한 번 비무대 아래로 추락한 조우성이 괴성을 내질렀다. 고통의 단발마인지 분노의 외침인지 불분명했다. 눈이 뒤집힌 조우성은 튕기듯 비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나는 감탄했다. 아무리 분기탱천했다지만 급소를 정통으로 걷어차인 사내가 그처럼 신속한 움직임을 보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히 명문의 후예다웠다. 조우성의 인내력과 의지력은 칭찬받아 마땅했다.
그렇더라도 조우성과 더 어울리고 싶은 마음은 참새 코딱지만큼도 없었기에 나는 그가 비무대에 올라서기도 전에 손바닥을 내밀며 소리쳤다.
“잠깐!”
물론 눈이 뒤집힌 조우성이 내 말을 들어먹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나에겐 그의 발광을 막을 패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