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0
제19화 어느 쪽에 설 거요?
뜻밖에도 광객이 나를 방해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한계일세, 소형제. 부탁컨대 내가 운공을 마친 연후 괴선과 용무를 보았으면 하네만.”
나는 선뜻 광객의 청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어서 운공에 드시지요.”
“고맙네.”
바로 가부좌를 튼 광객이 운공에 들자 나는 괴선을 불렀다.
“이리 오쇼, 노인장.”
“대가리에 피도 덜 마른 놈이 어디서 어른더러 오라가라야. 내게 볼 일이 있으면 네놈이 와라.”
“그러지.”
내가 몸을 일으키자 괴선은 당황했다.
“이놈아, 그치를 지켜야 할 것 아니냐. 내가 갈 터이니 그냥 거기 있어라.”
상공을 떠돌며 호시탐탐 피투성이의 광객을 덮칠 기회를 노리는 까마귀 떼를 흘긋 올려다본 나는 말과는 달리 내뺄 궁리를 하고 있음에 분명한 괴선에게 이죽거렸다.
“광객 어르신과 싸우기도 전에 바짝 굳어있을 때부터 수상쩍긴 했지만 노인장이 이 정도로 겁보일 줄은 미처 몰랐소.”
괴선은 분기탱천했다.
“겁보? 이놈이 정말로 겁을 상실했구나. 그 못된 주둥이를 뭉개주마. 네놈이 자초한 일이니 나를 원망하지 마라.”
오기의 힘으로 괴선이 나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내가 옥소와 철봉을 빼들자 멈춰 섰다. 그의 빈약한 다리가 풍을 맞은 노인의 손처럼 떨리고 있었다.
“약속을 어길 참이냐, 이놈!”
“무슨 약속?”
“방금 전 저치에게 저치가 운공을 마칠 때까지 나와의 용무를 미루겠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래서요?”
“그런데 그 흉물들은 왜 들고 있는 게냔 말이다.”
“내 맘이오.”
괴선의 말문을 막은 나는 그만 골려먹기로 했다. 의외로 소심한 그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나도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주저앉으며 내가 말했다.
“그냥 오쇼, 노인장. 김이 다 빠졌으니 얘기나 합시다.”
그제야 안도했는지 괴선도 그 자리에 허물어졌다.
일다경가량 내기를 다스린 나와 괴선은 경쟁하듯 말을 쏟아냈다.
“또 한 번 나를 이용해 먹을…….”
“대체 내가 네놈에게 무슨 빚을…….”
우리는 동시에 말을 뚝 멈췄다. 서로 사납게 노려보다 내 면상이 험악해지자 괴선이 꼬리를 내렸다.
“내 뜻을 곡해한 모양이구나. 천지신명께 맹세코 나는 네놈을 이용해 먹을 생각이 개구리 수염만큼도 없었다. 저치와의 비무가 지나치게 과열될 시 네가 진정시켜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았으나 설마 네놈이 목숨까지 걸 줄은 몰랐느니라. 솔직히 나는 그 지경에 이르기 전에 네놈이 나설 줄 알았다. 아무튼 아까 나와 저치를 떨어뜨려 준 건 고맙게 생각한다.”
감사보다는 사과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여겼으나 나는 그냥 넘어갔다. 분기가 누그려진 데다 궁금한 게 많았기 때문이었다.
“대체 왜 그렇게들 죽기 살기로 싸운 거요? 원수지간도 아닌 것 같은데.”
광객을 힐끔 쳐다본 괴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도 저치와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이 악연의 시초는 이십이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저치는 정파 오대세가에 속하는 광양 성가와…….”
“그 일이라면 설명하지 않아도 되오. 노인장이 고양호에서 광객 어르신의 편에 서서 성가의 도호들과 담판을 지은 것도 알고 있소.”
“어라? 어떻게? 네놈은 강호 사정에 까막눈이잖으냐?”
“여기 오기 전에 강호 사정에 밝은 이로부터 당금 무림의 정세와 주요 인사들에 대한 설명을 들었소.”
“그래? 그렇다면 얘기가 쉽겠구나. 그날 나는 성가의 도호들이 고양호변에 당도하기 전에 뻗대는 저치를 설득해 한바탕 경극을 선보이기로 했다. 내 기대대로 나와 저치의 무력을 목도한 성가 원로들이 중재에 응하더구나. 문제는 그들이 물러간 다음이었다. 저치가 글쎄 자기를 구해준 내게 승부욕이 발동해서는 제대로 한 판 붙어보자고 했지 뭐냐.”
“광객 어르신만 그랬소?”
“……뭐, 나도 어느 정도는 우열을 가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저치와 사전에 합의한 대로 오십 초를 교환하는 동안 호적수임을 알았거든. 그래서 저치가 원하는 대로 제대로 붙었더랬지.”
“그래서 누가 이겼소?”
괴선의 낯짝이 일그러졌다.
“팽팽한 승부였으나 종래엔 내가 양보해야 했다. 안 그러면 나와 저치는 염왕전에 동행했을 게다. 오늘처럼 말이다. 제길, 그날 저치가 의기양양해 하던 꼴을 떠올리니 배알이 꼴리는구나.”
나는 괴선의 분기를 십분 공감했다.
“그날의 굴욕감을 채찍 삼아 수련에 매진한 나는 이 년 후 저치를 찾아 재비무를 신청했다. 이번에야말로 저치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누가 상수인지를 알려줄 참이었지. 그런데 황당하게도 저치는 딱 내가 늘어난 만큼 세져있더구나. 삼백여 초의 혈투 끝에 나는 전날의 선택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물러서자 저치가 보란 듯 웃더구나. 분통이 터지는 줄 알았다.”
“그래서 이십 년이나 꿍해 있다가 오늘 결판을 내려던 것이었소?”
“이놈이 또. 꿍하긴 뭘 꿍해. 일이차전을 포함해 지난 이십 년 간 나와 저치는 도합 열두 번을 겨루었다. 그때마다 매번 마지막에 내가 양보하는 걸로 종결되었다. 너 같으면 속이 문드러지지 않았겠느냐? 그래서 네 말마따나 오늘은 죽든 살든 끝장을 볼 작심이었다.”
“어째 결기가 부족하구려. 진짜로 배수진을 칠 각오였으면 나를 부르지 말았어야 하잖소. 파국으로 치달을 경우를 대비해 말릴 사람을 곁에 두고자 한 것부터가…….”
“그게 욕먹을 일이더냐, 이놈아? 저치는 필생의 호적수이지 불구대천의 원수는 아니다. 아무리 본때를 보여주고 싶다고 해도 정말로 죽일 수는 없잖으냐.”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깔았다.
“솔직히 말해보쇼, 노인장.”
“뭘 말이냐?”
“오늘을 막판으로 삼고자 한 건 계산속에서 비롯된 것 아니오?”
괴선이 움찔거렸다. 내 말이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아마도 노인장은 근래 정점에 올랐을 거요. 다시 말해 이제부터는 내려갈 일만 남았다는 뜻이지. 반면 광객 어르신은 앞으로도 수 년 간은 꾸준히 무력이 상승할 테고. 그러니 노인장의 입장에서는 시간이 더 가기 전에 어떻게든…….”
“그만해라, 이놈아. 그렇게 남의 속을 후벼 파야 네놈 속이 시원하냐?”
괴선이 실토한 셈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짐작이 들어맞았다고 쾌재를 부르기보단 그가 측은해졌다.
“이해하기 어렵구려. 선인(仙人)들은 세속의 명리에 집착하지 않고 구름 위에서 노니는 이인(異人)들이라고 들었소. 그런데 어찌 이십 년을 넘도록 한낱 호승심의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했소?”
가뜩이나 왜소한 괴선의 어깨가 축 쳐졌다.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다, 이놈아. 그리고 선인이라고 이슬만 먹고 사는 고상한 존재가 아니다. 밥 먹고 똥 싸고 울고 웃는 건 다 똑같단 말이다. 물론 개중에 만사에 의연한 부류가 없지는 않으나 다 사람 나름이니라. 원초적인 욕망을 부여잡고 전전긍긍하면서도 겉으로는 세사에 초탈한 척하는 위인들도 적지 않은데다 나처럼…….”
제 얼굴에 침 뱉기가 부담스러웠는지 말끝을 흐리더니 괴선이 화제를 바꿨다.
“그런 그렇고 학림수호령의 처와 여식은 만나보았느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애당초 그런 여자들은 없었소.”
“무슨 소리냐?”
나는 진소월이 알려준 비사를 괴선에게 전했다. 호연객잔의 부녀에 얽힌 떠버리 아저씨의 사연을 들은 괴선이 혀를 찼다.
“쯧쯧, 심보 더러운 연놈들이 애꿎은 이를 나락에 빠뜨렸었구나. 그래서 어떡할 참이더냐? 설마 불문곡직 현가로 달려가서 그 연놈들에게 학림수호령을 기만하고 전장으로 몰아넣은 죄를 물을 작정은 아니겠지?”
“그러면 안 되오?”
“아서라, 이놈아. 그러다 그 엄한 작자들하고 시비라도 붙는 날엔 경을 치르게 될 게다. 꼭 손을 써야겠다면 그 부녀를 몰래 불러내서 조용히 따지는 게 상책이야. 그리고 어지간하면 말로 혼내주고 끝내려무나. 못된 연놈들이긴 하다만 목을 비틀어야 할 정도로 중대한 과오를 범한 건 아니잖으냐. 그 계집은 불쌍한 구석도 있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노인장은 신경 끄쇼.”
“이놈 보게. 만인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어른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충고를 해주면 감읍하지는 못할망정 어디서 흰소리야. 다 네놈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 새겨…….”
“됐소. 그렇다면 하나 물어봅시다. 만약 내가 이 건으로 성가의 무인들과 대립하게 된다면 어쩌려오?”
괴선이 입을 헤 벌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흑문의 첩인에게 무림의 현황에 대해 들었다면서. 그자가 보성 현가에 대해서는 말을 안 해 주더냐? 아니면 듣고도 까먹었느냐? 네놈이 제법 한가락 한다는 건 인정한다만 그 사나운 작자들에게 걸리면 뼈도 추리지…….”
“왜 그렇게 사설이 기오? 딱 잘라서 말해보시오. 나하고 성가하고 붙으면 어느 쪽에 설 거요?”
대답은 괴선이 아니라 엉뚱한 곳에서 나왔다.
“그야 당연히 자네 편에 서서 싸울 걸세.”
나와 괴선은 각각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짧은 운공을 마치고 막 눈을 뜬 광객이 형형한 안광을 뿜어내며 우리의 시선을 받았다.
“미쳤구나, 태산. 상대는 현가일세. 이십 년 전 같은 운이 또 따를 것 같은가?”
괴선의 질문을 묵살한 광객이 나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결연한 음성을 내뱉었다.
“이유를 불문하고, 형세와 무관하게, 나는 자네와 함께 성가와 싸우겠네. 설령 소형제의 적이 성가가 아니라 정맹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일세.”
일순 가슴이 벅차올랐다.
강호에 나온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물이라고 했던 ‘진정한 전우’를 얻다니! 목숨을 건 보람이 있었다.
나는 괴선에게 들려주었던 얘기를 되풀이해야 했다.
떠버리 아저씨의 내력을 밝힌 대목에서 광객이 별안간 소리를 질렀다.
“뭐라? 학림수호령? 이제 보니 우린 한 뿌리였구먼.”
광객이 흥분하는 이유를 알 듯 했다. 그는 스스로를 무림이 아니라 학림에 속한 인사로 규정했다. 그가 광객이라는 별호를 얻은 것은 광양 성가와의 무모한 대립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 이후 그가 보였던 행보 탓이 더 컸다.
광객은 문인들을 한 식구로 여겼다. 그들을 제 식솔로 간주했기에 누구라도 그들에게 몹쓸 짓을 하면 참지 않았다.
학사들을 고용하지 않은 무림방파는 없었고 크든 작든 그들과 갈등이 없는 곳도 없었기에 소란 또한 그칠 날이 없었다. 광객은 상대가 누구든 문사들과 문제가 있다는 소문만 나면 달려가 무조건 문사 편을 들며 난동을 부렸다. 정사마를 가리지 않았고 세력의 강약도 무시했다. 지난 이십 년 간 그로 인해 곤욕을 차른 문파와 세가들은 강가의 조약돌만큼이나 많았다.
광객 덕분에 무인천하에서 상인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던 문인들은 살판이 났다. 아무도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 광객이야말로 진정한 학림의 수호자였다.
사정이 그러한지라 광객은 나보다 더 분개했다.
“귀한 이를 속인 것으로도 모자라 사지에 몰아넣다니. 도저히 그 악종을 용서할 순 없네. 당장 가세. 가서 그 늙은이의 목을 비틀어줌세. 현가가 막으면 그들도 박살내버림세.”
괴선이 끌끌 혀를 찼다. 그러나 만류의 언사를 쏟아내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말려도 소용없으리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나섰다.
“죄송하지만 되도록 조용히 일을 처리하고 싶습니다, 어르신. 현가는 그자의 악행과 관련이 없으니 구태여 자극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광객의 만면에 불만이 그득했다.
“이미 현가의 일속이 되었다면서? 그 악종을 현가로부터 물과 기름처럼 분리할 수는 없을 터. 결국은 현가와 붙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 ‘진정한 전우“는 도움을 주기보단 괜한 분란만 일으키지 않을까.
“그런 상황이 오면 어르신께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그 전엔 제가 알아서 할 터이니 맡겨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광객이 마지못해 내 청을 받아들였다.
“알겠네. 그렇게 함세. 하지만 현가가 자네 행사를 방해할 양이면 반드시 나를 부르게나.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감세.”
“고맙습니다, 어르신.”
잠자코 지켜보던 괴선이 나를 칭찬했다.
“잘 했다, 이놈아. 헌데 그러면 입총전(入塚戰)은 뒤로 미룰 셈이냐?”
광객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입총전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요, 괴선?”
괴선이 턱짓으로 나를 가리켰다.
“저놈이 검황자에게 도전하겠다는구먼.”
광객이 다시 흥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