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01
제200화 두 사람이라뇨?
나는 낮밤을 잊었다.
몰아지경에 빠졌으면서도 충만한 희열감을 내내 의식했다. 강해졌다. 확실히 강해졌다.
거머리독수의 효능으로 족히 일백 일의 운공이 필요했을 원력의 증가를 일시에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마녀와의 결전에서 순간이동의 비결을 알아내고 광폭을 진일보시켜 무학 방면에서도 크나큰 성취를 얻은 덕분이었다. 약간의 고비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천랑성 행은 대득이었다.
나는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순간이동을 구현하고 또 구현했다. 그 신기를 해내는 나 자신이 신기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비법은 내 머릿속에 담겨있었던 것이나 진배없었다.
구체(球體)!
공의 한 점에서 정반대 편의 한 점까지 가장 빠르게 가는 길은 몇 개일까? 무수히 많았다. 표면을 타는 한. 그러므로 그것은 답이 될 수 없었다. 기실 정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구체의 중심을 지나는 관통이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실현하느냐였다. 구체를 평면으로 펼쳐놓고서는 어떤 방도를 모색해도 무용지물이었다. 그 역이 길이었다. 평면을 접어 점과 점을 맞닿게 할 것. 그러려면 엄청난 공력이 필요했다. 순간적으로 공간을 왜곡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럴 수는 없으니 결국 자신의 신체를 심하게 우그러뜨려야 했다. 즉, 스스로를 폭발시켜 목표지점까지 단숨에 이동해야 했다. 후유증이 수반될 수밖에 없는 비기였다. 검왕이 그 패를 수시로 꺼내들 수 없었던 이유였다.
나에겐 더 없이 잘 맞았다. 순간이동으로 몸에 탈이 나도 나는 금세 회복되었다. 이모에게 물려받은 경이로운 치유력 덕택이었다.
나는 순간이동에 따로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냥 이(移)에 포함시켰다. 전혀 다른 차원의 절초였으나 아버지가 본뜨고자 했던 무왕의 이형환위의 궁극이라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앞으로 설령 완전히 새로운 신법을 창안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오절신공의 테두리 안에 둘 생각이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에게 바치는 내 헌사였다.
* * *
펑!
굉음과 함께 커다란 분화구가 생겼다. 나는 만족했다. 신(新) 광폭의 위력은 기존 광무신공의 최강초식이었던 광참을 능가했다. 적중하기만 한다면 어떤 호신강기든 파괴할 수 있을 터였다.
나는 준비가 되었음을 알았다. 지금의 나는 능히 검왕과 자웅을 결할 수 있었다. 그를 능가한다고 장담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밀리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비등한 무력일 때 나는 천하의 누구라도 물리칠 자신이 있었다.
검왕의 해골 같은 낯짝을 떠올린 나는 씩 웃었다.
‘기다려라, 늙은이. 곧 찾아가마. 묵은 빚을 갚아줄 테다.’
검왕에게선 응답이 없었다.
* * *
얼마나 놀았을까.
나는 날짜를 헤아리지 못했다. 느낌상으로는 열흘 쯤 지났을 듯싶었다. 어쩌면 보름 이상 경과했을 수도 있었다.
수통에 남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입 속에 털어 넣은 나는 야천으로 비상했다. 별자리를 살피며 동천으로 날아가려다 찰나지간 망설였다. 천랑성으로 돌아갈까. 그러고는 오파로 가서 뻐드렁니 사내가 거머리독수를 완성하기를 기다렸다가 마시고 올까. 어차피 시간이 꽤 지났으니 넉넉잡고 스무 날만 더 참으면…….
나는 생각을 중단하고 몸을 날렸다. 일단 중원으로 돌아갈 참이었다. 사마의 왕들을 처치했으니 내가 없더라도 별 일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두어야 했다. 적의 잔당들 중 일부는 상당한 강자들이었다. 내 친인들이 그들과 붙었다가 변을 당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기실 하루라도 빨리 검왕과 붙고 싶어 좀이 쑤신 게 진짜 이유였다. 거머리독수의 추가 복용으로 원력이 증강되면 승산이 올라갈 터이지만 그러면 너무 시시하지 않은가. 지금이 딱 좋았다.
팽팽한 승부에서 승리를 쟁취했을 때의 쾌감은 내게 마약과 같았다.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여기서 더 성장하면 그런 기쁨이 남아있을 수 있을까. 서역의 마녀가 무공을 익혀 더욱 강해지지 않는 한 기대하기 어려웠다. 검왕을 상대로 증명해야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이 이미 지상 최강의 존재이리라 확신했다.
이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착각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사막 횡단이 끝났을 때는 먼 동이 터오고 있었다.
익숙한 중원의 산천을 접하면서 나는 계절이 바뀌었음을 알았다. 산허리마다 철쭉의 붉은 띠를 두르고 있었다. 어느새 봄이 온 것이었다.
지리를 알지 못했지만 나는 태평스럽게 동행(東行)했다. 가다보면 알만한 지형이 나올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어디서든 마을이 나오면 그리로 내려가 사람들에게 길을 물으면 그만이었다.
한 시진 쯤 느긋하게 비행하다가 제법 큰 도시를 발견하고는 하강했다. 인파가 넘실거리는 거리에 떨어져 내리자 대번에 난리가 났다. 땅바닥에 오체투지 한 군중의 입에서 전왕이 아니라 무황이라는 별호가 나왔다. 조금도 쑥스럽지 않았다. 이제는 그 명칭을 가질 자격이 있었다.
내가 들른 도시는 양부(陽富)였다. 서주(西州) 무림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도였다. 우한까지 나를 데려다 줄 수 있는 이들도 차고 넘쳤다. 나는 개 중 가장 강단이 있어 보이는 삼십대 장한을 길잡이로 삼았다.
야무진 인상과는 달리 미리 주의를 주었음에도 장한은 내가 가속을 발하자마자 까무러쳤다. 그를 깨운 후 속도를 줄이는 대신 나는 그에게 방향을 물었다. 우한까지는 일천이삼백 리라니 한 시진 반 거리였다. 자칫 빗나가면 엉뚱한 곳으로 갈 공산이 다분했으나 전날 사막에 면한 유관으로 가며 그 일대의 지리를 봐두었기에 조정할 수 있을 듯싶었다.
장한을 내려놓은 나는 다시 날아올랐다. 그리고 도중에 새로 길잡이를 구하지 않고 우한에 이르렀다.
* * *
정오 어림이니 다른 곳 같으면 한창 활기가 넘치고 있어야 할 시간이지만 우한은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조용히 웅크려있었다. 밤새 향락에 취했던 자들이 골아 떨어졌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막처럼 적막한 도시 위를 가로질러 나현의 장원으로 날아갔다. 아직 자줏빛 기초(奇草)들은 자라지 않았지만 자미원은 담장 역할을 하는 솔숲 내부 처처에 만발한 봄꽃들로 화사한 정경을 뽐내고 있었다.
산보라도 하려는지 혈접과 함께 마당에 나와 있던 나현이 그의 십여 보 전면에 착지한 나를 보고는 비대한 몸을 뒤뚱거리며 달려왔다. 그가 넘어질까 봐 안절부절못하며 혈접이 그를 바짝 따라붙었다.
“어서 오시구려, 무황. 예정보다 많이 늦어서 내심 걱정했다오.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라도 서역에서 변고가 생겼을까 해서 말이오.”
나는 나현이 마녀가 일으킨 혈겁에 대해 알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오늘이 몇 월 며칠입니까?”
익숙한 질문인지라 나현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삼월 초사일이오만.”
그렇다면 이십이 일만의 귀환이었다. 전날 늦어도 열흘 안에 돌아올 거라 하고 떠났으니 예정을 두 배 이상 초과한 셈이었다.
“서역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기본적인 내용은 들었소. 악마 같은 귀물이 출현해 서역 남부의 여러 도시들에서 무수한 인명을 학살했다고 하더이다. 혹시 그 귀물을 처단하느라 늦은 게요?”
꼭 그렇지는 않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아, 큰일을 하셨구려. 그 귀물에 대한 보고를 받았을 때 무황과 조우했을 지도 모른다고 짐작하긴 했소만.”
나는 의아했다. 내 안위를 확인하고도 나현의 표정이 풀리지 않아서였다. 하여 직설적으로 물었다.
“고민거리라도 있습니까, 대인?”
“그건 아니오. 다만…….”
말끝을 흐린 나현이 나를 올려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실은 오늘 아침에 두 개의 급보를 받았다오. 하나는 방금 말한 서역의 환란에 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명교에서 날아온 것이었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검황자를 잡아가겠다고 검왕이 명교에 쳐들어 온 걸까. 그를 저지하려다 사상자가 발생한 게 아닐까.
나는 심중의 불안을 그대로 토해냈다.
“누가 죽었습니까?”
다행히도 나현이 고개를 저었다.
“목숨을 잃은 이는 아무도 없다고 하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안도하기에는 일렀다.
“다만 무왕에게 문제가 생긴 모양이오.”
역시 검왕이었군. 헌데 문제라니? 무왕의 팔이라도 자른 걸까. 그렇다면 사지를 다 잘라 되갚아줄 테다.
“그 노물이 무왕 어르신께 무슨 짓을 했습니까?”
나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빙왕이 아니라 빙후가 왔다고 하오만.”
이번엔 내가 의아해할 차례였다.
“빙후라니요?”
“명교를 찾은 이는 묘령의 여인이었소. 스스로를 북해의 여왕이라 밝혀서 빙후라고 명명했다오. 빙왕의 패퇴를 설욕하러 왔다며 장왕을 불러냈는데 무황도 알다시피 그이는 그녀를 상대할 형편이 아니잖소? 그래서 무왕이 대신 나섰다고 하오. 둘 간의 대결은 빙후의 승리로 끝났소.”
뜻밖의 전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헷갈렸다. 그러다 별안간 극심한 위화감이 들었다.
멍하니 있다가 물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나현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괜찮소, 무황?”
“아! 미안합니다.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그런데 무왕 어르신은 얼마나 다치셨는지요?”
“반 식경 전에 받은 이보(二報)에 따르면 심각한 수준인 듯싶소. 눈에 띄는 외상은 없다 하나 중한 내상을 입었음에 틀림없소. 패배 직후 구세원으로 옮겨졌는데 그를 돌보았던 의원들이 내력을 상실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했다고 하오. 그뿐만이 아니라 자칫 항구적인 운신불능에 처할 수도 있다는 진단도 나왔다고 하더구려.”
속이 울렁거렸다. 한마디로 폐인이 되었다는 뜻이 아닌가.
“빙후란 여자는 어떻게 됐습니까?”
설마 아무런 피해도 없이 무왕을 쓰러뜨리지는 못했을 테지. 바람 섞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것이……, 적어도 겉보기에는 멀쩡했다고 하더이다. 무왕에게 승리를 거둔 후 두 사람을 잡아서는 하늘로 날아올랐다니 별다른 부상을 입었을 성싶진 않소.”
“두 사람이라뇨?”
“빙후는 검황자와 도왕의 시동이었던 아이를 데려갔다오.”
“어째서요?”
“그건 알 수 없소.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니. 어쨌든 무왕을 상대로 무시무시한 무위를 현시했던지라 아무도 저지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하오.”
나는 사막에서 수련을 하느라 중원으로의 귀환을 미루었던 처사를 뼈저리게 후회했다. 이틀만 일찍 돌아왔어도 무왕의 참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었다. 내가 빙후에게 이기든 지든 무왕은 무사했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한편 빙후의 이야기는 내게 천랑성 성모의 뚱딴지같았던 말을 상기시켰다.
ㅡ동서남북의 여자들!
헛소리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서역의 마후에 이어 북해의 빙후라니. 이는 남방과 동녘에도 그녀들 같은 괴물이 있을 거라는 암시가 아닌가.
나는 전날 무왕에게 들었던 해왕도의 신녀(神女)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살아있는 걸까. 아니면 그녀에 필적하는 초(超)기재가 새로이 출현한 걸까. 어느 쪽이든 성모의 기묘한 예언이 이루어지리라는 전제 하에 동쪽의 여자는 무왕이 만났던 신녀와 연관이 있을 터였다.
당장 명교로 날아가려던 나는 다리에 주입했던 원력을 풀었다. 아무리 서두른들 이제 와서 무왕을 원상태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조바심을 누르고 가기 전에 필요한 조치를 취해두어야 했다.
나는 나현에게 작별을 고하려던 언사를 다르게 바꾸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