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03
제202화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괴선이 구세원을 나서는 나를 가로막았다. 나는 급히 갈 데가 있으니 회포는 나중에 풀자고 하고는 그를 지나쳤다. 괴선은 순순히 보내주지 않고 나를 붙잡았다.
“어딜 가는데?”
“현현각에 가오.”
“거기엔 왜?”
“북해로 가는 지리를 알아보려고요.”
“뭐라? 빙궁에 갈 참이더냐?”
“그렇소.”
“어째서?”
“몰라서 묻소? 기생오라비하고 꼬맹이를 데려와야 할 거 아뇨?”
“이놈아, 제 발로 따라간 놈들을 뭐 하러 데려와?”
“정말 강압적인 분위기가 아니었소?”
“그렇다니까. 무왕이 그런 꼴이 된 건 안 됐지만 그녀에게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정정당당한 승부였거니와 무왕의 치료를 정중히 부탁하기까지 했단 말이다. 우리를 대하는 태도를 보니 여간 기품 있는 사람이 아니야. 그 맹랑한 꼬마가 왜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떼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강요의 기미는 개구리 코딱지만큼도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난감해하더구나. 기생오라비 녀석이 초청을 거절했어도 존중했을 게다.”
“그래도 직접 가서 확인해 봐야겠소.”
“이놈이, 고집은. 솔직히 말해봐라. 그녀하고 붙어볼 요량이지?”
“그러면 안 되오?”
“그러다 무왕 짝이 나면 어쩌려고, 이놈아?”
“재수 없게 그런 소리 마쇼. 나는 지지 않소.”
“삼 초 만에 도왕의 목을 날렸다고 기고만장한 모양인데 자중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게다. 내가 보건대 그녀는 신법을 특장기로 삼는 너하고는 극악의 상성이야. 네 무학의 뿌리는 무왕 아니더냐? 원조가 힘 한 번 제대로 못 써 보고 무너졌는데 네놈이라고 용빼는 재주가 있겠느냐? 그럴 턱이 없지. 그러니 꼭 그녀와 자웅을 결하려거든 좀 더 세진 다음에 하려무나. 당장도 그녀가 너보다 더 강할 듯싶지만 설혹 둘의 무력이 엇비슷하다고 해도 상성 상 네가 패배할 확률이 훨씬 높으니까.”
“잊었소? 내가 어지간한 전력의 열세를 상쇄하고도 남을 실전감각을 소유한 초천재임을. 노인장 주장대로 그녀가 나보다 강하다고 할지라도…….”
“아, 됐다, 이놈아. 쇠귀에 대고 경을 읽은 내가 어리석었지. 나는 이제 모른다. 죽건 뒈지건 네 맘대로 해라, 이놈아.”
“그렇게 불안하오?”
“만에 하나라도 네놈에게 변고가 생기면 천하는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게다. 검왕을 제외한 호랑이들이 몽땅 사라졌으니 무림의 늑대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설칠 게 틀림없다. 정사마대전이 발발해 수많은 인명이 희생될 게 불 보듯 뻔하다. 그보다 더욱 큰 문제는 해왕도의 침략이다. 그들이 해왕을 앞세우고 쳐들어오면 막을 방도가 없다. 그리되면 중원 전체가 지옥으로 화할 게다. 해귀들이 얼마나 잔혹한 무리인지 네놈이 누구보다 잘 알지 않으냐?”
내가 검왕을 거론하려고 하자 괴선이 선수를 쳤다.
“검왕이 있다 하나 세상일은 나 몰라라 하는 그 위인이 나설 성 싶지 않구나. 과거 독곡과 해왕도가 일으킨 변란에 양민들이 숱하게 죽어나갈 때도 수수방관하지 않았더냐? 저번에 외세척결 운운하며 사마의 왕들과 손을 잡은 건 순전히 눈엣가시였던 네놈을 잡기 위한 방편에 불과함을 모르진 않을 테지? 그러니…….”
내버려두면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기에 나는 괴선의 장광설을 잘랐다.
“결국 노인장이 걱정하는 건 내 안위가 아니라 천하의 안녕이군.”
“그게 그거다, 이놈아. 네놈은 네놈 혼자의 몸이 아니야. 무황이라니, 가당찮은 호칭이지만 어쨌거나 이름에 걸맞은 책임을 져야 할 터, 만인의 운명이 네놈 어깨에 걸려 있으니 부디 아무 생각 없이 폴짝거리는 개구리마냥 경거망동하지 마라. 제발 자중하란 말이다.”
“지금 나한테 간청하는 거요?”
“간청은, 이놈아! 충고지.”
“어쨌든 알았소. 별로 영양가는 없지만 노인장과의 정리를 봐서 귀담아 듣겠소.”
“오호, 그럼 빙궁 행은 보류하는 게냐?”
“그럴 순 없소. 이미 무왕 어르신과 약속을 했으니.”
“이놈이, 그래도!”
“대신 노인장과도 약속 하겠소.”
“뭘 말이냐?”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겠소. 아니, 아무 탈 없이 돌아오겠소. 약속하오.”
“하나마나 한 소리가 아니냐?”
“제길, 기껏 진심을 담아 말했더니. 그만 합시다. 그보다 강 호위와 꼬맹이는 왜 안 보이는 게요?”
“이놈이 은근슬쩍 말 돌리기는. 곰보와 꼬맹이는 아직 찾지 못했다.”
“명교의 정보망을 이용했는데도 말이오?”
“그래, 이놈아. 안 그래도 그 아이들 때문에 노심초사하던 차였다. 네놈의 권위를 빌어 명교만이 아니라 상운과 흑문까지 동원했음에도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대체 어디에 숨은 건지. 별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들은 아마 독의에게 갔을 겁니다.”
“그 인간이 어디 있는지 알고? 너도 못 찾았다며?”
“말을 잘못했소. 그들이 그에게 간 게 아니라 그가 그들을 데려갔을 게요. 방수들을 부려서 말이오. 어쨌거나 무사할 테니 염려마쇼.”
“그렇겠지?”
“그럴 거요. 그나저나 기생오라비는 어째서 여기에 있었던 거요? 광객 어르신과 함께 출정했으리라 여겼는데.”
“빨리도 묻는구나. 그 녀석은 보름 만에 돌아왔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목도하고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더라. 상대가 잔악무도한 마인이라도 차마 살수를 쓰지 못해 꿔다 놓은 보릿자루 노릇을 하다가 고민 끝에 명교로 귀환한 게지. 너와는 달리 기본적으로 심성이 고운 아이다.”
“제길, 그 자식 얘기하는데 나는 왜 끌어들이는 게요? 결국 악당들의 명줄을 자르는 게 겁이 나서 도망쳐 온 거군.”
“입방정 떨지 마라, 이놈아. 천벌 받는다. 어떤 경우에도 살인은 절대로 범해서는 안 될 악업이야. 네놈에게 백날 떠들어봐야 씨도 먹히지 않을 터이기에 말을 아꼈다만…….”
“아, 됐소. 어차피 합의에 이르지 못할 문제이니 그쯤 하쇼. 하지만 죽여야 할 악종들을 죽이지 않으면 엉뚱한 사람들이 죽을…….”
“너야말로 그쯤 해라, 이놈아. 어느 정도 사정을 헤아리니 네놈한테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있었음을 모르더냐?”
“아무 소리 안 하긴. 시도 때도 없이 잔소리를…….”
나는 말을 줄였다. 무의미한 언쟁을 중단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괴선과 티격태격하며 걷는 동안 어느새 구세원 경내를 벗어난 데다 야심한 시각이었음에도 주변에 구름 같은 군중이 몰려들어 우리를 주시하고 있음을 비로소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당혹스러우면서도 신기했다. 아무리 괴선과의 입씨름이 흥겨웠다지만 그거로도 몰아지경에 빠질 수 있다니.
* * *
현현각에 든 나는 서고에서 팔방전도를 뒤졌다. 내가 필요로 하는 부분은 두 권에 나뉘어 있었다.
북해 빙궁까지는 서역의 천랑성 이상의 장도였다. 그러나 문제는 거리가 아니었다. 사막을 제외하면 길 찾기가 크게 어렵지 않은 서역과 달리 북해는 경로를 정하기가 막막했다. 지형이 대동소이한 광대한 동토가 끝없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빙궁은 위치가 특정되지 않았다. 빙궁이 들어있으리라 추정되는 지역은 사방 수천 리에 달했다. 비유하자면 밀림에서 나무 하나 찾는 격이었다.
자미원에서 나현에게 알아 본 바 길잡이를 구한들 평북 무림 북단까지가 한계였다. 거기는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올라갈 수 있었다.
팔방전도에 담긴 북방의 지리를 최대한 숙지하며 경로를 고민하고 있는데 꼬장꼬장한 현현각주가 와서 무왕이 나를 불렀음을 알렸다. 그와 헤어진 지 반 시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의아했지만 꺼냈던 책들을 도로 서고에 꽂아두고는 바로 구세원으로 달려갔다. 유일하게 상전으로 인정하는 이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 * *
무왕의 의실에 들어서자 의원들이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나는 무왕이 누운 침상에 다가갔다. 그의 침잠된 눈빛이 나를 맞았다.
“아까는 정신이 없었다. 추태를 보였구나.”
“아닙니다, 어르신.”
“네가 벌써 떠났을까봐 저어했는데, 아직 머물러있어 다행이구나.”
그럴 의도가 아님을 알았지만 무왕의 말이 비난으로 들렸다. 그래서 변명하듯 응답했다.
“현현각에서 북해의 지리를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마치는 대로 출발할 작정이었습니다.”
“그러지 말거라.”
뜻밖의 만류였다. 설마 무왕은 괴선과 같은 걱정을 한 걸까.
나는 단도직입했다.
“제가 그녀에게 질 거라고 보십니까?”
무왕은 동문서답했다.
“……이번에도 나가 있는 동안 무력이 늘었느냐?”
“그렇습니다.”
“……그렇구나.”
그래서 어떻다는 걸까. 잠시 기다렸지만 무왕에게서 답이 나올 기미가 없자 나는 재차 물었다.
“그럼에도 제가 질 것 같습니까?”
“……모르겠구나.”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그녀가 검왕 정도라면 능히 물리칠 수 있습니다.”
“이미 검왕을 넘어섰더냐?”
“그렇지는 않지만 평수는 충분히 이룰 겁니다. 그리고 대등한 무력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무왕이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나는 그가 괴선이 말한 ‘상성’에 대해 언급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틀렸다.
“그렇더라도 좀 더 성장한 후에 가려무나. 그때도 혼자 가지는 말고 가급적 검왕과 동행하도록 해라. 빙궁엔 빙후만 있는 게 아니다. 빙왕이 병중이라지만 그 말고도 어떤 강자들이 있을지 모른다. 설령 네가 빙후에게 승리를 거둔다 해도 후과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거나 빙궁은 적지가 아니더냐?”
기분이 묘했다.
서역에서 돌아오며 나는 명교에 도착하는 대로 무왕과 함께 검총을 찾을 생각이었다. 무왕에게 내 성취를 자랑하고파서 그런 게 아니었다. 검왕을 꺾을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했지만 뒷일도 고려해야 했다.
검총은 스무 명 가까운 검호들을 품고 있었다. 나하고 악연인 반검 조추가 아니더라도 그들의 절대다수는 나에게 반감을 품고 있을 터였다. 그들의 면전에서 검왕의 목을 날리면 내 안전도 보장하기 어려울 거라는 뜻이었다. 평상시라면 그들 전부가 달려든 데도 모조리 날려버릴 수 있을 테지만 검왕과의 일전에서 중상을 당한 상태라면 일검도 받아내지 못할 공산이 컸다. 검왕을 먼저 염왕에게 보낸들 내가 뒤따라가면 손해막심이 아닌가.
그러므로 무왕의 참관은 필수불가결한 전제였다. 그가 버티고 있으면 승부가 가려진 후 검총의 검호들은 감히 나를 해코지하려들지 못할 터였다. 무왕은 방금 검왕에게 그 역할을 맡기라는 말을 한 것이었다.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괴선 어르신이 찾아왔었군요?”
무왕이 쓴웃음으로 시인했다.
“그 어른은 지금까지 제가 뭘 하려고 할 때마다 딴죽을 걸었습니다. 매번 무모하다느니, 위험하다느니 하면서요. 그 어른 예언대로라면 열 번은 죽었을 테지만 여태 멀쩡하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그럴 테니 아무 염려 마십시오. 기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귓등으로 흘리고 말았겠지만 어르신이니까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이의 지적이 옳다. 원하든 그렇지 않든 너는 많은 이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영향력을 갖고 있다. 네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감당불가의 후폭풍이 불어 닥칠 게다. 만약 일이 잘못 된다면 나는 너를 빙궁에 보낸 처사를 자책하며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번엔 내 부탁을 들어다오. 몸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절이라도 해서…….”
나는 무왕의 말을 막았다. 더 이상 그에게 비참한 언사를 쏟아내게 할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어르신의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검왕은 호위가 되어주기는커녕 빙후와 싸우고 있는 내 등에 칼, 아니 검을 꽂을 작자였지만 나는 그 점을 거론하지 않고 싹싹하게 무왕의 요청을 수용했다. 괴선의 수작으로 계획의 변경이 불가피해졌지만 내게도 모종의 심산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