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04
제203화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부담을 덜었는지 무왕의 눈빛이 편안해졌다.
그러나 고요한 호수 같았던 이전 느낌은 아니었다. 아마도 다시는 그런 무심함을 눈에 담지 못할 것이었다. 무공이 정체성이자 가진 바 전부인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랬기에 누구보다 잘 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이제 좀 쉬시지요. 다시 오겠습니다.”
무왕에게 작별을 고하고 방을 나가려는데 그가 나를 잡았다.
“나에게 물을 말이 있지 않으냐?”
“독심술까지 터득하셨습니까?”
내 넉살은 무왕을 웃기지 못했다. 그의 표정과 음성은 한 없이 진중했다. 나도 신색을 바르게 했다.
“빙후에 관해 듣고 싶습니다.”
“그녀는 전날 장왕과 겨루었던 빙왕과 마찬가지로 장공의 대가이다. 장왕이 정상일 때 그의 장공을 겪어보지 못했으니 위력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단언하기 어려우나 그녀 쪽이 우위임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녀의 진정한 무기는 장공이 아니라…….”
결정적인 대목에서 말을 얼버무리는 무왕을 내려다보며 고소를 지었다. 뜸을 들임으로써 흥미를 배가시키는 이런 기술은 언제 익힌 걸까. 하지만 오해였다. 무왕은 단지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아 말을 멈추었을 뿐이었다.
“……뭐랄까, 공간을 장악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라 할 수 있겠구나.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마치 물속에서 싸우는 것 같았다. 그녀가 발한 무언가가 내 움직임을 방해하는 바람에 그녀의 장공에 대처하는 데 애를 먹었다. 내 조언이 필요 없는 경지에 이르렀을 테지만 그녀와 대결하게 되면 되도록 전권을 넓게 가져가려무나. 아니면 초장부터 그녀에게 돌진해 육박전을 벌이던가. 그 경우 속전속결은 필수다. 그녀가 쳐놓은 무형장막에 걸리면 승산이 급격히 떨어질 게다.”
일순 소름이 돋았다.
압기를 발해 상대의 운신을 제약하는 수법은 절대지경의 고수라면 누구든 구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시적일뿐더러 범위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더욱이 비슷한 수준의 상대에겐 별 효과가 없었다. 괜한 헛심만 써서 반격을 초래할 공산이 큰 하책이었다.
그런데 무왕에게 먹혔다니. 어떤 비기가 숨어있는지는 모르지만 공력 자체가 상상 초월의 수준이라 보아야 했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무의식적인 반응이 아니라 진지하게 듣고 있음을 무왕에게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인 행위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아까도 얘기했다만 나를 위한 응징이니 뭐니 하는 소리는 하지 말거라. 다만 그녀에게 중원 무림의 위엄을 보여주길 바란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무심코 내뱉었다.
“빙후만이 아니라 해왕도의 신녀에게도 그럴 작정입니다.”
“무슨 말이냐?”
“실은…….”
나는 성모의 ‘예언’과 마녀와의 조우를 무왕에게 들려주었다. 무왕은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런 일이…….”
말을 잇지 못하는 무왕을 보며 물었다.
“동녘의 여자가 전날 죽산에서 어르신과 일전을 치렀던 그녀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상당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녀는 이미 죽었다. 밀전의 보고에 따르면 바다에서 건진 시신은 그녀의 의복을 입고 있었고 뺨에는 초승달 모양의 상처가 나 있었다고 했다.”
“어르신께서 그녀의 사체를 확인하신 건 아니잖습니까? 뭐, 꼭 그녀가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왠지 그녀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
무왕은 눈을 감았다. 대화를 종료하고 싶다는 의사표시로 받아들여 퇴실 인사를 하려는데 그가 중얼거렸다.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였어.”
나는 실소했다. 무왕이나 사마의 왕들이 개구리라면 개구리들의 신(神)쯤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우스갯소리를 내뱉을 순 없었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가야 할지 대화를 이어가야 할지 갈등하고 있는데 무왕이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그 아이’가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무학 궁구에 매진했다고 했더냐?”
가슴이 뭉클했다. 무왕이 말하는 ‘그 아이’는 내 아버지를 지칭했다.
“그렇습니다.”
“몇 년이나 그랬다고 했지?”
“만 사 년입니다.”
“대단하구나. 참으로 대단해.”
나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아버지는 그런 평가를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나도 그 아이를 본받을 참이다. 얼마나 더 살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숨이 붙어있는 날까지 무공일도에 전념하련다.”
무왕이 눈을 떴다. 강렬한 안광이 나를 찔렀다.
“향후의 너에겐 보잘것없을 테지만 내가 작은 성과라도 거둔다면 너와 나누고자 하는데 받아주겠느냐?”
별안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불감청이언정고소원입니다.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 어르신. 두고두고 배우겠습니다.”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무왕에게 보이기 싫어 나는 바닥에 엎드렸다.
“말이 나온 김에 감히 청하옵니다. 저를 어르신의 후인으로 인정해 주십시오. 저는 이미 어르신을 스승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제 마음 속엔 또 한 분의 스승이 계시지만 제 무공의 뿌리도, 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신 분도 어르신입니다. 언젠가 진정한 무황으로 우뚝 서게 되는 날 만천하에…….”
내 말을 자르며 무왕이 불쑥 물었다.
“그이가 누구더냐?”
“네?”
“또 다른 스승 말이다.”
“아! 검총에서 나오신 한(韓) 우(宇)자 경(經)자를 쓰시는 어른입니다. 수백 차례의 실전비무를 통한 그분의 가르침은 제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고마운 이구나. 지금 검총에 있더냐?”
나는 기어이 눈물을 떨구었다.
“아닙니다. 돌아가셨습니다. 작년 초봄 제가 은신한 곳에 쳐들어온 마왕에게 변을 당하셨습니다.”
“저런.”
한우경의 목이 날아가던 그날의 참상이 생생하게 떠올라 먹먹해졌다. 오열을 간신히 참고 있는데 무왕이 기립을 명했다.
“그만 일어서거라. 보이지 않으니 이상하구나.”
나는 잽싸게 눈물을 훔치고 몸을 일으켰다.
“허락해주시는 겁니까?”
“네 말을 돌려주마. 불감청이언정고소원이다.”
나는 다시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제자 충, 사부께 정식으로 인사 올립니다.”
무왕에게선 화답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미소를 짓고 있음을 알았다.
* * *
검총에 보냈던 사자는 엿새 후 검왕에게서 예상치 못했던 답변을 받아왔다.
검황자는 파문한지 오래이니 그를 구하러 빙궁에 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앞으로 강호와는 일절 교류하지 않을 터이니 입총전을 치르기 위한 경우를 제외하면 검총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했다. 누구든 경고를 어기면 살아나가지 못할 거라는 협박을 덧붙이면서.
뒷말이 나를 겨냥한 것임은 불문가지였다. 헛웃음이 나왔다. 검왕은 스스로를 뇌옥에 가두었음을 모르는 걸까. 검총에 머물러있기만 하면 안전할 거라 믿는 걸까. 내가 그와 검호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무위에 이를 날이 결코 오지 않으리라 확신하는 걸까. 지금 당장도 일대일로 붙으면 그를 황천길로 보낼 수 있음을 안다면 어떤 낯짝을 할까. 미룰 게 아니라 검총의 검호들을 견제할 고수들을 대동하고 검총을 찾아 현실을 일깨워줄까.
마지막 질문을 두고 심각하게 고민했으나 나는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실행에 옮기려면 정맹의 원로들을 대거 동원해야 할 터인데 썩 내키지 않아서였다. 전적으로 신뢰하기도 어렵거니와 그런 문제로 그들에게 신세를 지기는 싫었다.
검왕의 동행 거절에 괴선은 울상이 되었다.
하도 낙담하는 통에 나는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그를 위로할 뻔했다. 기실 나는 검왕이 나와 함께 빙궁 행에 나서면 도중에 그를 자극해 승부를 볼 작심이었다. 나에겐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속셈을 밝히면 괴선이 기절초풍할 게 빤한지라 입에 자물쇠를 채웠다. 굳이 천하의 안위를 짊어진 양 전전긍긍하는 그를 괴롭힐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괴선의 만류를 뿌리치고 빙궁으로 떠날 것을 천명했다. 그와 무왕에게 충분한 성의를 보였으니 이제는 내 뜻대로 해도 될 터였다. 하지만 출발을 하루 늦췄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말리는 괴선 때문이 아니었다. 가기 전에 볼 사람들이 있어서였다.
* * *
다섯 달 만의 재회였다.
구세원의 다실에 들어오자마자 금수독군과 은수독군은 경쟁이라도 하듯 돌바닥에 이마를 박았다. 나는 그들에게 착석을 권했다.
“여기들 앉으시지요.”
두 노인이 등짝에 창이 꽂힌 것처럼 움찔거렸다. 내 바뀐 말투에 놀란 것이었다.
“저희가 어찌 감히 주군과 동석을…….”
“독곡의 수장들이니 그럴 자격이 차고도 넘칩니다. 어서 앉으십시오.”
은수독군이 먼저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러고는 탁자의 오른편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눈치를 보던 금수독군도 냉큼 그를 따라했다.
“두 분의 활약은 익히 전해 들었습니다. 마졸들이 두 분의 그림자만 보여도 정신 줄을 놓고는 오줌을 질질 싼다고 하더군요. 두 분의 주군으로서 뿌듯합니다.”
내 치사에 노인들은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기실 빈말은 아니었다. 척마단에 배치된 독군들은 마인들에게 저승사자 이상의 공포를 안기는 사신들로 위명을 떨쳤다. 그들을 만나면 죽음이 확실시될 뿐만이 아니라 몸이 녹는 지독한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해야하기 때문이었다. 나현이 알린 바에 따르면 양 독군의 독장에 당하기 전에 자결을 결행하는 마인들이 속출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좌우에 앉은 노인들을 둘러보았다.
“무도한 무리들을 척살하는데 여념이 없을 두 분을 부른 것은 따로 부탁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노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부탁이라니, 받들기 어렵사옵니다. 하명만 하시옵소서. 충심을 다해 받들겠사옵니다.”
“고맙습니다.”
금수독군들은 내 감사인사에 기뻐하기보다는 안절부절못했다.
내가 노인들을 정중하게 대한 건 그들을 놀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전날엔 그들을 누르고 주도권을 틀어쥐기 위해 일부러 강압적인 행태를 보였으나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중원에서의 내 위상을 절감했을 테니 반발은 꿈도 못 꿀 터였다.
나흘 전 받아본 나현의 첩지엔 독군들과 정맹 원로들의 상견례 장면에서 나온 어색하고 기괴한 분위기가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그에 따르면 오대세가의 수뇌부는 내 직속수하라 할 두 독군을 몹시 어려워했다고 했다. 콧대 높은 정파 무림 명숙들의 저자세에 독군들은 어리둥절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들은 거들먹거리지는 않았다. 그들을 중원으로 부르며 내가 호가호위의 우를 범하지 말라고 일렀기 때문이었다.
양편이 서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바람에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음에도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고 했다.
나는 사담을 늘어놓지 않고 용건으로 직행했다.
“두 분 모두 독곡으로 돌아가십시오.”
독군들의 면상이 돌처럼 굳었다. 금수독군은 찍소리도 못했지만 은수독군은 일단 ‘존명’이라고 받았다. 그러면서 주저하며 물어왔다.
“혹시 저희가 무슨 잘못을 했사옵니까, 주군?”
“아닙니다, 은군. 공만 그득할 뿐, 잘못은 일점도 없습니다.”
내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금수독군이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저희를 독곡으로 쫓아버리시려는 건지 여쭈어도 되겠사옵니까?”
“축출이 아닙니다, 금군. 부탁이라고 했잖습니까?”
나는 노인들의 의구심을 풀어주었다.
“명교의 인사들을 데리고 가십시오. 전날 곡을 떠나며 내가 두 분께 드렸던 당부를 잘 이행하고 있음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경험이 없다보니 곳곳에서 시행착오가 있었다지요? 이번에 데려갈 이들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들을 적절한 자리에 배치한 연후엔 절정 이상의 무위를 가진 수하들을 추려서 다시 중원으로 오십시오. 전부는 말고 일부는 독곡의 질서 유지를 위해 남겨두십시오. 비율은 독군들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금은독군의 면상에 희색이 만연했다.
“알아서 잘 하시겠지만 이번에 거느리고 올 이들에게 나와 일체임을 주지시켜 주시길 바랍니다.”
금수독군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은수독군은 말귀를 알아들었다.
“주군의 위신에 누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수하들의 언행을 철저하게 단속하겠사옵니다.”
“고맙습니다.”
벌써 익숙해졌는지 독군들은 더 이상 내 감사 표명에 불안해하지 않았다. 고소를 자중하며 두 번째 용건을 꺼냈다.
“두 분께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