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06
제205화 그걸 알면 어쩌려고?
여인은 방금 자신이 들은 게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닐 거야. 아니겠지. 미치지 않고서야.”
혼자 중얼거리던 여인이 별안간 앙칼진 음성을 쏟아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니?”
“고맙다고 했다.”
“아니, 나를 뭐라고 불렀냐고?”
“글쎄, 뭐라고 했더라? 아리? 오리? 우리? 이리? 저 녀석한테 듣긴 했는데 그새 까먹었네. 그 비슷한 이름이었는데.”
“시치미 떼지 마.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동태로 만들어 백곰들 먹이로 줄 거야.”
똥마려운 표정으로 나와 여인의 대화를 듣고 있던 검황자가 개입했다.
“진정하오, 공주. 형이 실언한 건 맞지만 너무 과한 표현이오.”
검황자의 중재는 그가 바라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나와 여인이 동시에 반발했기 때문이었다.
“실언이라니? 네 눈엔 저 짝눈이 안 보인단 말이냐?”
“과하다뇨? 저자의 망언은 죽음으로도…….”
말을 하다 말고 여인이 고개를 휙 돌리더니 나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또! 역시 잘못 들은 게 아니었어.”
검황자는 나에게 달려들려는 여인을 말리느라 본의 아니게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아야 했다. 그의 품안에서 길길이 날뛰며 여인이 나를 죽입네 마네하며 폭언을 쏟아냈다. 나는 화가 나기보다는 중원에서 일만 리나 떨어진 북해에서 나고 자랐을 여인이 어떻게 중원어로 된 욕설을 그렇게 자유자재로 구사하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여인의 악다구니를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던 나는 그녀의 밑천이 떨어지기를 기다려 반격했다.
“어이, 짝눈. 나를 보지 말고 그 녀석을 봐. 안 보여? 너를 보는 그놈 눈에서 정나미가 뚝뚝 떨어지는 게.”
원래는 오지의 일개 공주 주제에 대륙 무림의 황제에게 막말을 퍼부은 객기와 우둔함을 엄히 꾸짖으려 했다. 하지만 우물 안에서만 산 개구리는 바깥세상의 크기와 위엄을 실감하지 못하는 법이었다. 알아듣지 못하는 개구리를 가르치려 해봤자 내 입만 아플 뿐이었다. 그래서 보다 직접적인 교훈을 줄 수 있는 충격요법을 택했다. 탁월한 판단이었다.
투명하리만치 하얀 얼굴이 파랗게 질리면서 여인이 비명 같은 목소리를 토해냈다.
“내가 싫어졌어요, 공자님?”
검황자가 경기를 일으키려는 여인을 달랬다.
“그럴 리가 있소? 하지만 그만 했으면 하오.”
여인은 앞의 말만 들었다.
“이 거짓말쟁이. 죽여 버릴 테다.”
벼락 같이 나에게 소리친 여인이 놀랍게도 검황자를 뿌리치고 내게 무언가를 날렸다. 수정으로 만들어진 비수였다.
가만히 있었으면 비수는 내 이마에 박혔을 터였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런 꼴을 당하기엔 내가 너무 강했다.
가볍게 고개를 비트는 것만으로 비수를 흘려낸 나는 여인에게 쇄도해 그녀의 목을 틀어쥐었다. 그 순간 나를 대신해 비수를 맞은 뒤편의 조각상이 산산조각 났다.
검황자가 여인을 들어 올리는 내 팔을 붙잡았다.
“참으시오, 형. 제발 그녀를 놔 주시오.”
나는 검황자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고 공포와 원독이 절반씩 담은 여인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이 여자는 나를 죽이려고 했다. 나에 대한 살의를 행동에 옮긴 년을 봐 주라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잊었냐?”
손아귀에 살짝 힘을 주자 여인의 눈빛에서 원독이 사라지고 공포만 남았다. 단순한 엄포가 아님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검황자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녀는 형이 누군지 잘 몰라서…….”
“거짓말하지 마, 인마. 참견도 하지 말고. 자꾸 군소리하면 그냥 확 꺾어버릴 테다.”
검황자에게 재갈을 물린 나는 퇴로를 궁리했다. 여인의 숨통을 끊을 수는 없었다. 빙궁과 원수가 되는 게 부담스러워서가 아니었다. 이만한 일로 살수를 쓴다면 창피하지 않은가. 천둥벌거숭이 같은 여인과 동급으로 떨어질 수는 없었다.
그렇더라도 여인을 그대로 놓아주는 건 너무 싱거웠다. 그래서 안광에 여인이 감당할 수 없는 원력을 실어 그녀를 을렀다.
“이놈을 봐서 한 번은 용서해주겠다. 하지만 한 번만 더 주제넘은 짓을 하면 모가지를 뜯어버릴 거야. 알아들었으면 눈을 깜빡여봐, 짝눈.”
여인이 미친 듯이 눈을 깜빡거렸다. 나는 여인을 내팽개치듯 던져버렸다. 검황자가 잽싸게 그녀를 받아냈다. 여인은 감히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검황자의 품에서 오열했다. 그녀가 울음을 터뜨린 직후 밖에서 방안의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음성이 날아들었다.
“왜 그러니, 아리아?”
잠시 후 도왕의 시동이었던 소동과 함께 방에 들어선 이는 인자한 인상의 노파였다.
무왕에게서 들었던 대로였다. 금발에 벽안. 호수처럼 잔잔한 눈빛.
늙었지만 젊은 날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노파가 나를 일별하고는 검황자에게서 여인을 건네받았다. 이번엔 노파에게 안긴 여인이 펑펑 울었다. 그러면서 나를 힐끗거리는 양이 내게 당한 걸 노파에게 일러바칠지를 두고 갈등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가 나를 보았을 때 눈을 부라렸다. 여인이 움찔했다. 여인을 제압한 나는 노파에게 포권을 취했다.
“전충이 빙후를 뵙습니다.”
여인을 다독인 노파가 내게로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머금었다.
“나를 그렇게 부르나요? 근사한 호칭이군요. 어서 와요, 전왕. 중원의 위대한 영웅에 대한 이야기는 귀가 따갑게 들었어요. 이이가 조만간 이리로 올 거라고 해서 기대가 컸는데 드디어 만나는 군요. 본궁에 온 걸 환영해요. 하지만 여기는 담소를 나누기 적당한 장소가 아니니 내 거처로 자리를 옮겼으면 하는데, 어떨까요?”
노파의 태도엔 기품이 넘쳐흘렀다. 여인이 할머니라고 부르는 걸 보아 조손지간일 터인데 어찌 이리도 다를까. 성별이 바뀌었지만 호부견자(虎父犬子)라는 말이 딱 제격이었다.
여인을 떼어놓고 검황자에게 맡긴 노파가 꼬마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 나는 다시 한 덩어리가 된 여인과 검황자를 힐끗 쳐다보고는 노파의 뒤를 따랐다.
* * *
여왕의 처소라고하기엔 너무나 소박했다. 마치 무왕이나 장왕의 와옥을 보는 것 같았다. 침상 말고는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나에게는 너무 작아 새로 의자 하나를 가지고 와야 했다. 아이는 의자를 마다하고 노파의 무릎에 않겠다고 고집했다. 노파는 내 양해를 구하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대접할 게 물밖에 없군요. 여긴 차 같은 걸 마시지 않아요. 그렇다고 우리가 먹는 버섯이나 생선을 드리기도 뭐하네요. 다른 곳에서 온 분들은 입맛에 맞아하지 않을뿐더러 배탈이 나기 일쑤이니.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고맙군요. 참, 사과할 일이 또 있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아까 거기서 일었던 소동을 밖에서 들었어요. 모른 체 들어가기도 뭐해서 끝까지 다 들었지 뭐예요.”
나는 노파의 말을 곡해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일부러 그러신 것도 아닌데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 내가 사과하려는 건 손녀딸의 언행이에요. 귀한 손님에게 그런 결례를 했으니 참으로 황망하네요. 정말 미안해요.”
“마음에 담아두고 있지 않으니 괘념치 마십시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손녀딸을 위해 변명하자면 본성이 나쁜 아이는 아니에요. 그 아이가 철부지가 된 건 모두 내 탓이에요. 부모를 일찍 여읜 게 가여워 응석을 다 받아주며 키웠더니 그만 버릇없는 아이로 자랐지 뭐예요. 나는 요 근래까지도 그 정도인 줄은 몰랐어요. 등잔 밑이 어두운 꼴이었다고나 할까요.”
뭐라 대꾸할 말이 없어서 잠자코 있었다. 그랬더니 노파가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실은 일전에 중원에 나가게 된 것도 그 아이 때문이었어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명교를 찾았을 때 노파는 병석에 누운 지아비를 대신해 설욕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 금발에 벽안이라는 특이한 외양으로 볼 때 그녀의 부군이 전날 장왕에게 패했던 빙왕임은 불문가지였다.
“내 남편의 복수전은 핑계였어요. 진짜 목적은 검황자를 이리로 데려오는 것이었지요. 이건 비밀이니까 그이에게는 말하지 말아요.”
“공주가 빙후께 그 녀석을 데려오라고 했다는 말입니까?”
“그래요. 그이의 초상화를 보더니 홀딱 반해서는 꼭 실물을 보고 싶다지 뭐예요. 몇날 며칠을 졸라대는 통에 결국 뿌리치지 못하고 나섰던 거예요. 명교 사람들에게 중원의 초신성을 만나고 싶다는 구실로 그이를 찾아달라고 부탁하려 했는데 마침 그 자리에 있지 뭐예요. 그것만 해도 망외의 행운이었는데 그이가 내 초청을 선뜻 수락해서 너무 쉽게 원을 이루었어요. 감사하게도.”
속이 쓰렸다. 결과적으로는 애꿎은 무왕만 피해를 입은 셈이 아닌가.
나는 시선을 내려 꼬마를 바라보았다. 내 눈길을 느낀 듯 붉은 색이 감도는 목걸이를 장난감인 양 만지작거리고 있던 꼬마가 눈을 들어 나를 마주보았다.
묻지도 않았는데 노파가 목걸이에 대해 설명했다.
“본궁의 무상지보 중 하나인 홍옥이에요. 편의상 그런 이름을 붙였지만 일반적인 보옥은 아니에요. 특별한 효능이 있죠. 전왕이나 검황자처럼 심후한 내공을 지닌 이들이 아니면 이곳의 혹한을 견딜 수 없어요. 하지만 이 홍옥을 지니고 있으면 우리 같은 빙족이 아니더라도 체온을 보존할 수 있어요.”
그제야 의문이 풀렸다. 나는 꼬마가 몇 겹의 모피를 두르고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꼬마는 얇은 홑옷 한 벌만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조화인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기물(奇物) 덕분이었다.
“다행이군요. 혹여 아이가 얼어 죽을까 봐 무왕 어르신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의도적으로 무왕을 입에 올리며 나는 꼬마의 반응을 살폈다. 꼬마는 무덤덤했다. 그러나 온유했던 노파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의아했다.
노파는 어째서 정색했을까. 내가 꼬마를 데려가려고 왔음을 이제야 알아차린 걸까. 그러고는 손님에서 꼬마를 빼앗으려는 악당으로 나에 대한 인식을 전환한 걸까. 대체 이 꼬마가 뭐길래.
나는 꼬마를 매개 삼아 노파에게 응수타진 했다.
“할아버지가 보고 싶지 않니?”
내 질문에 아이는 멀뚱멀뚱 나를 쳐다볼 뿐이었지만 노파의 면상은 낯 술에 취한 듯 벌겋게 달아올랐다. 응답도 그녀의 입술에서 나왔다.
“소아는 여기 있고 싶어 해요.”
나는 노파를 직시했다.
“죄송하지만 소아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그들이 말해주지 않던가요? 소아는 본인이 원해서 나를 따라왔어요.”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다만 지금도 소아가 이곳에 머물기를 원하는지 듣고자 할 따름입니다.”
“물론이에요. 그렇지 않니, 소아야?”
꼬마가 노파와 나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강아지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나도 귀여운 모습이었다. 노파가 재차 물었다.
“어서 말해보렴, 소아야. 여기서 나하고 함께 살래, 아니면 저이를 따라 돌아갈래?”
노파의 음성엔 확고한 자신감이 배어있었다. 강요의 기미는 전혀 없었기에 나는 잠자코 꼬마의 답변을 기다렸다. 꼬마가 나를 빤히 주시했다. 아기사슴 같은 눈망울을 보는 순간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러면서 심중에 강렬한 보호본능이 일었다. 내 마음을 들여다 본 듯 꼬마가 방실방실 웃었다. 그러고는 앙증맞은 목소리로 뚱딴지같은 질문을 던졌다.
“누가 더 세요?”
나는 반사적으로 노파를 보았다. 그녀의 만면에 당혹감이 깔려있었다. 그녀도 내 눈에서 똑같은 감정을 읽었으리라.
“무슨 말이니, 소아야?”
“할머니하고 저 아저씨 중에 누가 더 센지 알고 싶어요.”
이번엔 내가 물었다.
“그걸 알면 어쩌려고?”
“소아는 더 센 사람하고 함께 있을래요. 그러니까 한 번 싸워 봐요.”
천진난만한 얼굴로 맹랑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태연하게 내뱉은 꼬마가 노파의 무릎에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