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07
제206화 저기요, 할머니!
내심 노파와의 일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이런 식으로 풀릴 거라고는 상상을 못했기에 기가 막혔다. 노파도 황당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꼬마가 올려다보자 이내 억지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안 그래도 사상 최강의 전사라는 전왕의 신위를 보고 싶었는데 잘 됐구나.”
밤톨 같은 꼬마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노파가 내게로 시선을 옮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때요, 전왕? 소아의 청이 아니더라도 당신과는 한 번 무력을 견주고자 했는데. 괜찮다면 내게 기회를 줄래요?”
어찌 마다하겠는가. 빙후와의 비무가 빙궁 방문의 제일목적이었는데.
나는 바로 기립함으로써 허락의 의사를 밝혔다.
우리는 빙궁을 나왔다.
꼬마가 따라오겠다고 매달렸으나 위험하다는 이유를 들어 노파는 그의 동행을 불허했다. 금방 돌아올 거라는 노파의 설득에도 꼬마는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두 노소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나는 위화감이 들었다. 어째서 노파는 꼬마를 단호하게 내치지 못하고 질질 끌려 다닐까. 기실 문제는 노파가 아니었다. 얼토당토않은 떼를 쓰는 꼬마의 편을 들어주고 싶은 심사를 자각한 나는 기이한 거부감을 느꼈다. 그래서 꼬마에게 야단을 쳤다.
“멋대로 굴지 마. 구경하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니까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 가시지요, 어르신.”
의식적으로 꼬마의 눈을 회피한 나는 먼저 몸을 날렸다. 아이의 울먹이는 소리가 나를 따라왔다. 돌아가서 아이를 달래주고픈 욕구를 억제하느라 적잖은 심력을 써야 했다. 어쨌거나 내 꾸중이 효과가 있었던 듯 잠시 후 노파가 꼬마를 떨궈놓고 나를 쫓아왔다. 그러고는 앞장을 섰다.
그녀가 나를 이끈 곳은 사막 같은 빙원이었다. 아득히 멀어진 빙궁의 돌출 부분을 제외하면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빙판이 지평선까지 뻗어있었다. 노파를 따라 지상으로 하강한 나는 그녀로부터 칠팔 장 떨어진 곳에 섰다. 내가 착지하기를 기다렸던 노파가 손바닥이 보이게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럼 시작할까요?”
“잠깐만요. 그 전에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철봉과 옥소를 꺼내는 나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보면서도 노파가 손을 내렸다.
노파를 앞에 두고 춤을 추려니 머쓱했다. 전날 호천봉에서 평생의 심득이 담긴 독무를 펼치던 무왕의 기분이 이러했을까.
광무신공과 오절신공의 절기들을 잇달아 선보인 나는 막판에 순간이동과 광폭을 두고는 갈등했다. 그 비기들까지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 노파도 무왕과의 대결에서 밑천을 다 까발리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합리화의 근저에 나약함이 깔려있음을 인지한 나는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아낌없이 쏟아냈다.
펑!
최대치에 준하는 원력을 담은 광폭이 빙원에 거대한 분화구를 만들었다. 그러고서 내가 춤을 멈추자 노파가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굉장해요. 정말 굉장해요. 특히 마지막에 드러냈던 초절한 신법은 내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군요. 마치 환상 같았어요.”
나는 노파의 감상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뒷부분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당신의 무학을 미리 보여준 거죠? 상대가 되지 않을 터이니 나더러 알아서 승부를 포기하란 뜻인가요?”
“그럴 리가요. 저는 다만 공정을 기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공정이라뇨?”
“무왕 어르신께 두 분의 비무에 관해 자세하게 들었습니다.”
말귀를 알아들은 노파가 탄성을 내질렀다.
“아아! 당신은 듣던 것과는 많이 다르군요. 이렇게나 정정당당한 성정이라니.”
대체 나에 대해 어떤 평판이 돌아다니고 있단 말인가.
“전왕의 배려, 감사해요. 하지만 양보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혹시라도 그걸 기대했다면 미안해요.”
나를 조롱하려는 의도가 아님을 알면서도 모욕감을 느꼈다.
“부디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저도 그럴 작정입니다.”
노파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그럼 이제 시작해도 될까요?”
캉!
철봉과 옥소를 맞부딪침으로써 나는 대답을 대신했다. 그 순간 노파의 쌍장에서 폭사된 가공스러운 빙기가 비무의 개시를 알렸다.
* * *
빙후가 나와 극악의 상성일 거라던 괴선의 주장은 사실이었다.
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나는 그녀가 공간에 펼쳐놓은 무형의 장막을 거둬내는 데 애를 먹었다. 무왕의 표현대로 흡사 수중에서 움직이는 듯 운신에 지장이 상당했다. 빙후의 빙장에 걸리지 않으려면 초장부터 순간이동을 구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십 초도 견디기 어려웠을 터였다.
빙후는 내 공격을 두터운 호신강기로 막아냈다. 광환이나 광우, 혹은 광망은 그녀의 방어막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그나마 광참과 광폭이 효과를 보였지만 그녀의 본체를 침범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충격을 주는 정도로는 그녀를 저지할 수 없었다.
명백한 고전이었다. 무왕의 충고처럼 기습을 통한 속전속결만이 승리를 기대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이었으나 이미 물 건너 간 일이었다. 상성만이 아니라 무력 자체에서도 빙후는 객관적으로 나보다 반수는 위였다. 빙공의 수준도 내 무공에 뒤떨어지지 않을뿐더러 그녀의 공력은 내 원력을 능가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승부였으나 나는 악착 같이 버텼다. 그러나 결국 사십여 초 만에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한 빙후가 강맹한 빙장을 내 동체에 퍼부었다. 순간이동으로써 간신히 묵사발이 되는 참사를 면한 나는 으깨진 얼음판에 처박히며 패배를 선언했다.
“제가 졌습니다.”
후속타를 날리려다 손을 거둔 빙후가 내 면전에 섰다. 그러고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나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전왕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그래요?”
뜨끔했다.
“전왕은 타고난 전사라고 들었어요. 하지만 전왕의 손속은 너무 무미건조했어요. 내게 전의가 일지 않았기 때문일 테지요?”
“…….”
“역시 그렇군요. 다시 해요. 이번엔 진짜를 보여줘요.”
“다치실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내가 말끝을 흐리자 빙후가 전에 없이 강렬한 안광을 발산했다.
“나를 무시하지 말아요. 이래 뵈도 신계(神界) 최강을 다투던 전신(戰神)의 피가 흐르고 있답니다.”
“……알겠습니다.”
“조심해요. 이번엔 나도 전왕의 생사를 고려하지 않고 제대로 할 테니까.”
빙후의 결의는 내게 투지를 일으켰다. 생사투를 치르기엔 아직 모자랐으나 시발점으로 삼기엔 충분했다.
* * *
이차전의 양상은 판이했다.
내가 전술을 완전히 바꾼 탓이었다. 나는 속전속결로 허를 찌를 게 아니라면 전권을 넓게 가져가라던 무왕의 충고를 따랐다. 기실 그 충고가 아니었더라도 그렇게 할 참이었다. 그것 말고는 승산이 희박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빙후와 십이삼 장이나 떨어진 나는 원거리에서 공격을 퍼부었다. 광환과 광우로 끊임없이 빙후의 방어막을 두드리며 약한 부분을 찾았다.
빙기의 장막에 나를 가두지 못한 빙후는 나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줄기차게 전진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근접을 허용하지 않았다. 신법의 속도는 별 차이가 없었으나 내게는 순간이동이라는 특장기가 있었다. 그녀가 일이 장만 다가서도 나는 잽싸게 내뺐다.
사방이 탁 트인 조건이 나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예컨대 비처의 지하광장이었다면 아무리 넓어도 결국엔 벽에 몰렸을 터였다. 사막 같은 빙원에서 빙후는 나를 잡아내지 못했다.
거창하게 생사를 걸고 싸우기로 했으나 우리의 두 번째 대결은 격렬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쫓고 쫓기는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주도권은 쉴 새 없이 달아나는 내가 쥐고 있었다. 빙후의 장공은 나에게 아무런 타격을 입히지 못하는 반면 나는 꾸준히 그녀에게 생채기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빙후의 호신강기를 집요하게 공략하던 내 광환과 광우는 조금씩 그녀의 방어막에 균열을 일으켰다. 아직 빙후의 몸에 닿으려면 어림도 없었지만 심각해진 그녀의 얼굴은 내가 퍼붓는 빛줄기가 내기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방증했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그녀가 무너지기를 기다렸다.
어느새 훌쩍 일천 초가 지났다. 중천에 떠 있던 해도 서녘 하늘로 기울어갔다. 나와 빙후는 최초의 공방전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었다. 우리 둘 다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내공을 지니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슬슬 결판을 지어야 할 때임을 알았다. 내 원력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날 터였다. 처음부터 십 성 이상의 원력을 사용한 후과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빙후의 호신강기를 간질이는 정도에 그쳤을 터이고 단순한 추격전이 밤까지 이어졌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만큼 거칠어진 빙후의 호흡을 가늠하며 빈틈을 노렸다. 기회는 한 번뿐이었다. 단숨에 승부수를 성공시켜야 했다. 실패하면 생존을 보장할 수 없었기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제 비로소 생사투에 임한 셈이었다.
광우를 빙후가 두른 방어막의 일점에 집중시키며 그녀의 긴장을 유발한 나는 일시지간 내 공세가 느슨해진 틈을 타 그녀가 숨을 들이키는 찰나 순간이동을 발해 그녀에게 붙었다. 아까부터 노리던 하체 부근의 호신강기를 광참으로 베어낸 후 광폭을 쏠 작심이었다. 빙후는 아마도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승부를 매조지하려면 이 수밖에는 없었다.
나는 최후의 순간 출수를 보류했다. 빙후의 안위를 염려해서가 아니었다. 이 장면의 도래를 그녀가 고대하고 있었음을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몇 시진이나 간을 보는 동안 빙후도 초극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내가 달려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을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 기습을 역으로 이용해 단번에 승기를 잡을 수단을 준비해 두었을 터였다.
나는 그녀가 어떤 덫을 놓았을지 짐작했다. 틀리면 끝장이었다. 빙기의 장막에 들자마자 그녀는 전력을 다해 나를 짓뭉개려 들 게 틀림없었다.
순간이동으로 빙후의 지척에 이른 나는 우측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고는 아슬아슬하게 빙후가 발한 무형장막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곳이야말로 진정한 함정이었다. 내 피신을 예상한 빙후는 거기에 보다 강력한 빙기를 깔아두고 있었다. 나를 잡아놓고는 좌장으로 결정타를 날릴 심산이었을 터였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수읽기를 간파했다. 그래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려는 시늉만 하고는 위로 솟구쳤다. 실은 그쪽도 위장이었다. 묵직한 내기를 쏘아 올려 빙후를 현혹한 후 애초의 계획대로 그녀의 하반신을 공략했다. 내가 퇴로가 없는 아래쪽으로 몸을 낮출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빙후가 당황하는 기색이 감지되었다. 그녀의 다리에 광참과 광폭, 그리고 다시 한 번 광참을 연이어 발출한 나는 그녀의 일장을 얻어맞고는 수십 장이나 튕겨나갔다.
속이 망가졌다. 대비를 했고 상당부분 흘려냈음에도 엄청난 타격을 입은 것이었다. 기실 목숨을 부지한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빙후는 사전에 공언했던 대로 정말로 나를 끝장낼 심산이었다.
운신불능에 처한 나는 느릿느릿 나에게로 다가오는 빙후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그녀가 가일수를 하려 든다면 대처할 방도가 전무했다. 그럼에도 나는 평안했다. 비무 시에 빙후가 드러낸 살의는 확연했지만 그녀가 무방비 상태의 나를 공격할 것 같은 불안감은 전혀 생기지 않았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내 앞에 이른 빙후가 내 머리맡에 쪼그려 앉았다. 그녀가 손을 들어 올렸을 때는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러나 주름으로 덮인 하얀 손은 내 면상을 뭉개는 대신 이마를 부드럽게 어루만졌을 뿐이었다.
“굉장했어요. 너무나도 짜릿했고요. 지금도 심장이 주체를 못하고 펄떡거리는 군요. 전왕을 경시한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그거 알아요? 나는 전왕에게 반했어요. 스물일곱 살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오십 년만 젊었다면 전왕을 내 사내로 만들기 위해 모든 걸 걸었을 거예요.”
농이 아니었다. 빙후의 눈빛은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진소월의 눈에 일렁이던 연정을 담고 있었다.
‘저기요, 할머니!’
꿀꺽.
침을 삼키고 있는데 빙후가 별안간 정색했다.
“그런데 왜 나를 살려준 거죠? 설마 나를 무시한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