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08
제207화 신의 힘이라니요?
말을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에 나는 묵묵부답했다. 입을 열면 목소리보다 피가 먼저 터져 나올 터였다. 내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빙후가 대답을 재촉했다.
“어서 말해 봐요, 전왕. 왜 나를 봐 줬는지. 자칫하면 자기가 죽을 뻔했잖아요?”
빨리 답을 주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기에 나는 무리하게 운공을 시도했다. 그러나 꽁꽁 얼어붙은 혈맥이 고드름 부러지듯 깨지는 느낌이 올라오자 얼른 중단했다. 무왕의 전철을 밟을 수는 없었다. 극통으로 인해 내가 인상을 쓰자 빙후도 미간을 모았다.
“아픈가요? 겉은 멀쩡한데. 하지만 속은 온전치 않겠죠? 이걸 어쩌나? 도와주고 싶지만 괜한 긁어 부스럼이 될 수도 있으니 그러지도 못하겠고. 설마 이대로 죽는 건 아니겠죠? 그러면 안 돼요. 제발 힘내요, 전왕.”
빙후의 음성에서는 진심이 묻어났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얄미웠다. 그렇게 내가 걱정된다면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쇼, 할머니.
내 눈빛을 곡해한 빙후가 손바닥을 내 명치에 갖다 댔다.
“도움을 바라는 모양이군요. 알겠어요. 한 번 해 보죠. 빙기를 불어넣을 테니까 운기를 해 봐요.”
나는 급히 소리쳤다.
“잠깐만요, 할머니!”
우려했던 대로 목소리와 함께 핏덩이가 튀어나왔다. 빙후의 표정이 변했다. 내 입에서 분출된 갓난아이 주먹만 한 울혈이 그녀의 뺨을 때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 뭐라고 했나요?”
이런 제길, 지금 그게 중요하오?
물론 나는 본심을 내뱉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다급한 상황인지라 실언…….”
빙후가 내 변명을 중단시켰다.
“비인.”
“네?”
“비인이라고요.”
“무슨 말씀이신지?”
“내 이름이에요. 앞으로는 나를 그렇게 불러줘요.”
쿨럭. 기침과 함께 다시 한 번 큼직한 핏덩이가 내 목구멍을 빠져나왔다. 나는 잽싸게 말을 딸려 보냈다.
“알겠습니다, 비인. 멋진 이름이네요.”
빙후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빙후에게 양해를 구한 나는 치유에 전념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혈맥이 풀렸다. 비로소 안심하고 운공에 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어느새 사위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천공에 뜬 보름달이 병자의 안색만큼이나 창백했다.
내내 내 곁을 지켰던 듯 지친 기색의 빙후가 반색했다.
“이제 괜찮나요, 전왕?”
내심 안도했다. 빙후가 나를 ‘충’이라고 부를까봐 조마조마했더랬다.
“그럭저럭 좋아졌습니다.”
“다행이네요. 직격 당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용번(龍飜)에 맞았는데. 전왕은 불사지체라는 소문이 돈다더니 사실이었군요.”
그 무시무시했던 빙장공이 용번이었던가. 장왕의 공진과 천뢰보다 두 뼘은 윗길의 위력이었다.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왔더라면 회복할 여지없이 즉사했을 터였다.
새삼스레 등줄기가 서늘해진 나는 찬사를 늘어놓았다.
“제가 지금껏 접했던 최고 최강의 절기였습니다. 덕분에 안목을 크게 넓혔습니다, 어르……, 아니 비인.”
빙후가 만면에 깔았던 웃음기를 지웠다.
“하지만 전왕을 어쩌지 못했잖아요?”
그래서 아쉽단 말인가? 나를 끝장내지 못해서?
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말이오, 할머니?
빙후가 내 눈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뜨끔했다. 설마 진소월처럼 속을 읽는 능력이 있는 걸까.
기우였다.
“이제 말해 봐요, 전왕. 어째서 결정적인 순간에 칼을 거둔 거죠? 마음만 먹었다면 내 무릎을 박살내고 허리도 자를 수 있었잖아요?”
꼭 그렇지는 않았다. 전자는 맞지만 후자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더라도 내가 겨냥점을 바꾸지 않았다면 빙후는 중상을 면치 못했을 터였다.
“비인을 해치기 싫었습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예상치 못했던 답변이었던 듯 빙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러다 본인이 죽을 수도 있었잖아요?”
“어떻게든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안 되면요?”
“뭐, 하는 수 없지요. 가는 수밖에.”
“…….”
오래도록 침묵하던 빙후가 정리에 나섰다.
“전왕이 인정할지 안 할지 모르겠지만 객관적인 무력에서는 내가 조금이라도 우위에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다시 싸운 대도 나는 전왕을 이길 성싶지 않아요. 전왕의 전술을 깰 수 없을 터이기 때문이에요. 그보다 더 두려운 건 승부감각이고요. 전왕이 독심을 품으면 나는 살아남지 못할 거예요. 동의하나요?”
“길고 짧은 건 대 보아야 알지 않겠습니까?”
“겸손하군요. 역시 사람은 직접 겪어야지만 진면목을 알 수 있는 법인가 봐요. 전왕에 대한 소문만 들으면……, 아니에요.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아무튼 오늘의 일전은 내 패배에요. 승리를 축하해요, 전왕.”
“고맙습니다, 비인. 저로서도 몹시 힘겨운 승부였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나를 모욕하지 말아요. 나는 운 따위로 꺾을 수 있을 만큼 형편없는 약자가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사과할 건 없어요. 그런데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하문하십시오.”
“승자로서 전리품을 챙길 작정인가요?”
“그 아이가 원하면 데려가겠습니다.”
나는 단호한 음성과 눈빛으로 타협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빙후를 배려하고 싶었지만 무왕과의 약속을 어길 수는 없었다.
빙후가 불쑥 말했다.
“그자는 소아에게 추잡한 짓을 했어요. 아까는 소아가 옆에 있어서 말을 아꼈지만 그런 자에게 소아를 보낼 수는 없어요.”
기시감이 들었다. 무왕에게서 들었던 소리가 아닌가.
“혹시 도왕을 무왕 어르신으로 착각하신 것 아닙니까?”
“내가 명교에서 상대한 이가 맞아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확신하나요?”
일순 말문이 막혔다.
내가 무왕의 내밀한 사생활을 어찌 다 안다고 확언할 수 있겠는가? 아이와 잠자리를 같이 했던 그가 무심결에 아이를 더듬었다면 아이의 입장에서는 몸서리 쳐질 수도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나는 무왕을 변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어른은 그럴 분이 아닙니다.”
“사람에겐 여러 면이 있어요. 그리고 전왕이 하루 종일 그자와 붙어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 추악한 자인 줄 알았다면 그날 가차 없이 숨통을 끊어버렸을 거예요. 어쨌거나 그자에게 소아를 맡길 수는 없어요. 전왕이 책임지고 소아를 데리고 있어 줘요. 그래야 보낼 수 있어요.”
“그 어른은 소아를 만지려야 만질 수 없는 상태입니다.”
“무슨 말이에요?”
“전날 어르……, 비인과의 비무 직후에 무리하게 운공하다 주화입마에 들었습니다. 전신불수가 되었으니…….”
“천벌을 받았군요.”
울화가 치밀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그 어른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소아가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요?”
“저도 모릅니다. 다만 머리를 쓰다듬거나 등을 다독이는 등의 손길을 민감하게 받아들인 그 아이가 과장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외람되지만 그 아이는 저를 따라간 이후 비인과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할 공산이 큽니다. 왜냐하면 무왕 어르신께 달라붙었을 때도 전 주인이었던 도왕에 대해 똑같은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아이가 제게 그런 말을 하면 어쩌시렵니까? 제가 그 말을 믿어야 합니까? 실제로 그 아이에게 ‘추잡한 짓’을 하셨습니까?”
빙후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러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가정일 뿐이에요.”
나는 반박하지 않았다. 빙후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빙후는 맹랑한 꼬마를 포기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빙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 희한하게도 진소월이 떠올랐다.
“전왕에게 청이 있어요.”
운을 떼고는 말을 잇지 않는 빙후를 보며 어쩔 수 없이 추임새를 넣었다.
“무슨 청이신지요?”
“나하고 다시 대결해주길 바래요. 소아를 걸고서.”
수락하자니 몇 시진이나 고생해야 할 터이고 거절하자니 소용이 없을 게 빤한지라 나는 난감했다. 빙후가 진퇴양난의 늪에 빠진 나를 건져주었다.
“당장은 아니에요. 우리 둘 다 심하게 다치거나, 잘못 되면 그보다 나쁜 결과가 나올 테니까. 확실하게 전왕을 압도할 무력에 도달하면 그때 찾아가겠어요. 그때까지 소아를 잘 돌봐줘요.”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저를 이길 자신이 있으십니까?”
시간이 가면 갈수록 격차가 벌어지리라는 뒷말은 목구멍에 가두었다. 그러나 빙후가 모를 리가 없었다.
“황당하게 들릴 거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내겐 전왕을 단숨에 멀찌감치 떨굴 비책이 있어요. 물론 실현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지만. 아마 십중팔구 바라는 성취를 얻기 전에 사망할 거예요. 그래도 도전해 보려 해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잖아요?”
몇 가지 질문이 두서없이 뇌리를 휘돌았다. 경중을 가리지 않고 나는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을 입 밖으로 내보냈다.
“그 아이가 어르……, 비인께 그렇게나 중요한 존재입니까?”
빙후가 고소를 머금었다.
“오해했군요. 물론 소아는 소중한 아이에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소아의 그 맑디맑은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어떻게든 지켜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일어요. 하지만 내가 전왕과의 재대결을 희망하고 무위의 상승에 생사를 걸려는 건 소아를 되찾기 위함이 아니에요. 나 자신의 욕망 때문이에요.”
“어떤 욕망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나를 응시하는 빙후의 눈에 광기 비슷한 게 번득였다. 나는 일순 거울을 본 듯한 위화감에 휩싸였다.
“일곱 살에 빙공에 입문한 후 팔십 성상 동안 나는 오로지 하나의 꿈을 간직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했어요.”
불충분한 답변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빙후의 꿈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목전의 여인은 일 갑자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나와 운명의 짝이었다.
“내 꿈은 지상 최강의 신인(神人)이 되는 것이었어요. 부끄럽지만 전왕을 만나기 전엔 이미 목표를 달성했다고 자만했답니다. 우물 안 개구리인지도 모르고. 하지만 이제 주제를 알았으니 죽음이 두려워 몸을 사렸던 도전에 나서야지요.”
“도전에 성공하시면, 제가 여기서 더 성장하더라도 저를 능가하리라 자신하십니까?”
“물론이에요. 성공한다면 신의 힘을 쟁취하게 될 테니까요.”
나는 문득 해신의 힘을 얻겠다며 폭풍우 치는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는 해왕도의 신녀가 떠올랐다.
“신의 힘이라니요?”
유감스럽게도 빙후는 결정적인 대목에서 말을 아꼈다.
“그건 비밀이에요. 하지만 내가 오랫동안 전왕을 찾지 않는다면 손녀딸에게 물어봐요. 염왕전에 가 있을 나를 대신해 전왕의 궁금증을 풀어주도록 일러놓을 테니.”
“오랫동안이라면 어느 정도의 기간입니까?”
“나도 몰라요. 하지만 아무리 길어도 일 년은 넘지 않을 거라 봐요.”
“기다리겠습니다, 비인. 절대로 염왕에게 먼저 가지 마십시오.”
“최선을 다할 게요.”
빙후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미소로 화답하지 못했다.
* * *
우리는 빙궁으로 돌아갔다.
아직 경신을 원활히 전개할 만큼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착지 후 도약을 위해 다리에 힘을 줄 때마다 전신의 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극통을 참으며 빙후의 뒤를 쫓았다. 나를 배려한 건지 아니면 내상을 입은 건지 빙후의 속도도 빙원에 올 때보다는 현저히 떨어졌다. 덕분에 나는 도중에 백기를 들지 않고 빙궁까지 날아갈 수 있었다.
내가 바로 중원으로 떠날 의사를 밝히자 빙후는 소아와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을 달라며 나를 검황자에게 보냈다. 안내한 이가 돌아간 후 방에 있는 화려한 침상에 벌러덩 드러누워 있는데 검황자가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나는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나를 보는 검황자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