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1
제20화 마도 출신은 아닙니다
우리는 닷새나 더 불회곡에 머물렀다. 내상을 돌보기 위해서였다.
숨만 쉬어도 자연치유가 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던 듯 괴선은 나나 광객처럼 운공에 들지 않고 이리저리 쏘다녔다. 매번 자기를 부려먹는다고 역정을 냈지만 그는 석곡을 나갔다 돌아올 때마다 우리가 먹을 것을 들고 오곤 했다. 좀 변덕이 심하긴 해도 천성이 선한 사람이었다.
내상이 어느 정도 아물자 나는 하산했다. 괴선과 광객 모두 나와 동행하기를 원했지만 나는 혼자 가겠다고 우겼다. 검총은 떼로 몰려갈 수 있는 곳이 아닌지라 두 기인은 결국 뜻을 접었다.
우리는 헤어지기 전에 석별의 정을 나누자는 괴선의 제안에 따라 산 아래 주막에서 한 잔 걸쳤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소싯적부터 금주를 결의했던 나는 술잔을 입에 대는 시늉만 했다. 괴선은 술맛 떨어진다며 잔소리를 늘어놓았지만 광객은 내 취향을 존중했다.
주막에는 산을 넘기 전에 들른 뜨내기손님들뿐이었다. 그들 중 아무도 우리 삼인조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검지를 오므리고 있으면 괴선은 그저 꾀죄죄한 몰골의 노인이었고 광객 역시 평범한 중년 문사로 보였다. 나야 눈에 확 띄는 외모지만 그들과 함께 있으니 내게서 강호를 떠들썩하게 만든 소문의 주인공을 연상하기는 어려운 모양이었다.
음주를 즐기면서도 술에 약한지 탁주를 병째 들이켜다 거나하게 취한 광객이 내 손을 덥석 쥐더니 연인 사이에나 어울릴 별사(別辭)를 읊으며 눈물을 쏟았다. 웬 추태냐며 괴선이 면박을 주는 통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피곤했다. 언제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를 두 기인과 어서 작별을 고하고 싶었다.
내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괴선과의 언쟁을 멈춘 광객이 나를 붙잡았다. 그에게 이른 시일 내로 연락하마고 달랜 나는 괴선에게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주막을 나섰다.
나오면서 진소월이 챙겨준 전낭에서 은전 몇 닢을 꺼내 주막의 술독이 빌 때까지 어른들을 대접하라고 이르며 주모의 손에 쥐어주었다. 입이 찢어진 이는 그녀만이 아니었다. 주당인 괴선과 애주가인 광객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검총으로 가는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경로가 험하거나 산적 따위를 만나서가 아니었다. 가는 곳마다 내게 달라붙는 시선들이 문제였다. 주막에서와는 달리 어디를 가도 나를 알아보는 자들이 나왔다. 저자에서건 객잔에서건 ‘마웅’이라고 소곤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내 고막을 간질였다.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이들은 없었으나 모두가 나를 힐끔거렸다. 그러다 나와 눈이라도 마주칠라치면 화들짝 놀라며 비명을 지르거나 달아났다. 어이가 없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놈의 ‘마(魔)’가 말썽이었다.
민중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픈 욕심은 개미 코털만큼도 없지만 공포와 회피의 대상이 되기는 싫었다. 나를 두려워할 족속은 장차 내 적이 될 자들로 족했다.
나는 입술을 씰룩였다. 아무래도 조만간 마련(魔聯)의 영역으로 넘어가 마두(魔頭) 몇 마리를 때려잡아야 할 듯싶었다. 그래야 내 별호에서 마(魔)가 떨어져나갈 터였다.
성가신 시선들을 피해 탈옥수라도 된 것처럼 인적 없는 길만 골라 이동한 나는 엿새 후 목적지에 당도했다.
검총이 자리한 상백산(霜白山)은 이름과 달리 흰 빛이 아니라 시월의 단풍과 유시(酉時)의 석양으로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천하제일금역(天下第一禁域)이라는 별칭이 무색하게 너무나 아름다운 풍광이었다.
잠시 장엄한 경치를 감상하던 나는 느릅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경신을 전개했다. 수림에 접근함에 따라 뭔가 형용하기 어려운 기운이 안개처럼 밀려왔다.
나는 숲에 들지 않고 멈춰 섰다. 그러고는 목소리에 내공을 담아 외쳤다.
“뇌전검파(雷電劍派)의 전인이 신성한 검의 무덤에 들 자격을 검증받고자 하오.”
숲 속에서 은밀한 소요가 일더니 여기저기서 그림자들이 튀어나왔다. 나는 당황했다. 전원이 백염백발의 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본 노인들도 황당하다는 기색을 공유했다. 단언컨대 나는 이백사십 년 검총의 역사에서 입총에 도전한 최연소 검사일 터였다.
선풍도골의 풍모를 지닌 노인이 대표로 물었다.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온 게냐?”
“물론입니다.”
뱀눈을 가진 노인이 뒤를 이었다.
“네 검은 어디 있느냐?”
나는 허리춤에서 철봉을 꺼냈다. 노인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뱀눈은 아예 살기를 쏘아냈다.
“본총을 능멸할 참이더냐?”
“아닙니다. 모양은 이래도 엄연히 검입니다. 외람되오나 어르신께서도 석년에 끝이 뭉툭한 기검으로 위명을 떨치지 않으셨습니까?”
내 말에 뱀눈이 뱀눈을 찡그렸다.
나는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는 검총에 들기 전 온 대륙에 악명을 떨쳤던 반검(半劍) 조추(曺秋)였다. 검마류 상위 서열을 오르내리던 조추는 팔 년 전 훌쩍 마련을 떠나 검총으로 향했다.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초절정 중(中)의 무위로 추정되던 마검(魔劍)이었기에 무난히 입총에 성공했으리라는 게 중론이었다.
뱀눈이 나를 겨냥해 발산하는 살기가 짙어지자 선풍도골 노인이 나섰다.
“하면 너는 누구를 택할 참이더냐?”
선풍도골 노인의 눈치를 살핀 뱀눈이 살기를 거두었다. 나는 내 앞에 일렬횡대로 늘어선 열 네 명의 노인들을 둘러보았다. 어느 하나 만만해 보이는 이가 없었다. 그렇기에 모두가 구미를 당겼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이는 없었다.
나는 염두에 두었던 이를 밝혔다.
“죄송하지만 여기 나오신 어르신들이 전부인지요? 제가 듣기로는 이곳에 약관의 검사(劍士)가 있다고…….”
느닷없이 뱀눈이 호통을 쳤다.
“갈(喝)! 너 따위가 감히. 나이가 어리다고 광(光)이를 우습게 여긴 모양인데 너는 그 아이의 일검조차…….”
선풍도골의 노인이 뱀눈의 말을 막았다.
“그만 하게, 추.”
뱀눈은 선풍도골 노인을 거역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선풍도골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광이를 데려오게나, 문제(文弟).”
문제라 불린 청수한 인상의 노인이 고개를 숙이더니 숲으로 몸을 날렸다.
나는 선풍도골 노인의 정체가 궁금했다. 누굴까. 누구이기에 뱀눈이 뱀 앞의 쥐새끼처럼 꼼짝도 못하는 걸까. 누구이기에 초절정의 검호를 수하처럼 부리는 걸까.
검왕은 아니었다. 진소월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검왕의 외관은 남다른 바가 있었다. 그가 축골공과 변신술을 발하지 않은 이상 목전의 선풍도골로 화할 수는 없었다.
내 마음을 읽었는지 노인이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한우경(韓宇經)이라고 한다, 아이야. 강호에서 활동한 적이 없어 별호는 따로 없구나.”
포권을 취하며 나도 뒤늦게 인사했다.
“저는 전충입니다.”
잠시 머뭇거린 나는 별호를 덧붙였다.
“밖에서는 저를 마웅이라고 부릅니다.”
대다수 노인들의 면상에 떠오른 은밀한 불쾌감을 인지한 나는 별호를 얻게 된 연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저는 마도 출신은 아닙니다. 실은 보름 전 성주 무림 태극검문의 단천검과 겨루어 이겼습니다. 제가 어리다 보니 그 결과에 놀란 강호 동도들이 그런 별호를 붙인 듯싶습니다.”
정확히는 보름이 아니라 십구일 전이었지만 설마 그걸 따지고 들지는 않을 터였다. 어쨌거나 내 말에 몇몇 노인의 안색이 변했다. 단천검의 명성과 위상을 안다는 뜻이었다.
내가 단천검을 꺾은 사실을 밝힌 것은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에게 자격이 있음을 알리고 싶어서였다. 내가 무명소졸이면 도전 자체를 불허할 공산이 컸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예측했다. 하지만 기우였던 모양이다.
“단천검이 누군지는 모르나 네가 보통 아이가 아님은 알겠구나. 그렇지 않았다면 광이를 부르러 보내지도 않았을 게다. 헌데 아까 뇌전검파라고 했더냐? 설마 오백 년 전에 명맥이 끊겼다던 뇌전검문의 후예는 아닐 터, 내 견문을 넓혀주겠느냐?”
선풍도골 노인의 요청에 나는 벙어리 아저씨를 떠올렸다.
* * *
그는 떠버리 아저씨와는 여러 모로 대조적인 인물이었다.
일단 잘 생겼다. 제 멋대로 반죽한 두상에 하나같이 못생긴 눈, 코, 귀, 입을 대충 박아놓은 떠버리 아저씨와는 달리 그의 이목구비와 얼굴 윤곽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한마디로 완벽했다.
둘은 성정 또한 극과 극이었다.
떠버리 아저씨는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심약한 반면 그는 강철심장의 소유자였다. 겁 자체가 없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그를 두고 비수로 왼쪽 눈알을 파내도 오른쪽 눈을 깜박거리지 않을 위인이라고 평했다.
기실 모두들 그를 어려워했다. 심지어 혼자서 결사대 칠조 전체를 감당하고도 남을 고수였던 어머니조차도 그가 근처에 오면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머니는 그가 섬뜩하다고 했다.
그는 정체불명의 사나이였다. 아무도 그의 이름과 나이와 전력(前歷)을 알지 못했다. 그가 알려주지 않았고 그에게 묻는 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벙어리 아저씨라고 부른 데서 알 수 있듯 그는 말이 없었다. 이 또한 한시라도 혀를 놀리지 않으면 목구멍에 가시가 돋기라도 한다는 듯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던 떠버리 아저씨와 반대였다.
사실 그는 내 아버지와 닮은 점이 많았다.
특출한 미남인데다 실전에서 특별히 강미를 보인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신체에 문제가 있다는 점도 비슷했다. 다만 아버지의 경우 후천적인 부상에 의한 장애인 반면 그는 타고난 불구였다. 왼 다리가 기형적으로 짧아 절뚝거리며 걸어야 했고 오른팔은 나다 말아서 팔꿈치 어림이 끝이었다.
단전도 성치 않은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미약하게나마 내공을 운용할 수 있었지만 그는 전혀 내기를 일으키지 못했다. 감춘 게 아니었다. 어머니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목숨이 경각에 달린 극한의 상황에서도 그러했다. 그러니 그는 공력을 지니지 않았음에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버지와 더불어 칠조 최강을 다투는 강자였다. 특히 실전에 투입되면 실로 무시무시한 활약을 펼쳤다. 독종 중의 독종인 해귀들도 그와 마주치면 꽁무니를 빼기 일쑤였다.
확실히 그에겐 드러난 무력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어머니는 그것이 그가 싸우기 직전 발산하는 살기일 거라고 추정했다. 아버지도 동의했다. 해귀들이 그와 대적할 시 결정적인 순간 갑자기 굳어버리는 모습을 수차례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만 삼 년 팔 개월을 나와 동고동락했던 떠버리 아저씨와 달리 그가 내 옆에 머문 기간은 고작 사십여 일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수천의 사상자를 낳았던 자하평 대전에서 전사했다. 시체를 확인한 건 아니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으니 불귀의 객이 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자신의 최후를 예감했는지 그는 그날 출전에 앞서 나에게 팔백팔십 자의 검결이 담긴 비급을 남겼다. 훗날 내가 검공을 이루면 검총을 찾아 뇌전검파의 십이검식(十二劍式)이 최고의 절학임을 입증해달라는 말과 함께.
그는 벙어리가 아니었다.
* * *
나는 난감했다. 하지만 솔직히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도 뇌전검파라는 이름밖에 알지 못합니다. 제게 검공을 전한 이는 다만 제가 검을 완성하면 검총에 들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라고 일렀을 뿐입니다.”
선풍도골 노인이 백미를 이마로 추켜올렸다. 황당하다는 반응이리라.
뱀눈이 윽박질렀다.
“헛소리마라, 이놈! 어느 안전이라고 씨도 먹히지 않을…….”
뱀눈은 이번에도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선풍도골 노인이 오른손을 들어 제지했기 때문이었다. 뱀눈의 낯짝이 똥 씹은 자의 표정을 담았다. 쌤통이었다.
선풍도골 노인이 중얼거렸다.
“지켜보면 알 게 될 터.”
그 이후로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기에 장내엔 기묘한 정적이 깔렸다. 나는 검황자를 기다리는 동안 전신의 뼈마디를 풀고 싶었지만 자중했다. 그가 도중에 나타나면 멈춰야 할 터인데 그러면 안 하니만 못했다.
하지만 할 걸 그랬다. 한참이 지나도록 검황자가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 참지 못하고 선풍도골 노인에게 그가 언제쯤 당도할지 물으려던 찰나 나는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두 개의 그림자가 수림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