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10
제209화 더 이상은 안 돼
며칠 주린 사람처럼 작은 입에 닭고기를 우걱우걱 쳐 넣고 있는 꼬마를 보고 있노라니 착잡했다.
“체할라. 씹어가면서 먹어.”
꼬마가 고개를 들었다.
“대형은 안 먹어요?”
“그래. 너 다 먹어라.”
신이 난 꼬마가 다시 손가락을 바삐 놀렸다. 나는 그의 폭식을 방해했다.
“할머니 안 보고 싶니?”
꼬마가 음식을 입에 가득 채운 채 대답했다.
“보고 싶어요.”
“할아버지들은 만나기도 싫다고 했잖아.”
“할아버지들은 무서워요.”
“왜?”
“소아를 아프게 하니까요.”
나는 말문이 막혔다.
“할머니는?”
“할머니는 소아를 예뻐해요.”
“근데 왜 나를 따라왔어?”
“대형이 더 세니까요.”
“그럼 나보다 더 센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을 따라갈 거니?”
꼬마가 우물쭈물했다.
“그러면 안 돼요?”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돼.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왜요?”
“내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니까.”
“와!”
우습게도 아이의 감탄성에 나는 우쭐해졌다.
* * *
심중을 채운 우울함으로 인해 구세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존경하는 이의 치부를 알게 된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무왕이 부인해도 문제였고 시인해도 난감했다. 부인하면 믿기 어려울 것이고 시인하면 감당키 어려운 실망감이 몰려들 터였다. 그래도 시작한 이상 끝을 보아야 했다.
무왕은 혼자 있었다. 나를 부르며 의원들을 내보낸 모양이었다. 마음의 정리를 한 듯 사흘 전보다는 한결 평온해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보기가 괴로웠다.
“소아를 데리고 왔어도 괜찮았을 것을.”
“자고 있습니다.”
기실 꼬마가 수마에 빠지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동행해야 했을 것이었다. 꼬마는 내 그림자가 되기로 결심이라도 한 양 한시도 떨어지려 들지 않았다. 떼어놓으려 해도 내 소매를 붙잡고 애원하는 눈망울을 보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무공 수련도 꼬마가 잠 든 틈을 타서 해야 했다.
“요 며칠 간 잠을 설쳐가며 찾고 또 찾았다. 그러나 아직도 전날 네가 남기고 간 질문에 대한 답을 얻지 못했다. 여전히 안개 속을 더듬고 있구나.”
“…….”
“그런데도 너를 부른 까닭은 더 장고해 봐도 끝내 뚜렷한 진상은 알지 못할 듯싶었기 때문이다. 막연하나마 내가 알아낸 윤곽을 들려주마. 그게 무얼 의미하는 지는 네가 알아서 해독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딱 한 번이었다. 그날 나는 무학을 궁구하다 모처럼 무아지경에 빠져있었다. 어느 순간 꺼림칙한 느낌이 들어 정신을 차려보니……, 소아가 내 앞에서 울고 있더구나. 알몸인 채. 소아를 달래려던 나는……, 하의가 내려가 있고 내 하초가 성이 난 걸 알고는 소스라쳤다. 나는 차마 소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묻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네가 묻기 전까지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떠올리고 나서도 그저 한때의 악몽처럼 여겨졌다. 솔직히 지금도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는지 확신이 서질 않는구나. 하지만, 아마도 그랬을 테지? 소아는 뭐라고 하더냐? 그 아이가 네게 말해주었으니 알았을 테지만.”
납득할 수 없는 해명이었다. 무왕 같은 절대지경의 고수가 비몽사몽이 될 수 있을까. 본인이 몸소 겪었던 끔찍한 사건을 망각할 수 있을까.
내가 답을 주지 않자 무왕이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돌이켜보면 소아를 만나고 함께 지낸 과정이 전부 꿈결 같구나. 그 아이의 눈을 보고 있으면 어떻게든 지켜주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빙후가 소아를 데려간 후 사나흘은 미칠 듯이 그 아이가 그리웠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부터 거짓말처럼 덤덤해지더구나. 보고 싶긴 했어도 처음처럼 간절하지는 않았다. 이런 표현이 어떨까 모르겠다만 큰 짐을 던 것처럼 홀가분해졌다.”
나는 문득 정맹에서 만난 도왕이 꼬마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던 일이 떠올랐다.
“구질구질하게 변명하고 싶지 않구나. 소아에게 물어봐 다오. 그 아이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을 테지. 내가 만약 그 아이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면, 책임을 지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좀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어째서?”
“여기서 나가는 즉시 서역에 가봐야 합니다. 돌아와서 확인해보겠습니다.”
고맙게도 무왕은 꼬마와의 용무를 선결적으로 처리할 것을 요구하지 않고 내 보류를 묵인했다.
* * *
나는 잠자는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갔다 오마.”
깨우지 않으려고 속삭이듯 말했지만 꼬마가 눈을 번쩍 떴다.
“어딜 가는데요?”
분명 깊이 잠들어 있었는데 어떻게 들었을까.
“서쪽 나라에.”
“같이 가요.”
“안 돼.”
아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내게 매달렸다.
“대형과 함께 있을래요.”
“안 돼. 너무 멀어. 그러니까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
“싫어요. 데려가 줘요. 소아를 버리지 말아요, 대형.”
“버리긴 누가 버려. 절대로 그럴 일 없어.”
“그럼 소아를 데려가요. 제발.”
애원하는 꼬마를 보며 그러겠다고 말하려던 순간 불현듯 검황자가 떠올랐다. 아니, 빙궁을 떠나기 전에 그에게 했던 충고가 떠올랐다. 그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해야 할 소리가 아닌가.
꼬마가 도왕과 무왕, 그리고 빙후에 이어 나까지 홀렸음을 자각한 나는 그의 눈망울에 저항했다. 아무리 빠졌어도 꼬마가 하자는 대로 복종하는 노예가 될 순 없었다.
“안 돼. 떼쓰는 건 여기까지야. 더 이상은 안 돼.”
내 단호한 눈빛에 꼬마가 목을 움츠렸다. 그러더니 울먹거렸다. 하마터면 안고서 달래줄 뻔했지만 겨우 참아냈다.
“갔다 올 동안 호랑이 할머니하고 같이 있어.”
호랑이 할머니는 귀면나찰이었다. 나는 꼬마를 사내에게 맡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떠나면 귀면나찰이 명교 내의 최강자가 될 터이니 꼬마도 만족할 터였다.
꼬마를 귀면나찰에게 건넨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움직여 공중으로 비상했다. 명교를 벗어나고도 몇 번이나 돌아가서 꼬마를 데려오고 싶은 욕구에 시달렸다. 하지만 나는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훗날 오늘의 처사를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것을 꿈에서도 알지 못한 채.
* * *
중립지대 최대의 향락도시였지만 우한의 낮은 새벽녘의 호수처럼 고요했다. 돈을 물 쓰듯 하는 한량들이든 그들로부터 돈을 갈퀴로 긁어가는 자들이든 환락의 밤을 공유한 후 단잠에 빠져있을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한 외곽의 자미원은 전에 없이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내가 자줏빛 꽃들이 만발해 기경을 드리운 장원의 마당에 떨어져 내리자 잠시 소란이 일었다. 하지만 미리 내 방문을 기별해 두었기에 자미원을 찾은 손님들은 곧 평정을 되찾고 극존의 예로써 나를 맞이했다.
나현이 소집한 이들은 구민단의 핵심 구성원들이었다.
주로 상계와 학림의 명사들이었지만 암계에서 활약하던 인사들도 소수 있었다. 전날 명교로 전서구를 보내며 나현은 그들의 품성과 전력에 다소 문제가 있지만 썩히기엔 재주가 너무 아까워 필요에 따라 활용할 참이라며 내 허락을 구했다. 나는 나현에게 이미 전권을 위임했으니 뜻대로 하라고 답신했다.
지난번에 나현이 소개해준다고 했던 그의 후계자들도 보았다.
네 명이었는데 나현이 사전에 보내준 정보에 따르면 출신과 특장기가 다 달랐다. 하나는 그럭저럭 마음에 들고 나머지 셋은 별로였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사사로운 호오의 심사를 내색하지는 않았다. 인상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섣부른 짓인데다 내 태도가 그들에게 불공정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드러내지 않으려 극히 조심하긴 했지만 나현의 후계자들 사이엔 상호견제의 공기가 확연히 떠돌았다. 알력까지는 아닐지라도 상당한 경쟁관계임엔 틀림없었다.
반가운 인물도 있었다. 진청운이었다.
그가 명교 상부에 배치되어 구세원을 떠난 후 처음 본 셈이니 거의 석 달만의 재회였다. 내 아버지와 판박이인데다 연인의 부친이었기에 나는 진청운을 가족처럼 대했다. 내가 그에게 친근하게 굴면서도 상전 모시듯 깍듯이 예를 차리자 몇몇 명숙들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진청운이 나와 어떤 사이인지 몰랐다는 반증이었다. 그리고 단지 명교에서 파견한 하급관리쯤으로 여기고 그를 홀대하거나 멸시했다는 뜻이었다.
나는 구태여 그들에게 눈치를 주지 않았다. 앞으로는 진청운에게 알아서 굽실거릴 터이기 때문이었다. 내 친인이라서가 아니라 진청운은 그들에게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나를 만나기 전 그는 일개 변방 무림 흑문의 첩인이었지만 억울한 일을 당한 수백 명의 원혼을 위로해주고 힘들게 모은 재산을 아낌없이 헐벗고 굶주린 이들을 위해 베푼 의인이기도 했다. 진소월은 자신의 부친을 두고 능히 일국을 경영할 수완과 덕성을 갖춘 인재라고 평하기도 했다. 명교 상부에서 활동한 기간은 짧았지만 진청운은 출중한 능력을 선보이며 소면통달로부터 낭중지추이자 군계일학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어느 정도는 나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리였을 테지만 나는 내가 칭찬을 받은 이상으로 기뻤다.
향후 사벌의 영토를 통치할 구민단원들과 상견례를 하며 나는 진소월의 부재가 가지는 의미를 통감했다. 그녀의 빈자리는 컸다. 그녀가 있었다면 수박 겉핥기식의 대화만 오고가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녀는 회합에 참석한 모든 이들의 내력을 샅샅이 파악해 그들 각자에 걸맞은 질문을 던지고 적확한 지시를 내릴 수 있었을 것이었다. 다방면에 걸친 깊고 풍부한 식견의 소유자이기 때문이었다.
진소월 얘기가 나온 김에 첨언하자면 독의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나현은 물론이고 정맹과 명교의 정보조직들도 내 요청을 받고 그의 소재를 추적했지만 아직 아무 성과가 없었다. 나는 그가 어디에 있건 진소월의 생명을 연장해주고 외양도 원상회복시키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 * *
나현의 간곡한 청으로 개별 면담까지 진행해야 했기에 꼬박 하루를 자미원에 잡혀 있던 나는 다음날 정오 무렵이 되어서야 서천으로 몸을 날릴 수 있었다.
행선지가 천랑성임은 오직 나현에게만 밝혔다. 그에게는 이번 여정이 꽤 길어질 수도 있음을 알렸다. 사적인 볼 일 때문이라고 하자 나현은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넘어갔다. 근래 그는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특별한 사안이 아닌 한 자기 일에 집중하고 싶었을 터였다.
험준한 산맥들을 지나고 사막을 통과하는 내내 꼬마가 나를 따라왔다. 눈물이 그렁그렁했던 눈망울이 생생하게 떠올라 심란하기 이를 데 없었다. 벌써 일만 리 이상 떨어졌음에도 발길을 돌릴까하는 충동이 수시로 솟구쳤다. 그러나 나는 또 다른 욕망으로써 꼬마를 뇌리에서 떨쳐냈다.
당면한 최대의 과제는 빙후와의 재대결에서의 승리였다. 그것은 검왕의 징치보다 우선 순위였다. 나는 그녀에게 이기고 싶었다. 그녀가 목숨을 건 도전에 성공해 나를 멀찌감치 떨굴 ‘신의 힘’을 획득하더라도 물리치고 싶었다. 그리하여 명실상부한 지상 최강의 존재로 우뚝 서고 싶었다.
그러려면 강해져야 했다. 그녀가 최장 일 년을 기약했으니 도약을 거듭하기에 충분한 시간은 아니었다. 오로지 수련에만 전력을 쏟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중원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정맹과 독곡의 고수들이 참여한 덕분에 척마단과 멸사단은 사마 잔당의 전력을 압도했다. 외세도 문제가 아니었다. 빙후를 보건대 설령 동편과 남방에서 초월적인 무력을 지닌 여자들이 출현하더라도 서역의 마녀처럼 무지막지한 살겁을 일으킬 성싶지는 않았다. 단지 강하기만 할뿐이라면 나중에 차례로 상대해주면 그만이었다.
* * *
사막을 횡단하던 중 서쪽 지평선으로 떨어졌던 해가 천벽을 넘고 스앙카 상공을 지나고 있을 때 다시 동녘에서 떠올랐다. 전갈독수 제조의 최소기간이라던 한 달을 채우려면 사나흘가량 더 기다려야 했지만 나는 곧장 천랑성으로 향했다. 대두 노인이 총력지원을 약속했으니 의외로 성과물이 일찍 나왔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굳이 우방의 터전을 지척에 두고 야숙할 까닭이 없었다. 내가 천랑성을 떠난 이후 서역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전개를 그려보았으나 나를 맞이한 것은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