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11
제210화 시간을 내보지요
아침햇살과 함께 천장단애의 중간에 난 석굴 입구에 들어서니 전날과 마찬가지로 삼면의 동굴에서 수십 명의 무인들이 튀어 나와 나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무덤덤했던 그때와 달리 그들 모두의 눈에 짙은 경외감이 담겨있었다. 태도도 크게 변했다. 오체투지하거나 부복하지는 않았으나 정중하다 못해 비굴할 정도였다.
나는 낯익은 쌍둥이에게 안내를 청했다.
“이탄!”
말귀를 알아들은 그들이 이전처럼 나를 가운데 두지 않고 나란히 앞장을 섰다. 내 뒤로는 무인들이 우르르 따라왔다.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그들이 외치는 소리가 통로를 쩌렁쩌렁 울렸다.
광장에 들어서니 텅 비어있었던 한 달 전과 달리 수천 명의 군중이 운집해있었다. 그러고도 수십 개의 동굴에서 계속 남녀노소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천랑성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그들이 내지르는 함성이 너른 광장을 가득 메웠다.
수천 쌍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데 익숙해졌기에 나는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군중을 헤치고 나아갔다. 광장 중앙에 이르렀을 때 대두노인이 달려 나왔다. 숨이 턱까지 찬 노인이 내 손을 잡고 흔들며 격한 환영인사를 했다.
“어서 오시오, 전왕. 본성을 다시 찾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오. 전왕을 뵙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오.”
나는 노인에게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우니두아가 뭡니까?”
“여기 말로 구원자라는 뜻이오. 본성의 백성들만이 아니라 대륙의 모든 민중이 전왕을 그렇게 부르고 있다오. 악마를 물리치고 세상을 구하지 않았소?”
머쓱했다.
노인이 아직도 잡고 있던 내 손을 이끌었다.
“들어갑시다. 전왕과 나눌 이야기가 태산처럼 쌓였소.”
체격 차이가 워낙 커 나는 아이에게 끌려가는 장한 같은 모습을 연출하며 노인을 쫓아갔다.
노인이 데려간 곳은 황금의 방이었다. 사방의 벽은 물론이고 천장과 바닥까지 온통 금이었다. 거기에 더해 탁자와 의자들, 심지어는 다구(茶具)들까지 모조리 금이었다. 금이 아닌 것은 금주전자 안에 든 찻물뿐이었다. 기실 찻물조차도 금처럼 누런 빛깔이었다.
“사치를 즐기는 성품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양해를 바라오. 이곳은 영원한 번영을 상징하는 본성의 성소(聖所)라오. 성주라 할지라도 특별한 경우에만 들 수 있다오. 전왕이 오면 꼭 여기로 모시고 싶었소.”
“영광입니다.”
나는 노인이 따라주는 차를 들이켰다. 코를 간질이는 향긋한 단내와 달리 콧물처럼 찝찔한 맛이 났다. 역겨웠다. 다행히 노인은 감상을 묻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노인이 장광설을 쏟아냈다.
“전왕이 떠난 후 상황이 예측했던 것과는 상반된 방향으로 흘러갔다오. 본성에 점령당했던 왕국들은 일제히 반기를 드는 대신 자발적으로 복속의 지속을 맹세했소. 민초들에 대한 안지의 장악력도 현저히 약해졌소. 절대다수의 백성들이 그들의 잔인무도한 처사를 성토하고 있다오.
이 모든 게 전왕 덕분이오. 만약 전왕이 지동에서 그 악마를 처치하지 못했다면 승자는 그들이 되었을 테고 대륙은 완전히 그들의 손아귀에 들었을 게요. 그러나 악마가 죽자 그들의 의도는 수포로 돌아갔소. 민중은 공포에 잠기긴 했지만 분노가 훨씬 더 큰 형국이오.
아데에서 시작된 참극은 지동까지 아홉 도시에 걸쳐 무려 오십만 명의 희생자를 낳았소. 그 중 오낭과 바동에서만 이십여 만 명이 목숨을 잃었소. 전왕이 도중에 악마를 저지하지 않았다면 본성까지의 경로에 놓인 도시들도 참변을 면치 못했을 게요.
전왕이 수라와 더불어 악마와 법사를 추적한 과정과 지동에서 악마를 처치한 위용이 만천하에 알려졌소. 워낙 목격자들이 많았던 탓에 안지가 진상을 왜곡하거나 조작하기도 불가능했소. 전왕을 구원자로 여기는 분위기가 삽시간에 온 대륙에 퍼지면서 안지는 급격하게 고립되었소. 더욱 고무적인 현상은 그들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다는 것이오. 상당수의 안지 인사들이 전날 참극을 주도했던 일당을 고발해오고 있소. 본성의 무인들은 물론이고 각 왕국들의 정병들도 원흉들의 추포에 나섰소. 잘하면 이번 기회에 그들의 뿌리를 뽑을 수 있을 듯싶소.”
한달음에 설명을 마친 노인이 그제야 찻잔을 집어 들었다.
노인이 숨을 고르기를 기다린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들을 하나씩 꺼냈다.
“내가 마녀와 싸우는 광경을 본 사람들이 많습니까?”
“가까이서 목격한 자들은 없는 모양이오. 다들 도망가기에 바빴으니까. 하지만 전왕이 지동 상공에 나타나 악마에게 쇄도하는 모습을 보았던 눈들은 적지 않소. 그러니 다들 그 악마의 목을 날린 이가 전왕이리라 믿고 있다오.”
의문이 풀렸지만 나는 확실히 짚고 넘어갔다.
“그렇다면 내가 총수를 죽인 장면을 본 사람도 없겠군요.”
“그렇소. 다들 수라가 악마에게 변을 당했을 거라 여기고 있소. 악마를 쫓을 때 전왕과 총수가 한편이었음을 여러 도시의 생존자들이 증언했으니까.”
“마녀를 부린 법사는 어찌 됐습니까?”
“사망을 확인했소. 수라가 그자를 난도질 한 탓에 시체더미에서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으나 조각을 맞춘 결과 아데부터 악마를 조종한 법사임이 밝혀졌소.”
흠, 그 와중에도 해야 할 일은 잊지 않았군. 나는 사울을 절반쯤은 용서해주기로 했다.
“참으로 잔혹한 인물이었소. 안지의 내부 고발자들에 따르면 악마를 만들기 위해 팔 년에 걸쳐 물경 삼사 만에 달하는 아이들의 심장을 도려냈다고 하오.”
황당했다.
“그들이 그런 일을 벌이는 동안 까맣게 몰랐단 말입니까?”
“면목이 없소. 변명 같지만 전날 말했듯 안지는 이 땅의 민중에게 무소불위의 권위를 지닌 족속인지라 그들이 작심하고 음모를 획책할 시 사전에 알아챌 방도가 없었소. 수라가 수시로 대륙 전역을 시찰하며 감시 감독했지만 모두가 합심해서 안지를 숨겨주고 비호하는 통에 색출이 불가능했소.”
“마녀가 다시 나올 가능성은 없습니까?”
“그럴 거라 보오. 안지의 내부 사정을 알고 보니 그들도 이번 악마의 제조에 총력을 기울였던 모양이오. 수십 가지의 조건 중 하나만 결여되거나 불충분했어도 성공하지 못했을 거라고 하더이다. 악마의 제조에 참여했던 법사들 전원이 기적이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하오.
악마는 현실적으로 다시 나오기 어려울 게요. 심장을 바칠 수만 명의 동남동녀를 소리 소문 없이 끌어 모으는 게 어려워진 데다 그보다 더 큰 난관이 있기 때문이오. 다름 아닌 그들이 천년제일대법사라고 받들었던 자의 죽음으로 인한 주재자의 부재요. 오로지 그만이 악마 제조의 비법을 알고 조종이 가능했다고 하오.
또 한 가지 안지의 법사들에게서 캐낸 중요한 정보가 있소. 악마가 시한부 생명이라는 것이오. 기껏해야 일백 일이 한계라고 합디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악마를 처단한 전왕의 업적이 희석되는 건 아니오. 악마는 불과 사흘 만에 오십만의 인명을 학살했잖소? 백일이면……, 상상하기도 두렵구려.”
마녀가 재출현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니 가슴을 쓸어내려야 마땅했지만 희한하게도 아쉬웠다. 나는 싸우는 방법을 익힌 마녀와 싸워보고 싶었다.
* * *
사후 상황에 대한 대화가 일단락되자 천랑성을 찾은 용건을 꺼내려는데 노인이 선수를 쳤다.
“미안하지만 전왕에게 드릴 선물은 아직 마련하지 못했소. 매일 두 차례 그자에게 전갈을 보내 닦달하고 있으나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답변만 돌아오는구려. 그래도 어젯밤에 받았던 보고에 따르면 늦어도 닷새 안으로는 일차 선물을 완성할 수 있을 거라고 하오. 조금만 더 기다려 주구려.”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혹시 중원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올 참이오?”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했다.
“아닙니다. 중원에 급한 일이 없으니 괜찮으시다면 여기 있겠습니다.”
노인이 반색했다.
“그렇다면 전왕에게 부탁 한 가지만 해도 되겠소?”
꺼림칙한 느낌이 엄습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십시오.”
“이 대륙의 만백성이 악마를 처단해 세상을 구한 전왕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어 하오. 그들에게 그럴 기회를 허락해주시겠소?”
예상했던 바였지만 기가 찼다. 이렇게나 노골적으로 나를 부려먹으려 들다니.
노인이 겸연쩍은 미소를 머금었다.
“염치없는 청임을 아오. 그러나 성주와의 약속을 보아서도 부디 들어주길 바라오. 성주와 수라의 사망 소식은 이미 만천하에 퍼졌소. 특히 수라의 경우 시신을 본 자들이 너무 많아 도저히 비밀을 유지할 수 없었소. 성주의 변고도 어차피 드러날 터이기에 과감하게 선제적으로 공개했더랬소. 그럼에도 제(諸) 왕국의 수뇌부들이 본성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은 전적으로 전왕 때문이오. 기왕 이곳에 온 김에 전왕이 본성과 한편임을 분명히 해주면 본성에 크나큰 도움이 될 게요.”
별로 내키지 않았으나 낭왕까지 들먹이는데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알겠습니다. 시간을 내보지요.”
노인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고맙소, 전왕. 정말 고맙소.”
* * *
기실 몹시 귀찮았는데 의외로 즐거운 여행이었다.
우선 대두 노인이 안내자로 붙여준 ‘도파’라는 이름의 중년인부터 썩 마음에 들었다. 도파는 단순히 훌륭한 정도를 넘어 최고의 길잡이였다. 중원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대륙 전체의 지리를 제 손바닥 들여다보듯 꿰고 있었고 경험이 없을 터임에도 공중에서의 방향 지시에도 능했다.
나는 무엇보다 그의 담력이 흡족했다. 그는 최고 속도로 날아도 위축되는 기미가 없었다. 그를 시험하기 위해 예고 없이 순간이동까지 시전해보았으나 도파는 경악성만 토해냈을 뿐 혼비백산하거나 정신을 잃지 않았다. 그가 무공을 익히지 않은 범인인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평정심이 아닐 수 없었다.
도파가 제일 먼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살겁의 시발점이었던 아데였다. 대두 노인이 봉화 등으로 미리 내 방문을 알렸던지 전날의 혈사에서 생존한 아데 백성들이 참극의 현장에 모여 있었다. 광장한 운집한 수천 군중은 도파를 안고 천공에서 하강하는 나를 뜨겁게 환영했다. 너무나 열렬한 환대에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아데는 시작에 불과했다. 아데 이후 들르는 도시마다 그 이상의 환영 행사가 이어졌다. 특히 내가 초장에 개입해 참사의 확산을 막았던 지동에서의 반응은 용광로를 방불케 했다. 지동 백성들이 내지르는 함성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수만 명이 동시에 목청껏 외치는 ‘우니두아’가 중원에까지 전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지동에는 높이가 팔구 장에 달하는 내 석상도 세워지고 있었다. 몸체는 아직 기초 작업을 끝낸 수준이었지만 얼굴은 거의 완성된 상태였다. 나와는 닮은 구석이 없었다. 이목구비가 죄다 반듯한 게 검황자의 낯짝과 비슷했다. 나는 실망하기보다는 민망했다.
나흘에 걸쳐 서역 전역을 돌며 서른두 개의 도시를 순회한 나는 뿌듯한 심정을 안고 천랑성으로 돌아갔다. 때마침 오파의 약재상이 보낸 전갈독수가 내 귀환과 동시에 도착했다. 모두 세 병이었다. 양이 다소 기대에 못 미쳤지만 별 불만은 없었다. 거머리가 멸종되지 않는 한 앞으로 꾸준히 받을 수 있을 터였다.
나는 대두 노인이 준비해 둔 큼직한 궤를 등에 지고서 천랑성을 나섰다. 가기 전에 성모를 보고자 했으나 나흘 전 도착했을 때처럼 곤히 잠들어 있었기에 그냥 떠났다. 기실 나와 관련된 예언을 하지 않는 이상 굳이 그녀와 말을 섞을 필요는 없었다.
스앙카를 지나고 천벽을 넘은 나는 사막에 들어섰다. 그러고는 사방에 모래의 지평선이 펼쳐진 광막한 공간에 이르러 짐을 풀었다. 빙후와의 재대결에 대비해 그곳에서 극한 수련을 행할 작심이었다. 기간은 따로 정하지 않았다. 만족할 만한 성취를 얻기 전까진 중원으로 돌아가지 않을 참이었다. 그러나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