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15
제214화 빙후 어르신은 몇 단계였소?
“태곳적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들과 유부에서 올라온 악귀들이 지상의 사람들과 섞여 살았대요. 신들은 악귀들을 물리쳐 인간들을 구해주었지만 다시 자기들끼리의 서열을 두고 다투었다고 해요. 치열한 힘겨루기들 끝에 최종적으로 남은 이들은 전신(戰神)과 뇌신(雷神)이었어요. 둘 간의 대결에서 승리한 쪽은 뇌신이었어요.
최고 권좌에 오른 뇌신은 패자에게 아량을 보이지 않았어요. 전신의 힘줄을 모조리 뽑아버린 후 추방을 명했지요. 아예 소멸시키고 싶었을 테지만 신들은 불멸불사지체인지라 그러지는 못했어요.
신들의 산으로부터 수만 리나 떨어진 동토에 떨어진 전신은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 희망을 얻었어요. 우연히 어느 빙산의 뿌리에서 자신의 상처가 치유되는 걸 알게 된 거죠. 스스로를 그곳에 가둔 전신은 그를 추종하는 무리로 하여금 그의 신력을 취해 뇌신의 후예에게 복수하도록 일렀어요.”
“그렇다면 신령이라는 게 빙산에 박힌 그의 몸뚱이를 말하는 거요?”
“그래요.”
“이상하군. 전신은 왜 본인이 직접 설욕전에 나서지 않은 거요? 상처가 치유됐다면서.”
“그건 혼돈의 시대가 종결되고 신계와 인세의 층이 나뉘었기 때문이에요. 대부분의 신들은 천상으로 돌아갔지만 전신처럼 육화를 택한 이들은 지상에 남았어요. 그들은 나무나 돌처럼 자의적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처지였기에 부활을 위해서는 인간의 몸을 빌려야 했어요.”
“하지만 뇌신이 천상으로 가버렸다면 복수는 영영 물 건너 간 셈이 아니오?”
“그렇지 않아요.”
“전신의 신력을 취하면 인간의 몸으로도 천상으로 올라갈 수 있단 말이오?”
“그건 아니에요.”
“그럼 뭐요? 뇌신도 전신처럼 지상에 남는 걸 택했다는 거요?”
“그래요.”
“황당하군. 신들의 우두머리이면서도 목내이(木乃伊) 같은 존재가 되기를 자청했다니. 바보가 아니고서야.”
“……우리에게 전해진 신화에 따르면, 뇌신은 승부욕의 화신이었대요. 자기한테 철저하게 깨지고도 전신의 전의가 사그라지지 않은 걸 알고는 끝장을 볼 심산이었다는 군요. 인간이 되면 영원한 죽음을 안길 수 있으니까요.”
“어째 신들이라면서 노는 양이 골목대장 자리를 차지하려 치고받는 코흘리개 아이들 같소 그려.”
“…….”
나와 공주의 문답을 듣고만 있던 검황자가 그녀가 대꾸할 말을 찾고 있는 틈을 타 잽싸게 끼어들었다.
“모욕을 줄 필요는 없잖소?”
“공주한테 하는 얘기가 아니잖아?”
“그렇더라도 굳이…….”
공주가 나와 검황자의 입씨름을 차단하고 나섰다.
“나는 괜찮아요, 공자님. 정말이에요. 옛날이야기일 뿐인 걸요. 그리고 나 자신도 믿지 않아요. 단지 신령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꺼낸 거예요. 어쨌거나 저를 위해 나서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나는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어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검황자와 공주과 슬쩍 손을 잡았다. 그러더니 내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황홀한 미소를 교환했다. 이것들이 누구 염장을 지르려고 작정했나.
나는 만만한 검황자를 쏘아보며 대화를 진척시켰다.
“신령이 전신의 육화이든 뭐든 굉장한 효능을 지닌 건 틀림없겠구려. 빙후 어르신이 ‘신의 힘’이라고까지 표현한 걸 보면.”
검황자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공주가 내 쪽은 힐끔거리지도 않고 응답했다. 우라질.
“그래요. 기실 할머니가 신령을 재발견한 당사자예요.”
“재발견? 무슨 소리요?”
“우리 빙족은 먼 옛날 서방 낙원으로부터 쫓겨난 종족의 후손들이에요. 권토중래가 숙원이었던 선조들은 당신들과 같은 처지라 할 전신의 신화를 신봉했어요. 그러고는 수많은 이들이 신령을 취하기 위해 도전했다죠. 하지만 성공한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죠. 이건 전설이 아니에요. 기록에 따르면 실제로 누대에 걸쳐 수천 명의 희생자가 나왔어요. 그러다 사백여 년 전부터는 신령을 찾는 행위가 금지되었어요. 신화는 신화일 뿐, 현실이 될 수 없음을 깨달은 거죠.”
“그런데 빙후 어르신이 금기를 어기고 바다에 뛰어들었고 신령이 실재함을 알게 된 거로군.”
공주가 모처럼 내 쪽으로 눈을 돌렸다.
“맞아요. 그게 신화 속에 나오는 전신의 육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엄청난 권능을 지니고 있음엔 의문의 여지가 없어요. 일부만 취했음에도 할머니는 꿈의 경지라 일컬었던 천빙신공의 극점에 도달했으니까요.”
“오!”
나는 흥분을 누르기 위해 일부러 목소리를 깔았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해 주시오.”
이 요청은 안하는 게 나을 뻔했다. 공주가 ‘너무’ 자세히 풀어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응하려면 다시 예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물론 전신의 신화만큼 오래되진 않았어요. 사실 채 백년도 안 돼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태어난 이후니까 정확히 팔십팔 년이 되겠네요.
내 조부모님은 빙족 역사상 최고의 기재들이었어요. 동갑내기였던 두 분은 서로에게 최고의 경쟁자이자 천생연분이었어요. 남방의 모든 이인들을 압도하는 천하제일의 강자가 되고자 하는 목표를 공유했고 무재도 난형난제였어요. 한 쪽이 한 발 앞서가면 다른 쪽이 기를 쓰고 따라잡았다죠. 스물을 갓 넘겼을 무렵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미 빙궁 최강의 고수들이었어요. 그 기념으로 부부지연을 맺었죠.
하지만 그 이후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어요.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로 할머니가 시간을 빼앗겼던 탓이에요. 할머니는 다시 할아버지와 어깨를 나란히 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할아버지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기에 뜻을 이루지 못했어요.
삼십여 년의 분투에도 할아버지를 추격하는 데 실패한 할머니는 절망감에 빠졌어요. 하지만 포기하는 대신 특단의 조치를 강구했어요. 역사책에 묻혀있던 신령을 끄집어 낸 거죠. 할머니는 온 바다를 헤집고 다녔어요. 그러는 동안 할아버지에게 점점 더 뒤쳐졌고요. 할머니가 미쳐가는 걸 보면서도 할아버지는 양보를 하지 않았어요. 참 독한 분이시죠.”
장광설을 중단한 공주가 검황자를 바라보았다. 순진한 검황자는 바로 미끼를 물었다.
“혹시라도 유사한 상황에 처하면 나는 그러지 않을 거요, 아리아.”
또 다시 미소를 교환하는 두 사람을 보니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소?”
내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뜨끔했는지 공주가 얼른 웃음기를 지우고 말을 이었다.
“할머니는 무려 십이 년의 수색 끝에 신령을 발견했어요. 빙산의 뿌리 깊숙한 곳에 박힌 까만 돌이 신기하게도 빙공을 운용하면 반응을 보였다는 군요. 할머니는 신령이 빙력의 증강에 엄청난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어째서 선조들이 신령의 신력을 취하려다 목숨을 잃었는지도 알게 됐어요.”
공주가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나는 머릿속으로 추론했던 내용을 입 밖으로 뱉어냈다.
“빙공이 일정한 수준을 넘지 못하면 신령이 약이 아니라 독으로 작용한 거군.”
공주가 탄성을 터뜨렸다.
“아! 어떻게 알았나요?”
“뭐, 이 정도를 가지고.”
비상한 두뇌 운운하며 자화자찬하려다 간신히 참았다.
“할머니는 당신의 성취가 조금만 낮았더라도 신령의 빙기에 해를 입었을 것을 직감했대요. 아슬아슬하게 경계에 걸쳐 있었던 거죠.”
“그래서 빙후 어르신은 신령 덕분에 무정한 부군을 능가하게 되었소?”
당연히 긍정의 대답이 나올 거라 예상했지만, 빗나갔다.
“아니에요. 두 분의 격차는 그대로 유지되었어요.”
나에 앞서 검황자가 질문을 던졌다.
“어째서 그리 된 게요, 아리아?”
“할머니는 욕심쟁이가 아니었으니까요.”
검황자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바로 알아들었다.
“신령을 공유했군.”
“무황은 무재만 대단한 게 아니었군요.”
공주의 감탄에 으쓱하기보다는 한숨이 나왔다. 진소월에겐 소꿉장난 수준이었다.
“할머니가 나중에 고백하기로, 혼자 먹기엔 떡이 너무 컸대요. 그리고 남편이자 필생의 호적수와 정정당당한 경쟁을 하고 싶었대요. 그래서 당신의 발견을 할아버지에게 알렸어요. 할아버지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죠.
할아버지는 신령의 힘으로 단기간에 무력이 배가되었어요. 단 삼 년 만에 일 갑자 동안 쌓아온 것과 맞먹는 빙력을 얻은 거죠. 마침내 천하최강자가 되었다고 확신한 할아버지는 남방으로 내려갔어요. 전례 없는 융성기를 구가한다는 남방 무림의 절대자들을 상대로 당신의 확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하기 위해서요. 하지만……, 결과는 말하지 않더라도 알 테죠?”
알다마다. 장왕에게 가로막힌 빙왕은 다른 왕들과는 붙어보지도 못하고 북해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나는 후일담이 궁금했다.
“빙왕 어르신에겐 패배를 설욕할 수단이 있었잖소?”
“그게 오히려 화근이었어요. 할머니의 우려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신령의 빙기를 흡수하기 위해 무리를 했어요. 그러다 감당불가의 빙기에 침탈당해 전신이 마비되고 말았어요. 할머니가 제 때 구하지 않았다면 돌아가셨을 거예요.”
“빙왕 어르신 얘기는 이쯤하고, 빙후 어르신은 어떻게 됐소?”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느리지만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방식을 택했어요. 그리고 결국 정점에 올랐어요. 어느 시점에서는 남방으로 내려가기 직전의 할아버지를 넘어섰고 그 이후엔 더 이상 갈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대요. 신령을 발견한 날로부터 치면 이십 년 만의 일이었어요.”
나는 시간을 계산해보고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현재의 경지에 드신 게 얼마 전이었겠군.”
“맞아요. 공자님을 데리러……, 아니 할아버지의 설욕전을 하러 가기 불과 보름 전이었어요.”
공주가 나를 직시했다.
“십칠 년 전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할머니는 당신이 하늘 아래 최강의 존재가 되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대요. 그런데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죠. 내색은 하지 않으셨지만 상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거예요. 평생을 당신의 목표를 이루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버틴 분이니.”
공주의 음성에 깃든 원망을 감지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녀와 무관하게 나는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본의는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빙후를 사지로 몰아넣은 격이 되고 말았다.
빙후는 일 년을 기한으로 설정했다. 그녀 자신의 말마따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성공하면 단기간에 빙력이 크게 증강될 테지만 실패하면 물고기들의 먹이가 될 터였다. 빙왕의 전례를 보건대 후자가 될 확률이 훨씬 높았다.
빙후의 결의를 존중했지만 나는 말리기로 작심했다. 몰랐다면 모를까 알고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
“신령의 위치를 알려줄 수 있소?”
내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공주가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러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요. 할머니 당부 때문이 아니라 나도 모르기 때문이에요. 할머니는 신령이 금단의 열매라고 했어요. 천빙신공이 최소한 칠 단계에 이르지 않으면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빙궁의 역사를 통틀어 그 단계에 오른 이들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밖에 없어요. 지난 천 년 동안 오 단계까지 간 사람도 두 분을 포함해 여덟 명뿐이에요. 현재 할머니를 제외한 빙궁의 최고수인 오(五)장로도 사 단계에 불과하고요. 한 단계 나아가는데 통상 이삼십 년이 소요될뿐더러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어렵다니까 올해 아흔이 넘은 그이가 신령의 공능을 얻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겠죠.”
검황자가 가려운 곳을 대신 긁어주었다.
“당신은 몇 단계요, 아리아?”
“부끄럽지만 아직 이 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했어요. 아마 사오 년은 더 걸릴 거예요. 할머니는 내 나이 때 이미 삼 단계에 올랐다는데.”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오. 중요한 건 재능이 아니라 노력이오. 최선을 다한다면 비록 성취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더라도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소.”
“고마워요. 사실 할머니는 아예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아서 샘도 안 나요.”
나는 검황자와 공주가 더 시시덕거리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빙후 어르신은 몇 단계요?”
“구 단계에요. 상상에서나 가능하다는 경지지요. 하지만 이번엔 상상 이상의 단계, 즉 십 단계에 도전할 거라고 하셨어요. 제발 성공하셔야 할 텐데.”
검황자가 슬쩍 공주를 끌어당겼다.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몸을 기울여 그에게 안겼다. 기가 찼지만 못 본 척했다. 나는 공주의 마지막 말을 곱씹으며 그 바람이 이루어지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