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18
제217화 아까 거짓말을 한 거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더니 확실히 듣는 것과 보는 것은 천양지차였다.
무왕에게서 세 차례나 십팔 년 전 죽산에서 여인과 치렀던 일전의 양상에 대해 상세히 들었지만 직접 겪는 그녀의 칼부림은 그의 설명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여인의 무위가 몇 층이나 상승한 탓이겠지만 초식 자체의 탈바꿈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할 터였다. 내가 광무신공의 절기들을 창안하고 터득하면서 뇌전십이검, 그리고 구환도법과 사실상 결별을 고했던 것처럼 여인 역시 새로운 경지에 들어서면서 이전의 절학들을 버렸을 것이었다.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듯. 누에가 나비가 되듯.
사오 초의 교환 만에 나는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더불어 여인의 무력이 나보다 반 뼘은 위라는 것도.
공력으로는 그다지 밀리지 않았으나 무공의 깊이에서는 차이가 났다. 정면충돌을 고수할 시 이른 초수에 승패와 생사를 가를 수도 있는 차이였다. 하여 나는 미리 염두에 두었던 전술을 구사하기로 했다.
사전에 정하지는 않았으나 이 일전이 단순히 가진 바 무력의 우열을 가리는 승부가 아님은 명백했다. 나처럼 여인도 어느 한 쪽이 절단이 나야 결판이 나리라 여기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무조건 이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러려면 상대의 강점을 약화시키고 내게 유리한 방식으로 전투를 행해야 했다.
관건은 속도였다. 여인의 신법, 특히 경신공이 나를 능가한다면 내가 쓰고자 하는 전술은 무용지물이었다.
최초의 공방에서 나는 이점부터 확인했다. 여인은 그녀의 칼바람을 흘려내지 않고 후퇴로써 대응한 나를 곧장 추격해왔다. 그녀의 속도는 나에 필적했다. 그러나 거리를 좁힐 정도는 아니었다. 나에겐 순간 이동이라는 비장의 패가 있으니 충분히 해 볼만 했다.
이런 식의 싸움에 도가 텄기에 나는 도주하는 데 주력하지 않고 반격을 가했다. 그리고 여인이 호신강기를 두르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 그녀는 도막(刀幕)을 방패로 삼았다. 광환으로 일시에 열네 군데를 공략했지만 모조리 튕겨 나왔다. 나는 광참과 광폭은 아껴두었다. 결정적인 순간 터뜨려 단박에 승부를 결정짓기 위함이었다.
추격전은 촌각도 지속되지 못했다. 몇 시진 동안 집요하게 나를 쫓으며 내 원거리 공격에 시달렸던 빙후와 달리 여인은 일찌감치 내 의도를 간파하고는 칼을 내렸다. 그러더니 그녀에게서 칠팔 장 떨어진 곳에 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감한 눈빛이었으나 그렇기에 부담스러웠다.
“그이에게 들었던 것과는 많이 다르군요.”
나는 여인이 말하는 ‘그이’가 무왕을 지칭함을 알았다. 그녀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곳이 명교였다니 무왕과 면담했을 공산이 컸다.
여인이 심리전을 시도하고 있음을 눈치 챘지만 나는 기꺼이 응해주었다.
“뭐가 다르다는 거요?”
“그는 자신의 후인이 타고난 승부사라고 했어요. 그 방면으로는 천하제일일 거라고요.”
“그 어른의 말씀이 맞소.”
고소라도 지을 법하건만 여인의 무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승부사는 도망가지 않아요.”
“천만에. 모름지기 승부사란 승리를 위해 무엇이든 활용하는 자를 일컬음이오. 그게 진정한 승부사요.”
“그런 식으로는 나를 이길 수 없어요.”
“그렇지 않소. 장담컨대 저 태양이 지평선 위로 스러질 때쯤 당신도 모래 위에 쓰러져 있을 거요.”
괜한 호언이 아니었다. 나는 자신이 있었다. 이미 빙후에게 시험한 바, 끊임없이 치고 빠지기는 나보다 상위의 무력을 지닌 이를 상대로 매우 효과적인 수법이었다. 사막은 빙원 못지않게 넓고 나에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신법이 있었다. 내 경신엔 원력이 거의 소모되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경이로운 치유력까지 보유하고 있으니 설령 도중에 부상을 입더라도 최종적으로는 승리를 거머쥘 확률이 구 할하고도 구 푼이었다.
중천에 뜬 해를 올려다 본 여인이 반박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설사 그렇게 되더라도 그런 건 승리가 아니에요.”
“그건 당신 생각이고.”
여인은 나와 논쟁을 이어가는 대신 비웃음으로 응수했다. 그녀를 대면한 이후 최초의 표정변화였다. 그녀의 조소를 보니 약이 올랐다. 하지만 나는 빤한 노림수에 말려들 만큼 하수가 아니었다.
나를 주시하던 여인이 갑자기 모래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칼을 무릎 위에 올리고는 아예 눈까지 감아버렸다. 무시가 상책이었으나 결국 묻고 말았다.
“지금 뭐 하는 거요?”
“그만 가 봐요. 당신과는 볼 일이 끝났으니까. 나는 겁쟁이를 상대하지는 않아요.”
누가 그렇게 유치한 수작에 말려들 줄 알고!
하지만 내 가슴과 입은 머리와 다르게 반응했다.
“누구더러 겁쟁이래. 좋소. 그렇게 원한다면 제대로 붙어주지. 일어나쇼.”
여인이 칼을 쥐고 몸을 일으켰다. 만면에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 * *
나는 스스로를 사지에 던졌다.
무모했다. 미친 짓이었다. 그러나 내게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성모의 예언이었다. 그녀가 보았다던 두 장면이 실제로 현실화된다면 오늘 도후의 칼에 몸이 양단되는 일은 없을 터였다. 그에 앞서 먼저 울부짖어야 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죽은 다음에 눈물을 쏟아낼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순서 상 울부짖기 전에는 두 동강 날 일도 없었다.
물론 일말의 불안감은 있었다. 성모를 전적으로 믿기는 어려웠다. 그녀가 틀렸을 수도 있지 않은가. 만에 하나 개꿈이었다면 괜한 객기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목숨을 내던지는 우를 범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가 볼 참이었다. 성모와 무관하게 나 자신을 극한의 상황에 몰아넣고 싶었다. 그 속에서 내 무학의 정체를 종료할 새로운 발돋움의 단초를 발견하기를 갈망했다.
* * *
무력이 딸릴 때는 속전속결이 상지상책이었다.
나는 순간이동을 발해 여인에게 쇄도하며 선공했다. 최대치의 원력을 실은 광참이 여인의 도막을 찢어발겼다. 그 틈을 광폭이 파고들었다. 여인의 동체에 이른 빛 무리가 폭발했다.
그러나 여인은 해왕처럼 천참만륙되지 않았다. 그녀의 본체가 좌측으로 이동할 것을 예측한 나는 이미 그쪽에 광망을 깔아두었다. 그물에 걸린 그녀가 주춤했다. 그 순간이 고비였다. 후속타를 가하면 그녀를 끝장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나도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녀가 일으킨 회오리바람은 이미 나를 감싸고 퇴로까지 차단하고 있었다. 참사를 면하려면 손을 거두고 지금 발을 빼야 했다. 그게 현명했다. 아니,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결정타를 결행했다. 철봉과 옥소에서 발출된 두 가닥의 빛줄기가 여인의 몸에 작렬했다. 쌍(雙) 광참에 적중 당한 여인이 사등분 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내 몸뚱이도 두 쪽으로 쪼개지고 있음을 자각했다.
빌어먹을.
* * *
욕설이 나왔지만 나로서는 천만다행히도 동귀어진이 아니라 양패구상이었다.
부상은 내 쪽이 훨씬 중했다. 어깻죽지부터 사타구니 어림까지 잘린 나는 간신히 양단을 모면한 반면 여인은 가슴팍과 복부에 십자(十字)의 도흔만 새겼을 뿐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았던 도막으로 내 광참들을 방어해냈다는 뜻이었다.
결국 내 패배였다. 역시 정면승부로는 역부족이었다. 내 승부감각도 무력의 격차를 극복하지 못했다.
나는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 삼사 장 떨어진 곳에 널브러져 있는 여인을 보았다. 그녀가 마무리를 지으려 들면 악착같이 쥐어 짠 원력을 철봉에 담아 광환을 쏘아낼 참이었다. 도막을 일으킬 겨를이 없을 터이기에 그녀도 무사하지는 못할 터였다.
내 심사를 헤아렸는지 일어나려고 발버둥 치던 그녀가 종전을 제안했다.
“충분해요. 그렇지 않나요?”
“그렇소.”
내가 동의하자 여인이 기립을 포기하고 나처럼 벌러덩 드러누웠다. 습기라고는 일점도 없는 따가운 햇살이 그녀와 내 얼굴에 공평하게 쏟아졌다.
가까스로 출혈을 막고서 절단부위의 접합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어느 정도 내-외상을 다스렸는지 여인이 말을 걸었다.
“어때요?”
대꾸할 여력이 없었지만 오기로 입을 열었다.
“어떨 것 같소?”
“몹시 아프겠군요?”
“…….”
“죽지는 않겠지요?”
“…….”
“하마터면 그이와의 약속을 저버릴 뻔했어요.”
미끼를 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소리요?”
“당신을 시험하되 기회를 한 번 더 주라고 부탁하더군요. 다시 볼 때는 괄목상대할 성취를 현시할 거라면서. 나는 조건을 충족하면 그러마고 약속했어요.”
“…….”
“무슨 조건인지 묻지 않나요?”
“빤하지 않소. 내가 그럴 만한 사람이면 그렇게 하고 그렇지 못하면 그냥 끝내버리겠다고 했을 테지.”
“똑똑하군요.”
나는 여인의 칭찬이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나를 봐 줬다는 거요?”
“그럴 여유가 없었어요.”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다.
“생사를 건 일전에서 특별한 강미를 뽐낸다더니, 과장이 아니었군요. 정말 섬뜩했어요. 그이의 당부를 명심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거예요.”
대체 이 여자에게 무슨 조언을 한 겁니까. 피아를 구분하셔야죠? 나는 심상에 떠오른 무왕에게 항의했다.
나는 여인의 다음 말을 막았다.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 몸부터 좀 돌봐야겠소.”
“그래요. 나도 사실 말하기 힘들어요.”
쉽게 합의를 본 우리는 각자 치유에 전념했다.
* * *
나는 해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이후에도 한참이 지나서야 좌정할 수 있었다. 나보다 훨씬 일찍 일어난 여인은 한창 운공 중이었다. 나를 지척에 두고 무방비 상태에 든 그녀의 대범함과 무심함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내기를 일주천하기 전에 달빛이 내려앉은 여인의 얼굴을 일별했다. 미모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사뭇 매력적이었다. 뜻밖의 감상에 실소하며 눈을 감았다.
눈을 뜨니 여인이 코앞에서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조금만 붙으면 입맞춤도 가능할 거리였다. 당황한 기색도 없이 여인이 기습했다.
“잘 생겼군요.”
나는 여인의 안목에 감탄했다. 하지만 화답은 삼갔다. 빈말로도 여인더러 예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굉장하군요. 불사지체에 가깝다고 해서 반신반의 했는데 그새 이만큼이나 아물다니. 당신은 괴물이군요.”
나는 다시 한 번 무왕을 성토했다. 대체 이 여자에게 얼마나 많은 비밀을 누설한 걸까.
눈살을 찌푸리자 여인은 내 심사를 곡해했다.
“괴물이라는 표현이 싫은 모양이군요. 좋은 뜻으로 한 말인데.”
“…….”
“나하고 얘기하고 싶지 않나요? 아니면 아직도 말하기 어렵나요?”
기분이 묘했다. 마치 나에게 반한 소녀를 대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나는 오래도록 한 사람을 가슴에 품고 있었어요. 그런데 오늘 또 다른 사내가 들어왔네요. 정말 기뻐요.”
아니, 아줌마. 너무 진도가 빠른 거 아뇨? 게다가 이 몸은 임자가 있단 말이오.
여인이 나의 또 다른 착각을 박살냈다.
“그이가 더 이상 내 칼을 받아줄 수 없어 낙담했는데 이런 행운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어요.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당신의 목을 날려주겠어요.”
그런 살벌한 말을 그렇게나 해맑게 내뱉으면 어쩌자는 거요, 아줌마.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요. 그 어른 말씀처럼 그때의 나는 더욱 강해져 있을 테니까.”
여인이 환하게 웃었다.
“말만 들어도 기대 돼요. 하지만 그렇더라도 결과는 바뀌지 않을 거예요.”
확신에 찬 여인의 눈을 보며 물었다.
“아까 거짓말을 한 거요?”
“거짓말이라뇨?”
“나를 봐 줄 여유가 없었다면서?”
“맞아요.”
“그게 당신의 전력이면 다음번에 당신은 내 상대가 될 수 없소.”
여인이 싱긋 웃었다. 의외로 표정이 풍부한 여자였다.
“발전하는 건 당신만이 아니에요.”
나는 말문이 막혔다.
“당신 덕분이에요. 그날 그이가 그랬듯 당신은 내 한계 너머를 보여주었어요. 내 칼은 이제 궁극에 이를 거예요.”
이런, 제길. 죽 쒀서 개 준 꼴이 아닌가. 목숨을 걸었건만 나는 건진 게 없는데 이 여자는 횡재를 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