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19
제218화 어째서 소문이 나지 않았소?
나는 분통을 잠시 눌러두고 여인의 말에서 중요한 부분을 끄집어냈다.
“십팔 년 전 내 사부와 겨루었을 때 사부를 쓰러뜨리고도 목을 날리지 않았던 이유가 깨달음을 준 데 대한 보답이었소?”
예상과 달리 여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그를 쓰러뜨리긴 했지만 나도 온전치 못했어요. 만약 내가 끝을 내고자 했다면 나도 무사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그이도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최강의 반격을 했을 테니까. 하지만 내 안위를 염려해 몸을 사린 것도 마무리를 보류했던 이유는 아니었어요.”
여인이 말을 잇지 않아 하는 수 없이 물었다.
“그럼 뭐요?”
“약간의 우세를 보이긴 했으나 내 승리라고 주장하기엔 석연치 않은 승부였어요. 그래서 다음에 다시 붙어 확실한 승패를 가리고자 마음먹었어요. 물론 그때는 내가 이기리라 확신했지요. 왜냐하면 그날 그이와 최후의 공방전을 벌이다 갑자기 오랫동안 나를 가로막았던 벽을 돌파할 비책이 떠올랐거든요. 나는 그 비책을 체현하면, 그래서 새로운 경지에 들어서면 그이를 압도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어요.”
여인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러 모로 오늘의 일전과 비슷하네요. 마치 그날의 일이 되풀이 되는 것 같아요.”
나는 ‘되풀이’를 두고 또 다른 상상을 하고 있었다. 여인과의 재대결도 오늘의 승부와 판박이가 되지 않을까.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는 오늘과 달리 간신히 절단을 모면하는 대신 완전히 ‘두 동강’나는 게 아닐까.
아무 짝에도 도움이 안 될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린 나는 여인과 말을 섞은 김에 궁금했던 점들을 해소하기로 했다.
“그날 내 사부와 대결한 이후 해왕도로 돌아간 당신은 폐인 비슷한 꼴이 된데다 종내에는 폭풍우 치는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고 하던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요?”
여인이 수천 개의 별들이 총총히 박힌 야천으로 눈길을 올렸다.
“그 이야기를 하자면 밤을 새도 모자랄 거예요.”
“나는 시간이 많소.”
여인의 입가에 고소가 떠올랐다.
“좋아요. 말해줄 게요. 차라리 잘 됐네요. 그이와 재회한 날 고백할까 망설이다가 끝내 속에 가두어두고는 내내 답답했는데. 그이의 후인인 당신에게 대신 쏟아내면 후련해질 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움찔했다. 나를 보는 여인의 눈엔 진소월의 봉목에 일렁이던 연정이 담겨있었다.
“그날 그이를 본 이후로 내 삶은 송두리째 변했어요.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도저히 주체하기 어려웠어요. 깨달음을 체현하기 위해 전력투구해야 했음에도 그이와 다시 만났을 때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중원어를 배우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으니 말 다했죠.
그러던 어느 날 그이가 중원제일검에게 도전했다가 패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정신이 번쩍 들었죠. 대륙이 넓다하나 그이보다 강한 자가 존재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하루 빨리 신도(神刀)를 완성해 그이에게 ‘선물’을 주고 그이 대신 중원제일검에게 설욕하리라 다짐했어요.”
일순 등줄기가 서늘했다.
“선물이란 게, 혹시 사부를 염왕전에 보내는 걸 말하는 거요?”
여인이 태연하게 수긍했다.
“그래요. 무인에게 있어 강자와 싸우다 목이 날아가는 것만큼 영광스러운 일은 없어요. 그 영혼은 신계의 최상층에 올라가니까요.”
나는 정말로 그 따위 개소리를 믿는지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불문가지였다.
여하간 편리한 논리였다. 강적과 싸우다 상대를 죽이면 대득이고 설령 내가 죽더라도 천상의 영화가 기다리고 있으니 무조건 남는 장사가 아닌가. 그런 믿음을 갖고 있다면 불퇴전의 전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해왕도의 모든 인간이 그들의 신앙을 맹목적으로 실천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나와 마주쳤을 때 해왕은 불문곡직 내빼려고 하지 않았던가. 우두머리이기에 현세에서 누리는 권세와 부귀에 더 집착한 걸까. 이유가 뭐건 그의 행태는 내가 알고 있는 해귀들과는 판이했다. 그리고 내 기준으로는 그가 정상이었다.
내가 그녀의 신념에 관해 왈가왈부하지 않고 넘어가자 여인이 말을 이었다.
“어디까지 했더라? 아, 다짐! 맞아요. 나는 그이의 패배 소식을 접한 그날 본격적으로 수련을 재개했어요. 신전에 틀어박혀 오로지 무공에만 몰두했지요. 워낙 열중한 탓에 빠른 시일 내에 성과를 얻었어요. 석 달 만이었던가. 그이와의 일전에서 구상했던 비약의 비책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지요. 하지만 그 이른 성취는 결과적으로 독이 되고 말았어요.”
별안간 여인의 이마에 암운이 드리웠다. 그 시절의 고난을 상기하고 있는 것이리라. 나는 그녀가 상념에 빠지기 전에 추임새를 넣어 뒷말을 재촉했다.
“어떤 독이었소?”
“제(第) 구십삼도(九十三刀)를 구사하기 위해서는 그에 준하는 공력이 필요했어요. 그러지 않으면 육신이 충격을 받게 될 공산이 컸어요. 그럴 위험성을 인지했음에도 욕심을 부렸어요. 전인미답의 신로(新路)를 확인하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죠. 하지만 결국 과욕의 대가를 치렀어요. 뼈저리게.”
“내상을 입었군. 회복불능의.”
내 중얼거림을 들은 여인이 쓰게 웃었다.
“그래요. 시체처럼 누워서 옴짝달싹 못하는 그이만큼은 아니지만 칼조차 들어올리기 힘든 폐인이 되었지요. 단 한 순간의 잘못된 결정으로 스스로를 망친 나는 절망했어요. 너무나 비참해 그대로 죽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어요. 실의에 의해 자살한 영혼은 신계의 맨 밑바닥에 자리하기 때문이에요. 그러고는 상위의 혼들이 배설하는 온갖 원념을 떠안으며 영원히 고통 받아야 하죠.”
나는 여인이 허무맹랑한 잡설을 더 늘어놓기 전에 진도를 나갔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로 뛰어든 게 자살행위가 아니었단 말이오?”
“당연하죠. 그건 도전이었어요. 목숨을 건 도전. 그렇기에 설령 실패하더라도 신계의 상부에 들 수 있었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도전이었소?”
“해신의 힘을 얻기 위한 도전이었어요.”
“그러니까 그 해신의 힘이란 게 뭐였소?”
들으나 마나 황당한 내용이 나오리라 예상했는데 여인이 뜻밖에도 해석 가능한 답을 주었다.
“대륙인들은 해신을 용왕이라 부른다죠? 해신의 힘이란 다름 아닌 그 용왕의 화신이에요. 겉보기에는 금빛 구슬처럼 보이죠.”
“아!”
절로 탄성이 나왔다. 용왕의 화신은 만년금구의 내단임에 틀림없었다. 금빛 구슬이라면 보통의 내단이 아니라 금단(金丹)일 터인데 천하의 영물 중 으뜸으로 치는 귀물(貴物)이었다. 공교롭게도 그것은 무왕이 얻은 최고의 기연이기도 했다.
나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런 게 있었다면 처음부터 복용했으면 됐잖소? 어째서 탈이 난 다음에 취한 거요?”
“절박한 상황에 처하기 전에 ‘해신의 힘’은 단지 전설에 지나지 않았어요.”
“무슨 소리요?”
“오래 전 대륙을 일통했던 제왕은 만병을 통치하고 영생을 보장하는 신물(神物)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그것을 탈취하기 위해 해왕도로 사람들을 보냈어요. 그들은 제왕의 명을 이행하지 못했어요. 신도(神刀)의 시조들에게 쫓겨났기 때문이에요. 시조들은 훗날 대륙이 강성해져 또 다시 마수를 뻗어올 것을 염려해 신물을 해중의 심처에 봉인했어요. 그러고는 신도의 맥을 이은 이들에게 전언을 남겼어요. 오직 용자(勇者)이자 연자(緣者)만이 봉인을 풀고 해신의 힘을 얻을 있다고.”
“그러면 진즉 당신 선대가 먹어치웠을 텐데?”
“그럴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용자와 연자의 조건을 충족하려면 먼저 본신의 무력을 포기한 후 태풍이 극성에 이르렀을 때 거친 풍랑이 이는 바다에 들어야 했기 때문이에요. 해신의 간택을 받지 못하면 목숨을 잃을 터이기에 다들 도전을 꺼렸지요. 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전설이 유명무실해진 탓도 있어요.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실제가 아니라고 의심하는 분위기도 팽배했죠. 하지만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유일한 부활의 희망이었으니까.”
그럴싸하게 둘러대긴 하지만 결국 죽으려고 작정했던 게 아닌가. 하지만 너무도 진지한 여인의 신색에 나는 비아냥거림을 자제했다. 그렇더라도 약간의 비꼼은 불가피했다.
“바다에 들어가니 용왕의 화신이 당신 입에 알아서 떡하니 들어옵디까?”
“그럴 리가요. 나는 시조들이 전한 당부에 따라 온 몸에 힘을 뺀 채 나를 해류에 오롯이 내맡겼어요. 그러면서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죠. 의식을 잃은 자는 해신을 만날 자격이 없다고 했기 때문이에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지만 필사적으로 버텼어요. 해신이 나를 자신에게로 인도해주리라 굳게 믿으면서. 믿음은 보상을 받았어요. 어느 순간 호흡이 가능해져 눈을 떠 보니 동굴 같은 데 들어가 있더군요. 그리고 내 앞에는 해신의 화신이 있었어요. 보자마자 알았죠. 그래서 바로 내 안에 모셨어요. 그러자 속에 불이 나더니 돌연 사방이 캄캄해졌어요.”
“혼절한 거군.”
“그런가요? 그 다음 기억은 좀 당혹스러운 것이었어요. 여전히 어두웠는데 사람들의 수런거림이 들리더군요. 가만히 귀를 기울이다가 소스라쳤어요. 내가 숨이 끊어진 줄 알고 나를 관에 넣고는 역대 신자(神子)와 신녀(神女) 들의 유해가 안치된 신전 지하로 옮기는 중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에요. 살아있다고 소리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더군요. 그래서 꼼짝없이 한 동안 시신 노릇을 해야 했답니다.”
어디까지 사실일까.
의구심을 갖지 않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여인이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보기엔 표정이며 음성이며 지나치리만치 진지했다.
“되살아난 다음엔 어째서 소문이 나지 않았소?”
“잡사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고 수련에만 전념하기 위해서였어요. 대륙에 그이 같은 괴물들이, 아! 이 표현은 나쁜 뜻이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찬탄의 의미에요. 아무튼 바다 너머에 굉장한 강자들이 여럿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나는 어중간한 성취로는 평정이 어려울 거라 판단하고는 절정에 이를 때까지는 신묘(神廟)를 나가지 않기로 결심했어요.”
“그래도 수련을 하다보면 당신이 회생했음을 사람들이 알게 됐을 텐데? 아무리 깊은 땅속이었어도 지상으로 진동이 전해졌을 거 아니오?”
“물론 신전의 무녀(巫女)들에겐 알렸어요. 먹을 것도 필요했으니까요.”
“입들이 무거운 여자들이었나 보군.”
“당연하죠.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충성스러운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그 지하묘지에서 십여 년을 홀로 수련한 거요?”
“정확히 십칠 년 팔 개월이에요. 그 동안 해신의 힘을 완전히 체화했고 내 신도는 구십구도(九十九刀)에까지 이르렀어요. 실은 이미 삼 년 전에 거기에 도달하고서 단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는데 오늘 드디어 일보전진의 동인을 얻었네요. 고마워요. 전부 당신 덕분이에요. 꼭 보답을 할 게요.”
보답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도 남기에 절로 실소가 나왔다. 하지만 바로 정색했다. 웃을 계제가 아니었다. 다음에 여인을 만나면 정말로 원치 않는 선물을 받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손가락만 빨고 있을 생각은 개구리 코딱지만큼도 없었다. 정해진 운명이고 나발이고 틀어버리면 그만이었다. 몰랐다면 모를까 알고도 당한다면 바보였다. 그리고 나는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