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23
제222화 거기까지만 해
마왕은 그렇다 치고 여기서 독의가 왜 나온단 말인가.
내가 묻기 전에 노인이 설명을 덧붙였다.
“둘 다 절대적으로 필요했다네. 마왕은 요마를 강제하기 위해서. 그리고 독의는 대법을 완성하기 위해서.”
“안 끼는 데가 없군.”
내 중얼거림에 노인이 고소를 지었다.
“독의 말인가. 그는 가히 천재일세. 의술만이 아니라 술법 방면으로도 탁월하더구먼. 괴짜이기도 하네. 호기심을 충족한 걸로 충분하다며 대가도 거절하더구먼. 비밀 유지를 위해 살인멸구까지 고려했는데 그러지 않아도 될 거라는 판단을 내리고는 놓아주었네. 기실 그 조치에는 내 개인적인 호감이 크게 작용했다네. 그냥 죽이기엔 너무 아까운 인물이었지.”
“그러니까 요마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그녀의 요력을 아이에게 이식했다는 거군.”
“당연하지 않은가. 아무리 마도천하제패의 대업을 위해서라지만 누가 자기 목숨을 바치고 싶겠는가?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네. 무심코 밀실에 들어왔다가 마왕에게 제압당하고 독의에 의해 요체가 빨리는 내내 얼마나 원독에 찬 눈으로 노려보던지. 지금도 그 눈빛만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다네.”
“동료까지 제물로 삼다니, 개만도 못한 놈들이군.”
“맞네. 우리는 욕을 먹어도 싸네. 욕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천벌을 받은 것 같으이. 그렇게 난리를 쳤으면 성공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오늘날 이렇게 개만도 못한 신세가 되지 않았나.”
자조하면서도 뭐가 좋은지 노인이 싱글벙글했다.
나는 의문점을 제기했다.
“그 짓을 한 게 나 때문이었나?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 급조한 감이 있는데.”
“그럴 리가 있는가. 자네가 마웅이라는 별호를 얻으며 강호에 등장하기 삼 년 전에 이미 대계가 시작되었다네. 적합한 아이를 고르는 데만 이 년이 걸렸지. 독의에게도 미리 내 구상을 알렸다네. 재미있는 실험이 될 것 같다며 꽤 의욕을 보이더니 일 년 만에 요체 이전의 비법을 완성해 왔더구먼. 그 동안 은밀히 빼돌려 그에게 제공한 요마류의 계집들이 사십 명에 달한다네. 피(被)이식체의 대용으로 쓰일 동남동녀는 그 열 배 이상이고.”
절로 욕지기가 치밀었다. 독의든 이 노인이든 용서해서는 안 될 악종들이었다.
내 심사를 헤아린 노인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어쩌겠는가. 그게 마도의 방식인 것을. 마도에서는 강자 외엔 존재가치가 없다네. 벌레나 마찬가지지. 개미를 밟아 죽이거나 파리를 때려잡는다고 비난하지는 않지 않은가?”
“늙은이도 강자가 아니니 손가락으로 짓눌러버리면 되겠군.”
“벌레라도 쓸모가 있으면 살려두는 법일세. 예컨대 거미나 벌은…….”
“닥쳐!”
내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지 노인이 입만 닫은 게 아니라 눈까지 감았다.
분기를 가라앉힌 나는 대화를 재개했다.
“처음부터 도왕을 노렸나?”
“그렇다네. 그가 최적의 대상일뿐더러 선택의 여지가 없었네.”
“어째서?”
“요체를 품었지만 그 아이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네. 그것도 두 가지나. 하나는 접촉 대상과의 분리 기간이 길어지면 요력의 효과가 사라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종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네. 자기가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그냥 아이였기에 도왕 말고는 활용할 데가 없었네. 사왕은 마왕이 극력 반대한 탓에 논외였고 아이를 이용해 무왕이나 장왕을 끌어들인들 그들이 우리 뜻대로 움직일 가능성은 전무에 가까웠으니까. 반면 절대지경의 무존이 되고도 척박한 변방 무림의 오지에 처박혀 있어야 했던 도왕은 잘만 꼬드기면 마도의 천하제패에 힘을 보태줄 수 있을 거라 봤네. 더욱이 그는 우리에게 최고의 위협요소였으니 한편으로 삼기만 하면 일거양득이었지.
우리의 첫 번째 목표물은 명교였네. 사패 중 최약체이기 때문이었네. 마왕과 도왕, 그리고 팔마라면 단숨에 명교를 무너뜨릴 수 있을 터였네. 두 배의 전력이었으니까. 명교가 멸망해도 우리에 대항해 정사(正邪)가 연합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으니 다음엔 사벌과 정맹을 차례로 쓸어버리기만 하면 그만이었지. 까마득한 옛날 같지만 생각해보니 그런 몽상에 잠겼던 게 채 일 년도 되지 않았구먼.”
노인이 나를 올려다보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준비가 끝나갈 즈음 그 사태가 터졌네. 작년 가을 자네가 사벌에 침입해 사왕을 유인한 후 독왕과 함께 합공했던 사건 말일세. 그것만으로도 상황은 급전직하했지만 그 이후의 전개는 정말로 정신을 차리기 힘들 만큼 급박했더랬지. 독왕에 이어 장왕이라니. 얼마 전까지 천하일통을 꿈꾸다가 졸지에 존립 자체를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되어버렸네. 아직 왕의 반열에 오르기엔 부족한 바가 있었지만 자네는 이미 왕들을 제외하면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초강자가 되어있었으니까.”
“…….”
내 반응을 기다린 듯 나를 올려다보던 노인이 침묵이 길어지자 말을 이었다.
“사벌과 우리는 연수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각자 꿍꿍이속이 있었지. 사마 동맹의 협상이 결렬된 건 마왕과 사왕의 갈등 탓이 아니라 그 때문이었네. 나는 그자들이 낭왕을 포섭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네. 생각해 보면 간단한 일이었는데. 그들로서는 달리 대안이 없었으니까. 아마 나대로 전세를 역전시킬 계책에 몰두하느라 그들의 동태 파악에 소홀했던 것 같네. 무슨 계책인지 아는가?”
왜 모르겠는가.
“내가 계양에 찾아갈 것을 예상하고 함정을 팔 심산이었을 테지.”
“맞네. 도왕이 우리에게 넘어왔음을 꿈에도 모를 테니까 자네가 사벌에서 행했던 수법을 되풀이할 거라고 봤지. 마왕을 끌어낸 후 모처에 대기시켰을 무왕과 합공하는 전술 말일세. 나로서는 통탄스럽게도 반만 맞았네. 그렇지 않았다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졌을 걸세.”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설마 자네가 단독으로 쳐들어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네. 그래서 마왕과 도왕에게 자네가 무왕에게로 유인하기 전에 계양에서 끝장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면서도 만에 하나라도 도주를 허용하면 포차산 쯤에 잠복하고 있을 무왕을 조심하라고 일렀지.”
비로소 진상의 마지막 조각을 찾았다. 그날 나를 추격하지 않았던 도왕의 처신은 마련과의 계약에 따른 것이 아니라 무왕을 의식한 결과였다. 결국 그 당시 그는 이미 마련과 한통속이었던 것이었다.
“일은 사람이 도모하되 이루는 건 하늘에 달려있다더니, 정말 그렇더구먼. 숱한 기회가 있었고 그때마다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했다고 자부하네만 매번 하늘이 자네를 돕는 통에 도저히 어찌 할 방도가 없더구먼.”
노인의 한탄은 나에게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 할 때임을 알렸다.
* * *
“아이는 어디에 있나?”
“나도 모르네. 하지만 누구와 있는지는 아네.”
“누군데?”
“독의일세.”
“뭐?”
“자네가 해왕을 참살한 후 정맹을 탈출해 이리로 이동하는 중에 그가 보낸 방수를 만났네. 아이를 넘겨달라고 하더구먼. 잠시 고민해보고는 독의의 요구에 응하기로 했네. 아이에게 들으니 자네와 도후에게는 요력이 먹히지 않았더군. 그래서 이용가치가 떨어진다고 판단했다네. 인질로 써먹으려다 역효과가 날 우려도 컸고.”
“독의의 방수가 누구였나?”
“만리풍일세.”
“정말 독의의 소재를 모르나?”
“그렇다네. 알면 감출 까닭이 없지 않은가.”
그 문답을 끝으로 나는 철봉을 들어올렸다. 노인의 면상에 짙은 당혹감이 떠올랐다.
“기어이 나를 죽일 셈인가? 보고는 어쩌고?”
“금은이야 따로 마련하면 될 테지. 나는 늙은이를 살려둘 수 없어.”
“어째서? 내가 마인이라서?”
“저기 둔덕이 보이나. 내가 스승으로 삼은 이가 묻혀 있다. 전날 늙은이가 보낸 마왕에게 변을 당하셨지.”
“……그렇구먼.”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그러더군. 천하에서 꼭 한 명만 죽여야 한다면 마뇌를 택할 거라고.”
“그랬구먼.”
“묻는 말에 착실하게 답했음을 감안해 고통 없이 보내주겠다, 늙은이.”
“잠깐만 기다려주게. 유언 정도는 남길 수 있잖은가?”
“…….”
“우선 자네와 만나 이야기를 나눠서 즐거웠네. 최후의 원을 이루었으니 여한이 없구먼. 혹시라도 다음에 태어나면 그 생은 자네를 위해 견마지로를…….”
“거기까지만 해, 늙은이.”
“하나만 더!”
“뭔데? 빨리 말해.”
“보고(寶庫)는 평주 흑암산의 북쪽 네 번째 골짜기 아래에 있다네. 무림의 역사에 전무후무할 무종(武宗)으로 기록될 이에게 바치는 내 경의의 표시이니 부디 요긴하게 쓰게나.”
“…….”
“나를 봐 달라고 하는 소리가 아닐세. 기꺼이 죽을 테니 깨끗이 보내주게나.”
나는 노인의 청을 들어주었다.
* * *
성주 무림과 명교의 경계선인 연강을 지나자마자 지상에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둥, 둥, 둥.
고성(鼓聲)이 내 도래를 알려주는 바람에 은천에 당도했을 때는 야심한 시각이었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명교 대문 앞의 광장에 나와 있었다. 나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각양각색이었다.
마치 자기가 주인인 양 선두에서 나를 맞이한 괴선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나에게 잔소리를 쏟아냈다. 내가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해귀들의 난동에 희생당한 이들이 부지기수로 늘었다는 비난에 발끈해 그와 입씨름을 벌이자 우리의 일상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전전긍긍했다. 특히 정파의 명숙들과 금은독군은 나더러 ‘이놈, 저놈’하며 막말을 퍼붓는 괴선의 행태에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괴선과 회포를 푼 나는 오랜만에 보는 광객과도 재회의 인사를 나눴다. 광객 옆에는 그처럼 중원육기의 일인이자 전날 소연표국과 부영상단의 오인결에서 나와 악연을 맺었던 귀수가 서있었다.
나는 그날의 사건 때문인지 안절부절못하는 섬섬옥수의 노인을 정중하게 대했다. 그가 자발적으로 척마단에 들어와 광객을 주장(主將)으로 받들고 자신은 철저하게 부장(副將)으로 처신했다는 나현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초절정 극상의 고수인 귀수는 내게 중요한 친인인 광객의 안위에 크나큰 도움이 될 인물이었다. 만약 사마 잔당 토벌전 중에 삼사(三邪)와 조우한다면 광객은 대번에 위태지경에 처할 터였다. 하지만 귀수가 같이 있다면 그들을 물리치지는 못하더라도 도피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터였다.
소면통달을 비롯한 명교 삼대호법들과 간단하게 몇 마디만 주고받은 나는 금은독군들과는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 얘기를 나누었다. 내가 중인환시리에 그들을 귀히 대우하는 모습을 보이자 두 독군은 황송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는 감읍하는 그들의 등을 일일이 두드리며 해귀 겁란에서의 활약상을 치하했다. 듣고 있던 정파 명숙들의 낯짝들이 돌처럼 굳었다.
여러 차례의 만남을 통해 대부분 낯이 익었으나 나는 정맹의 원로들에게 친근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해왕도의 침공과 그 이후의 혈난에서 그들이 드러낸 작태는 혐오스럽기 그지없었다. 저 살자고 백성을 버리고 달아나다니, 참으로 비겁한 처사였다. 설령 멸문지화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부터 대피시키고 끝까지 맞서 싸웠어야 할 게 아닌가.
내 심사를 알아차렸는지 저마다 대륙을 아우르는 명성을 자랑하는 노인들은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들을 떨구었다.
* * *
오는 길에 마뇌와 오마를 처치했음을 알려 중인을 놀라게 한 나는 그들을 전선으로 돌려보냈다. 도후와의 재대결이 언제 치러지고 어떻게 결판날지 모르니 그 전에 사마의 잔당들을 최대한 많이 쓸어버려야 했다. 잔당이라고 해도 이번 혈겁에서 증명했듯 단기간에 수십만 명의 인명피해를 낼 힘을 지닌 무리였다.
소면통달에게 보고(寶庫)에 관한 암문(暗文)을 담은 전서구를 자미원에 날리도록 요청한 후 나는 구세원으로 향했다. 무왕에게 중요한 볼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