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3
제22화 제대로 마무리하는 게 좋을 거요
“지금 뭐라고 했느냐?”
내게 소리친 이는 뱀눈이었다. 나는 그에게 눈을 돌리지 않고 방금 전에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검총에 들지 않겠습니다.”
뱀눈이 들개처럼 으르렁거렸다.
“감히 본총을 능멸하려 들다니. 그러고도 네놈이…….”
뱀눈은 말을 끊어야 했다. 선풍도골 노인이 그를 겨냥해 내기를 발산했기 때문이었다. 뱀눈은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이쯤 되니 그가 불쌍했다.
한편으로는 선풍도골 노인의 무력이 궁금했다. 대체 얼마나 강하기에 마련 마검류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였던 반검이 저렇게 꼼짝도 못하는 걸까. 어쩌면 선풍도골 노인은 괴선이나 광객을 능가하는 초고수일지도 몰랐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느냐?”
선풍도골 노인의 질문에 나는 검총에 오기 전부터 준비해두었던 답을 내놓았다.
“저는 검사이지만 동시에 도객이기도 합니다.”
노인들이 웅성거렸다.
“저는 검과 도를 통합해 저만의 무학을 이루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칼을 부릴 수는 없습니다. 저는 신성한 검의 무덤을 더럽히고 싶지 않습니다.”
선풍도골 노인이 속을 헤아리기 힘든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약간 불안했지만 나는 그가 긍정적인 답을 주리라 예상했다.
입총의 자격을 얻고도 검총에 들지 않은 이들은 극히 드물었지만 아주 없지는 않았다.
진소월이 알려준 바에 따르면 이백사십 년 검총의 역사에서 그런 선택을 한 검호들이 세 명 있었다. 처음은 백오십 년 전의 자하검(紫霞劍) 서무상(徐武上)이었고 그 다음은 칠십 년 전의 일대검호 태청검(太淸劍)이었다. 마지막 한 명은 그 유명한 무왕 견사휘였다.
이유는 달랐지만 그들 셋은 검증을 통과하고도 입총하지 않고 강호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검총은 그들의 행위를 묵과했다. 괘씸죄를 묻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전례가 나에게도 적용되기를 바랐다.
선풍도골 노인이 물었다.
“네 도의 경지가 어느 정도이더냐? 검과 비슷하더냐?”
내 대답이 노인들을 놀라게 했다.
“현재까지는 도법이 검공보다 낫습니다.”
나는 선풍도골 노인이 도법을 시현해보라고 요구할까봐 걱정스러웠다.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운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는 그냥 넘어갔다.
“훗날 네가 목표한 바를 이루면 견식할 기회를 주겠느냐?”
“물론입니다, 어르신. 꼭 보여드리겠습니다.”
“내가 이승에 머물 날이 길지 않을 터이니 가급적 빨리 달성하면 좋겠구나.”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약속드립니다.”
선풍도골 노인이 미소를 지었다. 인자한 미소였다.
“기다리마.”
선풍도골 노인이 좌우를 둘러보았다.
“가세나.”
그가 몸을 돌려 수림으로 날아가자 다른 노인들도 나를 일별하고는 그를 쫓았다. 뱀눈은 나를 노려보더니 마지막에 장내를 떠났다.
그대로 주저앉아 엉망이 된 내부를 정돈하고 싶었지만 나는 억지로 걸음을 옮겼다.
운공은 보다 편하고 안전한 장소에서 들어야 했다. 오다가 적당한 곳을 봐두었으니 그리로 갈 참이었다.
걸어가면서 나는 검황자를 생각했다. 승부수가 통한 덕분에 승리했지만 영 뒤끝이 개운치 않았다.
나는 옥소만 꺼내들면 그를 능히 압도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내가 전력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 역시 진신무력을 다 드러내지는 않지 않았을까.
승부수를 날렸을 때 나는 희열감과 전율을 동시에 느꼈다. 전자는 최초로 시도한 뇌전중중의 신형이 구현되었음을 직감해서였고 후자는 공간을 격하고 날아간 내 탄강이 검황자에게 적중되기 직전 그가 강력한 반격을 해오리라 예감해서였다.
예감은 빗나갔다. 하지만 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검황자는 반격을 하지 못한 걸까, 아니면 하지 않은 걸까.
거듭 그 순간의 장면을 복기했지만 나로서는 판단불능이었다. 결국 그에게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나는 멈춰 섰다.
고개를 돌리자 나에게로 날아오는 검은 인영이 보였다. 흑의인은 내 삼 장 전면에 내려앉았다. 예상대로 뱀눈이었다.
“아직도 여기서 얼쩡거리다니, 겁 대가리를 상실했구나?”
“…….”
뱀눈은 검을 빼들었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기도 본총의 영역임을 몰랐더냐? 네놈은 입총의 의사가 없으니 무단침입자일 터. 이곳이 왜 천하제일금역으로 불리는지 알려주마.”
나는 철봉과 옥소를 양손에 쥐었다. 뱀눈의 동공에 짙은 당혹감이 어렸다. 내가 느물거렸다.
“왜? 갑자기 쫄려? 덤벼봐, 늙은이. 칼 맛을 보여줄게.”
허장성세가 아니었다. 나는 뱀눈이 올 것에 대비하고 있었다. 검황자와의 일전에서 원력의 최대치를 끌어내지 않았기에 십 초가량은 전력을 쏟아낼 수 있을 터였다. 그 다음엔 무방비상태로 전락하겠지만 뱀눈 말고 나를 위해하려 나올 노인은 없으리라 보았기에 나는 여기서 결판을 짓기로 했다.
문제는 십 초 이내에 뱀눈을 끝장낼 수 있을지 여부였다.
엄밀히 따지자면 가능성은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 뱀눈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검총에 들기 전 그는 이미 초절정 중(中)의 무위로 평가받던 강자였다. 팔 년 간 수련에 매진했을 터이니 적어도 한 단계는 상승했을 거라 보아야 했다. 초절정 중상(中上)이라면 원력의 최대치를 쓰지 않는 한 초전박살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나는 승산을 높게 잡았다. 객관적인 전력과 무관한 이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뱀눈의 심리였다.
그는 내가 검황자와의 비무에서 상당한 내상을 입었으리라 확신했을 터였다. 그리고 내가 경공을 전개하지 않고 걸어서 장내를 벗어난 것이 그 확신을 강화시켰을 터였다. 그러나 내가 원력을 발해 철봉과 옥소에 원기를 두르자 그 확신이 흔들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눈엔 원기가 강기로 보일 터였다.
뱀눈은 또한 아까 도법의 경지가 검공보다 위라는 내 말을 의식하고 있음에 분명했다. 그 말의 진위는 실전을 통해 확인해야 할 터인데 그러려면 그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이는 그가 예상했던 것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었다.
뱀눈의 동요를 인지한 나는 승리를 낙관했다.
아버지는 방심이 가장 큰 적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보다 더 위험한 심상을 알고 있었다. 두려움이었다. 겁을 먹은 호랑이는 들개한테도 쫓기는 법이었다. 하물며 뱀눈은 호랑이가 아니었고 나도 들개가 아니었다.
필승의 자신감을 온 몸으로 발산하며 나는 뱀눈을 압박했다.
“안 와, 늙은이? 그럼 내가 가지.”
철봉으로 뇌전을 쏘아내며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뱀눈은 황급히 뇌전들을 쳐내었다. 그리고는 옥소가 펼친 천라도망이 그를 덮치기 전에 등을 돌려 달아났다. 내가 바랐던 가장 바람직한 그림이었다. 뱀눈을 처치해봤자 내게 무슨 득이 있겠는가. 이왕이면 내 몸을 상하지 않고 사태를 해결하는 게 최선이었다.
뱀눈을 쫓아냈지만 나는 풀밭을 떠날 수가 없었다.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원력을 일으킨 후유증 때문이 아니었다. 나를 묶은 것은 허공에서 떨어져 내린 길쭉한 그림자였다.
그림자의 실체는 기괴한 체형의 노인이었다. 노인은 컸다. 칠 척에 육박하는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팔 척의 장신이었지만 노인은 골격이 우람한 나와는 달리 삐쩍 마른 체구였다. 마치 꼬챙이 같았다. 바람만 불어도 툭 꺾일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천하의 어떤 태풍도 노인을 쓰러뜨리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노인이 만검(萬劍)의 제왕이기 때문이었다.
“전충이 검왕(劍王) 어르신을 뵙습니다.”
포권을 취한 나는 허리도 접었다. 엎드릴까도 생각해보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응답이 없기에 고개를 들었다. 검왕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는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내가 본 것은 인간의 눈이 아니었다. 그것은 태산이었고 망망대해였고 무저갱이었다. 나로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크기와 넓이와 깊이를 가진 신인(神人)의 눈이었다.
* * *
검왕은 삼십 년 전 천하제일인의 권좌를 두고 다투던 혼세십삼군(混世十三君)의 일인이었다. 그들 중 생존하여 왕으로 승격한 네 무존 가운데 한 명이기도 했다. 십왕 중에서도 상위권에 위치한다고 추정되는 절대검호지만 기실 그가 공개적으로 무위를 현시한 것은 단 두 번뿐이었다.
첫 번째는 삼십삼 년 전 사파제일검(邪派第一劍)으로 불렸던 수라검군(修羅劍君)을 상대로 한 일전에서였다. 검총에 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천하제일검임을 증명하기 위해 상백산을 찾았던 수라검군은 그곳에서 가장 강한 검치(劍痴)를 일백 초 이내에 꺾어보겠다며 거드름을 피웠다. 그때 나선 이가 검왕이었다.
존재감도 없던 초로의 장신 검사가 발검하자 수라검군은 갑자기 달라진 그의 기세에 주눅이 들어서는 대결을 취소하고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그는 줄행랑을 치지 못했다. 검을 뽑은 이상 승부가 불가피하다는 장신 검사의 의지표명 때문이었다. 보다 정확히는 자신의 검을 받으면 팔로 그치겠지만 도망치면 목을 치겠다는 장신 검사의 으름장에 굴복한 것이었다.
그날 수라검군은 오른팔을 잃었다. 그리고 그를 외팔이로 만든 장신 검사에게는 단비검군(斷臂劍君)이라는 별호가 붙었다. 수라검군이 혼세십이군 바로 밑의 강자로 분류되었기에 단비검군은 자연스레 그 숫자를 한 자리 늘리며 무림 최강자군의 일원이 되었다.
검왕의 두 번째 공개비무는 그로부터 십팔 년 후에 있었다. 그러니까 십오 년 전이었다. 당시 사상 최초로 비(非) 오대세가 출신으로서 정맹의 맹주로 추대되며 무왕(武王)에 등극했던 전(前) 십전무객 견사휘가 그의 상대였다.
검총의 전통을 존중하여 검으로 단비검군에게 도전한 무왕은 불과 팔십여 초 만에 열세를 인정하고는 물러섰다. 그의 인생 최초의 패배였다.
패배에도 불구하고 단비검군에게서 입총의 자격을 부여받았으나 무왕은 상백산에 들지 않고 정맹으로 복귀했다. 무왕에게 승리를 거둔 팔비검군은 검왕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획득했다.
* * *
진소월에게 들었던 검왕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며 나는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무기력함에 젖었다. 길고 짧은 건 대보아야 안다지만 그럴 필요가 없는 경우도 존재했다. 지금이 그랬다.
한마디로 대적불가였다. 괴선과 광객이 속한 중원육기가 무력 서열 상 천하십왕의 바로 아래에 자리한다지만 차원이 달랐다. 그 두 노인이 높은 봉우리라면 검왕은 숫제 하늘이었다. 검왕은 압기만으로도 나를 짓이길 수 있는 절대자였다.
절망과 무기력함의 반대편에서 강렬한 반발심이 솟구쳤다.
‘나를 찌그러뜨려 보시지. 기왕 손을 쓴 김에 제대로 마무리하는 게 좋을 거요. 이 기회를 놓치면 다음엔 내가 당신의 생사처분권을 행사할 테니까.’
내 눈에 서린 독기를 인지했는지 검왕의 눈빛에 기광이 번득였다. 그러더니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옭아맸던 기운을 거두었다. 전신을 옥죄던 백만 근의 압력이 사라지자 나는 휘청거렸다. 하지만 무릎을 꿇지 않고 버텨냈다.
냉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검왕이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