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31
제230화 들어줄 거요, 말 거요?
마치 연인을 대하듯 그윽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도후가 말했다.
“일찍 왔군요. 소식이 가는 데만 닷새는 걸린다고 하더니.”
나는 군더더기를 생략하고 본론으로 직행했다.
“궁극에 이르렀소?”
“그래요. 순전히 직감이긴 하지만 십 년, 아니 백 년을 더 수련해도 이 이상은 오르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 적어도 내겐 궁극인 거죠.”
“축하하오.”
도후의 입술에 미소가 걸렸다.
“고마워요. 시작도 완성도 모두 당신 덕분이에요. 그날 당신이 돌아올 날을 기약하지 않고 떠났을 때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더라고요. 다시는 당신을 보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었어요. 견딜 수 없을 만큼 조바심이 나서 당신을 쫓아가려 했어요. 하지만 당신은 벌써 사라지고 없더군요. 원체 빠르잖아요. 그래서 이리로 돌아와 진종일 멍하니 앉아있었어요. 당신을 생각하면서. 당신의 놀라운 몸놀림을 생각하면서. 그러다 갑자기 당신을 잡을 길이 보였어요. 당신이 어떤 재주를 부리더라도 단번에 가를 수 있는 칼이. 부지불식간에 칼을 부린 순간, 알았어요. 내가 궁극에 닿았음을.”
“…….”
“보여줄까요?”
“지금 싸우잔 말이오?”
“안 될 것 없죠. 하지만 그 전에 먼저 그이를 데려오는 게 좋겠어요. 이건 그이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하니까.”
“사부는 어디 가셨소?”
“그날 내 칼을 보고는 생각할 게 있다며 처소에 데려다 달라고 하더군요. 당신에게 편지를 써야 했기에 겸사겸사 그리로 갔어요. 그러고서 그이는 여태 이리로 돌아오지 않았어요.”
“…….”
“우리의 승부 전에 내 칼을 먼저 보여줄 게요. 실망하진 않을…….”
“됐소. 정식으로 붙을 때 보겠소.”
도후가 찬탄했다.
“아! 역시! 이러니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지요.”
헛웃음이 났다. 그녀는 나를 몰랐다. 내 심상이 온전한 상태였다면 사전 견식을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그러면 그이를 데려와요. 아니, 지금 말고 해가 뜬 후에 하는 게 좋겠어요. 달빛이 밝지만 아무래도 그이가 내 선물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햇빛이 필요해요.”
나는 도후의 제의에 응하기로 했다.
“알겠소. 날이 밝는 대로 사부를 모시고 다시 오겠소.”
도후가 몸을 돌리는 나를 잡았다.
“정말 올 거죠?”
나는 고개만 돌려 그녀를 보았다. 내 묵묵부답의 의미를 헤아린 도후가 변명을 늘어놓았다.
“당신이 선물을 받기 싫어 나 몰래 떠날까봐 염려하는 게 아니에요. 뭔가 이상해서 그래요. 지금 당신은……, 이런 말을 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마치 빈 껍데기 같아요. 무슨 일이 있나요?”
도후의 시선을 회피하며 나는 동문서답했다.
“내일 오겠소.”
* * *
도후와의 짧은 만남을 끝내고 명교로 돌아가는데 들판 가장자리의 담장에 군중이 새카맣게 몰려와있었다. 소면통달이 그들 전체의 심사를 대변했다.
“다행히 아직 겨루지 않았구려. 혹시 우리가 두 용봉의 대결을 관전해도 되겠소?”
모두들 숨을 죽였다. 나는 그들의 원하는 답을 주었다.
“내일 일출 무렵에 싸우기로 했습니다. 그때 오십시오.”
누군가 환성을 질렀다. 그러더니 곧 열광적인 환호성이 땅과 하늘을 울렸다. 수백 명이 입을 모아 관전을 허락한 내 관대함을 칭송하며 무조건적인 승리를 예단했다.
특히 정파 무인들의 아부가 두드러졌다. 그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결과가 동귀어진임을 알고 있기에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원이 실현될 확률은 구 할 구 푼에 달했다. 그리 되면 천하는 그들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었다.
나는 중인 중에 검황자를 찾았다. 기실 찾지 않아도 금방 눈에 들어왔다.
“이따가 좀 보자. 반 시진쯤 후에 구세원으로 와라.”
다른 이들에겐 금족령을 내렸다.
“대결을 앞두고 휴식을 취할 참이니 아무도 방해하지 말길 바라오.”
바로 반발이 나왔다. 기실 그럴 수 있는 이는 한 명밖에 없었다.
“나도 말이냐, 이놈아?”
“노인장은 원래 거기 살잖소?”
본격적으로 입씨름을 벌이려는 괴선의 의도를 간파한 나는 반문과 동시에 구세원으로 몸을 날렸다. 당황한 괴선이 날린 욕설이 나를 쫓아왔다.
“어럽쇼, 저놈이 또! 이 거지발싸개 같은 놈, 거기 안 서!”
* * *
내가 올 것을 알고 미리 의원들을 물린 듯 방엔 무왕밖에 없었다.
“다녀왔습니다, 사부.”
침상으로 다가서며 무왕에게 인사하다 흠칫했다. 그의 얼굴이 가물의 논처럼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 해골을 방불케 했던 검왕을 보는 듯했다. 나는 그가 지난 며칠 간 잠을 이루지 못했음을 알았다. 아마 식음도 전폐했을 터였다. 도후의 칼에 대처할 비법을 찾아내기 위해. 가슴이 뭉클했다.
“진전이 있었더냐?”
포괄적인 질문이었으나 나는 정확히 무엇을 묻는지 알아차렸다. 그래서 되물었다.
“사부는 어떠셨습니까?”
“……미안하구나.”
뜬금없는 사과였으나 답변이 되고도 남았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절망으로 물들어있던 눈에 희망의 빛을 번득이더니 무왕이 소리쳤다.
“결실이 있었구나!”
민망했다.
“아닙니다, 사부.”
“허면 어째서…….”
‘나를 기만한 게냐?’라는 뒷말을 입 속에 가두었지만 무왕은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나는 쓰게 웃었다. 멋대로 넘겨짚었다가 틀린 건 내 잘못이 아니지 않은가.
나는 화제를 전환했다.
“방금 그녀를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내일 동이 트면 다시 보기로 했습니다. 사부가 자기 선물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도록 그때 싸우자고 하더군요.”
“이미 감상했다.”
“어떻던가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그저 엄청나다고 할 밖에는. 전날 네 순간이동을 처음 목도했을 때보다 더 소름이 돋더구나. 그건, 뭐랄까, 의즉참(意卽斬)의 경지를 구현한 느낌이었다. 요 며칠 간 그 칼을 피할 방도를 미친 듯이 궁리했으나 끝내 답을 얻지 못했다.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말끝을 흐린 무왕이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네 신법에 향상이 없었다면 필패를 면치 못할 터. 대결을 미루려무나. 그녀도 이해할 게다. 너도 그녀가 대업을 성취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더냐?”
“죄송하오나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사부.”
“아무리 실전에 강미를 발한다고 하나 그걸로 상쇄할 수 있는 차이가 아니다. 그녀의 칼은 네가 수순을 비틀 여지조차 주지 않을 게다.”
“…….”
“정 고집을 부릴 양이면, 전날 빙후와의 일전에서 행했다던 전술을 쓰려무나. 그런다고 승산이 있을 성싶지는 않으나 그나마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유일한…….”
나는 무왕에게 무의미한 수고를 끼치고 싶지 않아 결례를 무릅쓰고 말을 잘랐다.
“이미 마음을 정했습니다, 사부. 그녀와 정면승부를 하기로.”
나를 노려보듯 응시하던 무왕이 눈을 감았다. 더 할 말이 없으니 나가라는 의사표시였다. 나는 그의 명에 응하기 전에 속에 담긴 얘기를 꺼냈다.
“만에 하나라도 제가 그녀의 칼에 당하면 출중한 무재를 갖춘 기재를 찾아 광휘무맥(光輝武脈)을 이어주십시오, 사부.”
무왕이 눈을 떴다.
“광휘무맥이라니, 무슨 말이냐?”
“제가 사부와 제 선친의 함자에서 하나씩 따와서 작명했습니다. 원래는 사부를 앞세워 휘광이라 해야 할 터이나 아무래도 어감이 광휘 쪽이 나은 것 같아 그렇게 정했습니다. 하지만 마땅치 않으시면…….”
“그런 얘기가 아니지 않으냐?”
“사부가 일구시고 제 아버지를 거쳐 제가 결실을 거둔 무학이 제 죽음과 함께 사장되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태반이 말로는 전할 수 없는 절기들이나 기본무공으로라도 초석을 깔아주면 그를 바탕삼아 자기만의 성을 구축할 인재가 분명 있을 겁니다. 사부나 저만큼은 아닐지라도…….”
“그만. 그건 내가 아니라 네가 해야 할 일이 아니더냐? 못 들은 걸로 하겠다.”
“그러지 마시고…….”
“그만하라니까. 더 듣지 않겠다.”
나는 순순히 물러섰다.
“알겠습니다, 사부. 내일 아침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포권을 하고 고개를 숙이며 무왕에게 예를 차린 나는 의실을 나왔다. 일언지하에 거절했으나 그가 내 청을 들어주리라 확신하면서.
* * *
기다란 복도를 지나 입구로 향하는데 괴선이 헐레벌떡 달려 들어왔다. 그러고는 내가 또 달아날 새라 내 소매를 붙잡았다.
“이거 놓으쇼.”
“누구 맘대로, 이놈아. 또 어딜 내빼려고?”
“알아서 뭐 하시게?”
“이놈이 오늘 따라 유독 더 삐딱하네. 내일의 결전 때문에 긴장해서 그런 게냐? 개구리 코딱지만큼도 어울리지 않으니 너답게 굴어라, 이놈아. 그나저나 아이를 안고서 학살을 일으키고 다닌다는 복면괴인은 잡았느냐?”
지금쯤이면 비상사태의 내용이 전해졌을 테고 괴선은 내 배려로 특급정보를 아무 때고 얻을 수 있으니 그가 ‘복면괴인’에 대해 아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침울함에 잠기자 답을 재촉하려던 괴선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내 분위기가 평소와 다름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대체 왜 그러느냐? 아까부터 도무지 네놈 같지가 않다. 설마 정말로 도후와의 일전을 앞두고 간이 졸아들어서 그런 건 아닐 테고, 남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더냐?”
“…….”
“어서 말해 보거라. 우리 사이에 못할 말이 어디 있느냐?”
평소와 달리 진지한 낯빛을 한 괴선을 내려다보다 충동적으로 말했다.
“그녀가 죽었소.”
“그녀? 그녀가 누군데?”
내게서 답을 듣기도 전에 괴선이 눈을 부릅떴다.
“그 아리따운 아이 말이냐? 어쩌다가?”
“…….”
나는 침묵했다. 진소월의 죽음에 얽힌 내막을 밝히기 싫어 입을 다문 게 아니었다. 입을 열면 통곡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였다.
별안간 괴선이 내 등짝을 세게 두드렸다.
“뭔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정신 차려라, 이놈아. 만만치 않은 강적과의 결투가 코앞이잖으냐? 도후에게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죽은 아이에게 한 눈을 팔면 어쩌자는 게냐? 그러다 도후의 칼에 맞아 뒈지기라도 하면 그 아이가 행여나 저승에 잘 따라왔다고 반기겠다, 이놈아.”
“이런, 제길. 그걸 위로랍시고 하는 거요?”
“위로는 무슨. 네놈이 위로 받을 게 무어야. 다 가져놓고. 그 아이도 마찬가지다. 좀 일찍 가긴 했지만 네놈을 만나 이리 지지고 저리 볶으며 나름 행복을 누렸으니 여한이 없을 게다. 그러니 초야에 서방을 복상사시킨 여편네마냥 궁상떨지 말고 기꺼이 보내 주거라.”
“아무 것도 모르면서 되는 대로 지껄이지 마쇼.”
“모르긴 뭘 몰라, 이놈아. 사람의 생사는 하늘에 달려있느니라. 네놈이 제아무리 무림의 황제라도 만사와 생사를 주관하는 하늘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음이야. 그냥 받아들이고…….”
“됐소. 어디서 되도 않는 개소리를. 받아들이건 말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노인장은 남의 일에 신경 끄쇼.”
화를 내야 할 대목이었으나 괴선이 느닷없이 파안대소했다.
“카카캇, 이제야 네놈으로 돌아왔구나. 네놈은 역시 막돼먹게 굴어야 제 맛이야.”
이상하게도 괴선과 말을 섞는 동안 나는 큰 위안을 받았다.
헤죽거리던 괴선이 정색했다.
“그거 아느냐? 언젠가부터 네놈 면상에서 웃음기가 사라진 걸. 어찌어찌 하다 본의 아니게 수많은 이들의 운명을 걸머지는 바람에 나름 고충이 상당했을 터이나 이제 네 본 모습으로 돌아와도 괜찮을 성싶다. 부담이 없어졌잖으냐? 막말로 네가 내일 도후의 칼에 횡액을 당하더라도 천하의 안녕엔 아무 지장이 없을 테니 말이다. 겪어보니 그 여자는 살성과는 거리가 먼 부류더구나. 그렇더라도 만약 염왕전에 갈 요량이걸랑 가급적 그녀도 데려가거라. 잔챙이들만 남았다고는 하나 사마 무림과 해왕도의 떨거지들이 그녀를 등에 업고 설치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제길, 그게 나한테 할 소리요?”
“못할 건 무어냐, 이놈아. 이왕 죽을 거면 세상을 위해 후환을 끌어안고 가라는 건데. 자고로 끝이 아름다워야…….”
“아, 됐소. 노망기 든 노인네의 헛소리에 장단을 맞춰준 내가 잘못이지.”
나는 괴선이 반격하기 전에 말을 이었다.
“만일 내일 내가 노인네가 쏟아낸 재수 없는 소리 때문에 황천길로 가게 된다면, 한 가지 보상을 해 주쇼.”
“보상이라니? 그보다 왜 도루묵이 된 게냐. 해가 서쪽에서 뜬대도 그 여자에게 지는 일은 없다고 큰소리를 쳐야 네놈다운…….”
“아, 됐고, 들어줄 거요, 말 거요?”
괴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내가 진심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있음을 인지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