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35
제234화 아무 염려 마십시오
성모…….
내가 금세 이변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은 석굴에 들어서기 전부터 기감을 끌어올려 안쪽을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종유석이 주렁주렁 매달린 정면의 동굴 너머엔 그녀가 들어있을 터였다. 석굴 입구에서의 거리가 고작 이십여 장에 불과했기에 집중만 하면 코앞에서 보듯 그녀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녀가 귀식대법을 익혀 호흡을 가두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녀의 기척을 우선적으로 탐지하려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지난번의 불편했던 작별을 의식했던지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대두노인이 환영의 인사말을 꺼내기 전에 물었다.
“성모께 무슨 일이 있습니까?”
대두노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어떻게 아셨소?”
“뭘 말입니까?”
“성모에게 일이 생긴 걸 말이오.”
“…….”
“실은 오늘 아침에 귀천하셨소.”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철퇴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천랑성을 찾은 제일목적은 전갈독수를 취하기 위함이었지만 성모와의 면담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용무였다. 나는 그녀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혹시 일부러 거짓말을 했느냐고. 아니면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 경우냐고.
성모의 예언은 절반만 맞았다. 특히 두 번째 예언은 완전히 빗나갔다. 나는 두 동강 나지도 않았을뿐더러 그녀가 일러준 절단부위도 정 반대였다. 도후의 칼이 통했다면 내 몸은 수직으로 쪼개졌을 터였다. 하지만 성모는 내가 허리를 횡으로 잘리는 광경을 보았다고 했다. 네 번이나 확인했으니 틀림없었다.
너무 끔찍하다며 설명을 꺼려하는 성모에게 그 장면에 대한 묘사를 재삼재사 요구했던 까닭은 내게 자학적 악취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나름의 대비를 위해서였다. 결정적인 순간 그 부위의 양단만 조심하면 참사를 모면할 수 있으리라는 심산에서였다. 그래놓고는 진소월의 죽음으로 인한 심상으로 까맣게 잊고 있다가 도후와의 결전 직후 퍼뜩 생각난 것이었다.
내가 충격을 받았음을 인지한 대두노인이 위로랍시고 지껄였다.
“너무 안타까워하지 않아도 되오, 무황. 성모는 천수를 누렸으니. 사실 그 이상이라고 해야 하오. 그분은 내가 코흘리개 아이였을 때도 할머니였다오. 물경 일백사십이 년을 살았으니 범인이라면 꿈도 못 꿀 장수가 아닐 수 없소.”
그렇게나 나이가 많았단 말인가. 첫 만남에서 등을 곧게 펴고 가부좌를 틀고 있던 그녀의 모습이 기억에 선연했다.
“성모께서 따로 남기신 말씀은 없습니까?”
대두노인이 탄성을 터뜨렸다.
“하아, 역시! 특별한 이들끼리는 통하는 바가 있구려. 그분은 눈을 감으시기 직전까지도 정신이 온전하셨소. 나를 부르셔서는 여러 당부를 하십디다. 물론 무황에게 전해달라는 말씀도 있었소.”
대두노인은 바로 성모의 전언을 알리지 않고 자리를 옮기려들었다.
“여기서 얘기하기엔 적절치 않은듯하니 성소로 가는 게 어떻겠소?”
나는 대두노인의 청에 응했다. 성모의 전언이 은밀한 내용이라면 여러 사람이 듣는 데서 나눌 이유가 없었다.
* * *
온통 금으로 치장된 방에 들어서자마자 대두노인이 사과부터 했다.
“우선 전날 무황에게 퉁명스럽게 굴었던 처신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싶소. 정말 미안하오.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구려. 성모의 예지몽이 실현되리라 철석같이 믿고는 정신이 나가 망발을 떨었던 모양이오. 하지만 무황에게 결례를 범할 의도는 추호도 없었소. 그럴 리가 있겠소. 본성과 이 땅의 은인인데. 그저 무황의 변사 이후가 너무 막막해…….”
나는 노인의 횡설수설을 중단시켰다.
“괜찮습니다. 이해합니다.”
긍정적인 반응임에도 내 목소리가 딱딱했던 탓인지 노인의 표정도 굳었다. 그러고는 미련이 남았는지 사족을 달았다.
“나는 성모의 예지몽이 틀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소. 여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으니. 하지만 틀려서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하오. 하늘에 맹세코 진심이오. 무황의 건재함은 곧 본성의…….”
노인이 말끝을 흐렸다. 내 눈빛에서 짜증을 읽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기어이 마지막 꼬리를 붙였다.
“어쨌거나 도후를 물리쳐 명실상부한 절대무황에 등극한 쾌거를 경하드리오.”
나는 짜증을 누르기 위해 엉뚱한 생각을 했다. 도후와의 일전은 엿새 전의 일이었으니 이전 같으면 천랑성에는 빨라야 보름 후에야 전해졌을 터였다. 그런데 대두노인이 그 소식을 접했다는 건 중원과 천랑성 사이의 신속 연락망이 구축되었다는 방증이었다. 아마도 정보가 오가는데 독곡, 아니 남천과 비슷하게 오륙일 정도 소요될 것이었다.
“고맙습니다. 이제 성모께서 남기셨다는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대두노인이 입술에 침을 바르며 장광설을 예고했다.
“여러 말씀을 주셨지만 무황에게 전해달라고 했던 것들부터 말해야겠구려. 네 가지였는데 첫째, 머지않아 천계와 인세의 경계가 허물어질 터이니 대혼란이 일어나리라 하셨고, 둘째,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분투하길 바란다고 하셨고, 셋째, 세월이 약이니 울상을 하고 다니기보다는 웃으라고 하시며 넷째,(이 대목에서 대두노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 생에는 당신이 무황과 연분을 맺길 기원한다고 하셨소이다. 다만 무황이 기남자로 태어날 경우에만 그러겠다는 조건을 다셨소. 마지막 말씀은 대충 이해가 가는데 앞의 세 개는 무슨 의미인지 도통 짐작이 가지 않는구려. 혹시 짚이는 바가 있소?”
난들 알겠는가.
“모르겠습니다.”
대두노인은 이 화제를 좀 더 잇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나는 바로 그의 바람을 차단했다.
“그밖에는 어떤 말씀을 남기셨습니까?”
대두노인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별것 아니었소. 내 말은 무황에겐 아무 의미가 없는 말씀이었다는 뜻이오. 이를 테면 당신을 돌봐준 이들에게 감사인사와 소정의 선물들을 전하라는 당부이거나 당신의 심기를 거슬렀던 자들을 일일이 거론하시며 너그러이 죄를 사한다는 말씀 따위였소. 그러다가도 돌연 도저히 봐 줄 수 없다며 씩씩대더이다. 그만 가야겠다고 하시기 전까지 무려 반 시진이나 그 얘기를 늘어놓으셨소.”
절로 쓴웃음이 났다. 괴팍한 할망구 같으니.
“아, 참! 마지막으로 이상한 말씀도 남기셨소.”
운을 떼고는 뒷말을 잇지 않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대두노인에게 나는 냉랭한 시선으로 응수했다. 하는 수 없이 대두노인이 내 질문을 기다리지 않고 성모의 마지막 유언을 밝혔다.
“다시는 성모로 환생하지 않을 거라고 합디다. 혹시 누가 자기라고 우기면 무조건 가짜이니 엄히 다스리라고 신신당부하셨소.”
나는 속으로 ‘잘했소, 오라!’라고 중얼거렸다.
내가 보기엔 바람직한 마무리였다. 미래를 미리 보는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그녀가 세월이 약이라고 했다지만 모르는 게 약인 경우도 많았다. 미래는 문자 그대로 아직 오지 않은 세상으로 남겨두어야 했다. 앞일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미리 안다면 의지나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차피 앞길에 놓인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을 터인데.
물론 해일이 덮쳐 올 것을 예견하고 대책을 세워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하는 등의 순기능도 상당했다. 그것마저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특정한 개인의 운명에 관한 한 천기누설은 금해져야 마땅했다. 제 운명을 아는 이는 난관을 뚫고자 하는 투지를 상실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전락할 뿐이었다.
성모가 없다면 더 머물 이유가 없었기에 나는 전갈독수를 받은 즉시 천랑성을 떠나기로 했다.
심부름꾼이 독수를 가져오기 전에 대두노인이 넌지시 물었다.
“혹시 많이 바쁘오?”
질문의 저의를 몰랐지만 왠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대두노인이 반색했다.
“그렇다면 온 김에 다시 한 번 우리 백성들에게 무황을 친견할 영광을 주시는 게 어떻겠소?”
나는 정색했다. 입장을 분명히 해두어야 했다. 지난 번 나흘에 걸쳐 서른두 개의 도시를 돌아다니며 서역 민중의 환대를 받았던 일은 썩 유쾌한 경험이었으나 되풀이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첫 번째는 망외의 즐거운 유람이었지만 두 번째는 재주넘는 곰 노릇이 될 터였다.
“앞으로는 마녀처럼 귀성이 감당하지 못할 적이 나타나는 경우에만 나를 부르십시오.”
내 거절을 예상하지 못했던지 대두노인이 만면에 당혹감을 드리웠다.
“아아. 그리 하리다. 부디 오해는 말길 바라오. 무황에게 수고를 끼치려고 그런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본성과의 우호를…….”
나는 노인의 말을 막았다.
“알고 있습니다. 내 목숨이 붙어있는 한 낭왕 어르신과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을 테니 아무 염려 마십시오.”
나는 그 이상은 바라지 말라는 뒷말은 입 안에 가두었다. 굳이 꺼내지 않아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터였다.
* * *
전갈독수 한 병을 건네받은 나는 대두노인이 마련한 식량과 식수가 든 궤를 지고서 천랑성을 떠났다. 그러고는 일천이백여 리를 날아 천벽에 이른 후 사막에 들어서서 짐을 부렸다. 그곳에서 무기한 수련에 들 작정이었다.
신령을 체화해 전신의 권능을 취득하는 데 성공하면 빙후는 나를 찾아 중원으로 내려올 터였다. 이미 나현에게 그녀가 도래할 시 사막으로 사람을 보내달라고 해두었기에 대엿새 후면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것이었다.
내가 중원으로 돌아가는 동안 빙후가 살겁을 일으킬 가능성은 전무에 가까웠다. 그러니 서두를 까닭이 없었다. 만약 내가 준비가 덜 되었다면 그녀는 기꺼이 기다려 줄 터였다. 그렇더라도 가급적 그녀의 출현에 맞춰 그녀의 상승에 상응하는 무력을 갖추고 싶었다.
수련은 순조롭지 않았다.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망상에 시달렸다. 순간이동을 연발하며 전력으로 절초들을 펼치고 있는 와중에도 진소월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름다웠던 옥용이 아니라 참혹하게 뭉개지고 곪았던 얼굴이.
결전이 끝난 직후 생기가 소멸되어가던 도후가 쏘아내던 눈빛도 나를 괴롭혔다.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는 눈빛……. 정당한 눈빛이었다.
실제로 도후를 상대로 심상대결을 할 때마다 나는 속절없이 패했다. 그녀의 칼은 매번 내 몸뚱이를 반으로 갈랐다. 아무리 용을 써도 그 무시무시한 칼을 빗겨내지 못했다. 그 칼의 맹점을 알았음에도 다시 싸운다면 결코 그날의 행운을 재현할 수 없을 터였다.
지지부진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나는 끈질기게 수련을 이어갔다. 그러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미친 듯이 수련하는 것 말고는 심마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낮밤을 잊고 몸을 혹사시키며 무리를 거듭하다 물과 벽곡단이 동이 나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한 달 치 분량이었으나 생존에 필요한 정도만 마시고 먹었으니 실제로는 두 배 이상의 시간이 흘렀을 터였다. 어쩌면 세 달 이상 지났을 지도 몰랐다. 사막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인지하기 어려웠지만 날씨가 꽤 선선해진 것으로 보아 가을이 왔을 공산이 컸다.
나는 천랑성으로 돌아갔다. 대두노인에게 확인해 보니 정말로 석 달하고도 스무날이나 지나 있었다. 중원의 산천은 붉은 단풍으로 물들어 있을 것이었다.
내 덕분에 중원과 서역이 전례 없는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다며 한바탕 찬사를 늘어놓고는 대두노인이 세 병의 전갈독수를 전해주었다. 빙후의 소식은 받은 게 없다고 했다. 식량과 식수가 든 궤에 독수 병들을 집어넣은 나는 다시 사막으로 향했다. 그리고 충격적인 사태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