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36
제235화 어서 대답해, 인마
나는 모험을 했다. 전갈독수를 연이어 들이켠 것이었다.
독후와의 일전은 벌써 아홉 달 전의 일이었다. 그녀가 일 년으로 정했던 시한이 석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일 년은 말 그대로 시한일 뿐 그때 재대결을 벌이기로 약조한 것은 아니었다. 빙후는 오늘 내일이라도 중원으로 내려와 나를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에서 그녀와 재회하고 싶었다. 아직 미진한 구석이 있으니 보완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요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설령 그날까지의 성취가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수준이라도 그녀와의 대결을 미루지 않을 참이었다. 그러나 되도록 최강의 무력으로 맞서기를 갈망했다. 나와의 설욕전을 위해 목숨을 건다고 했던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나와 같은 꿈을 품고 그 꿈을 실현하려 평생을 매진한 이에 대한 예의였다.
그래서 무리임을 알면서도 두 병을 잇달아 복용했다. 그리고 예견했던 극통에 열흘 가까이 몸부림치다 충격적인 사실을 알았다.
한계였다.
독왕의 내단에 깃든 원력은 아직도 삼분지일 이상 남아있었으나 나는 더 이상의 추출과 체화는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만약 여기서 더 욕심을 부리면 몸이 온전하지 못할 것이었다. 남은 한 병의 독수를 마저 마시면 혈맥들이 더 견디지 못하고 복구불능으로 파열될 게 틀림없었다.
독왕이 내단의 원력을 완전히 용해해 제 것으로 부리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처럼 그도 한계에 이르렀으리라.
비가 내릴 때 그릇을 놓아두면 그릇의 크기만큼 물이 담기는 법이었다. 한도를 넘으면 넘칠 수밖에 없었다. 그릇은 자기 크기를 넘어 들이차는 물을 내보내면 그만이지만 사람의 육신은 그렇지 못했다. 바람을 과도하게 불어넣은 풍등이 터지듯 극한에 다다른 순간 폭발할 공산이 매우 컸다.
고통 속에서 뒹굴며 나는 뜻밖의 발견에 당황하면서도 행운에 감사했다. 전갈독수 두 병은 기적적으로 한계를 딱 맞춘 양이었다. 두어 방울만 더 들어왔다면 이모의 치유력으로도 복원하기 어려운 내상을 입었을 터였다. 그랬으면 전투력도 필히 감소했으리라.
* * *
취하지 못한 원력이 아깝긴 했지만 내 무력은 크게 증가했다. 이번에 불어난 양을 합쳐 공력으로 치환하면 내 원력은 무려 일천 년에 육박했다. 십 갑자 전후의 내력을 자랑하던 십왕 중 누구도 내 평범한 일초를 감당할 수 없을 터였다.
회피할 방도가 없었던 도후의 ‘궁극의 칼’에도 간단하고도 확실한 대처법이 생겼다. 호신강기였다. 최대치의 원력으로 보호막을 두르면 그 무시무시한 칼을 튕겨낼 수 있을 성싶었다. 일도로 나를 절단 내지 못하면 그녀는 두 번째 기회를 가지지 못하고 내 반격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너무 안타까웠다. 지금 붙는다면 나는 그녀의 목숨을 빼앗지 않고도 승리를 취할 수 있었다.
나는 안주하지 않았다. 하루 반 시진가량의 운공으로 잠을 대체하고는 남은 모든 시간을 오롯이 수련과 궁구에 쏟아 부었다. 여전히 진소월이 수시로 나타나 심장을 녹이는 비감함을 선사했지만 꿋꿋하게 받아들였다. 세월이 약이 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어느 날 부지불식간에 행한 시도의 결과였다.
그날도 예고 없이 내 심상에 나타난 진소월의 비참한 모습에 괴로워하다 나는 여느 때와 달리 궁구를 중단하고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부탁을 저버린 나를 야멸차게 야단쳤다. 희한하게도 그녀의 꾸중을 듣는 동안 마음이 편안해졌다. 참혹하게 망가졌던 그녀의 얼굴도 점점 원래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진소월과의 심상대화에 기꺼이 시간을 할애하는 한편 나는 무학 자체의 심화와 향상에 박차를 가했다.
도후의 칼에 맞서면서는 원력에 의존하지 않고 철저하게 그녀의 공력에 맞췄다. 비슷한 내력을 사용할 시 그 칼을 빗겨낼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순간이동의 속도를 높이는 것뿐이었다.
현재 나는 소리를 뒤에 둘 수 있었다. 손가락을 튕기는 동시에 순간이동을 발하면 극미한 차이나마 소리를 앞지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속도를 두 배로 늘린다면 능히 무왕이 의즉참의 경지라고 평가했던 도후의 쾌도를 빗겨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증강된 원력을 총 동원해도 겨우 몇 치의 단축만 성공시켰을 뿐이었다. 나는 벽에 부닥친 게 아니라 순간이동의 궁극에 이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시달렸다.
광무신공도 유의미한 발전은 없었다. 원력이 불어난 만큼 위력도 증강되었으나 새로운 초식의 창안은 물론이고 기존 절기들의 진일보도 이뤄내지 못했다. 그저 더 능숙해졌고 다양한 변초들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었다.
몇 달이나 촌각의 낭비도 없이 피땀을 흘렸음에도 별다른 결실을 얻지 못한 나는 나 자신에게 휴식을 주기로 했다. 이대로 가다간 심신이 탈진을 넘어 소진될 것 같았다.
한동안 식음도 전폐한 채 멍하니 모래의 바다를 응시하던 나는 낮과 밤이 서너 번 바뀐 후 훌쩍 천공으로 날아올랐다. 휴식보다는 자극이 필요한 때라는 본능의 속삭임에 응한 것이었다.
* * *
천벽에 이른 나는 산줄기를 타고 올라갔다. 그러고는 사막의 외곽선을 따라 북동 방면으로 이동했다. 수천 리를 나아가자 대초원이 시야에 들어왔다. 두 시진에 걸쳐 무한히 펼쳐진 평원을 가로지른 나는 평북 무림의 북단에 위치한 유구에 당도했다.
유구 인근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북행했다. 빙궁으로 가는 내내 불안과 설렘이 공존했다. 정확한 날짜는 몰랐으나 사막을 떠날 때 벽곡단과 육포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십중팔구 이미 해가 바뀌었을 터였다. 그러고도 한 달은 지났을 것이었다. 빙후가 정한 일 년의 기한이 코앞에 닥쳤다는 뜻이었다.
나는 빙후가 ‘신의 힘’을 얻으려다 변을 당했을까봐 심히 염려스러웠다. 육신이 감당할 수준을 넘어 신령의 기운을 받아들이려 했다면 그녀는 내가 세 번째 전갈독수 병을 비웠을 때 일어났을 일을 겪지 않았을까. 산산조각 난 그녀의 동체가 생생하게 떠올라 난감하고 암담했다. 나는 그녀가 무사하기를 빌었다.
한편으로는 빙후가 ‘신의 힘’을 취득하는 데 성공했다면 얼마나 강해졌을지 자못 궁금했다. 그 경우 필승을 장담했으니 그녀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터였다. 막강해진 그녀와의 일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는 승패와 생사에 집착하지 않고 그저 내 생에 마지막이 될 승부를 즐기고자 했다. 그녀에게 지면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터이고 이긴다면 남은 생 내내 더 이상의 적수를 만나지 못할 것이었다.
나는 지난번처럼 신법을 이용해 장기전을 펼치지 않고 도후에게 그랬던 것처럼 빙후와 정면으로 격돌할 참이었다. 그녀의 허를 찌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녀와 나 자신에게 아쉬움이 남지 않을 일전을 선사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녀도 내 기대에 부응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는 역사에 길이 남을 최고의 명승부를 펼치게 될 터였다. 그러려면 그녀가 반드시 살아있어야 했다.
* * *
빙원 끝자락에 여인이 기른 손톱처럼 튀어나온 부위가 나타났다.
가속을 발해 거리를 좁히니 차츰 얼음 궁전의 윤곽이 잡혔다. 나는 눈을 찡그리며 안력을 최대한 돋우었다. 어딘가 이상했다. 빙궁은 거대한 원기둥을 세 개로 쪼개어 빙판 위에 올려놓은 모양새였다. 그런데 그 중 한 개가 허물어진 듯했다.
거리가 줄어듦에 따라 보다 자세한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침을 삼켰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기둥 중 하나는 완전히 무너져 있었고 나머지 두 개도 군데군데 깨져있었다.
나는 순간이동까지 섞어가며 쏜살같이 내달았다. 수백 장 너머의 빙궁이 성큼 다가섰다. 마침내 빙궁에 도달한 나는 간담이 떨렸다. 굳이 들어가 보지 않아도 참사가 일어났음을 알아차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일만여 명의 빙족을 품고 있어야 할 빙궁에서는 한 줌의 생기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나는 빙궁 중앙의 광장으로 하강했다. 바닥에 내려서기도 전에 참혹한 광경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깨진 빙벽마다 시신들이 널려있었다. 광장에도 수백 구의 주검이 여기저기 흩어져있었다. 무너진 빙벽 아래엔 수많은 이들이 깔려있을 터였다.
나는 망연자실했다. 근거를 대긴 어려우나 생존자가 한 명도 없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갑자기 내 입에서 중천에 뜬 해가 움찔할 만큼 커다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지광아! 지광아!”
막대한 원력을 실은 내 사자후에 간신히 형태를 지탱하고 있던 빙벽들이 몸서리를 치더니 급기야 붕괴하기 시작했다. 수백, 수천의 시신들이 얼음조각과 함께 쏟아져 내렸다. 나는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지광아! 어디 있냐? 어서 대답해, 인마!”
검황자는 끝내 내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충격을 추스르지 못했지만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시신들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빙족을 몰살시킨 이는 빙후가 아니었다. 그녀라면 마치 갈고리로 할퀴거나 철퇴로 내리친 것 같은 상처를 남기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정말로 빙후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가령 ‘신의 힘’을 얻는 대가로 정신을 내주었다면 그녀가 서역의 마녀처럼 가장 원시적인 방식으로 학살을 저질렀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빙벽 여기저기에 새겨진 파괴의 정도는 흉수의 힘이 최대치의 원력을 담은 내 광폭의 위력에 조금도 떨어지지 않음을 웅변했다. 내가 암울한 이유였다. 빙후 말고 누가 그런 흔적을 남길 수 있겠는가.
* * *
나는 가망 없는 수색을 지속했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해가 질 때까지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찾아내지 못했다. 빙족은 문자 그대로 전멸한 것이었다. 너무나 참람한 탓에 나는 그들의 명복을 빌 여력조차 없었다.
검황자의 유해라도 건지려고 얼음더미를 헤쳐 가며 폐허를 이 잡듯 뒤지다 다음날의 해가 떠오르자 결국 포기했다. 그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 그의 생존의 증거가 되기를 기도하면서.
중원으로 내려가려던 나는 방향을 반대로 돌려 북해로 날아갔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몰랐다. 아마도 빙후가 그리로 가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예감에 따른 행동이었을 듯싶었다.
북녘의 바다는 남방에서 보았던 바다보다 백배는 위압적이었다. 검게 일렁이는 물결은 마치 차가운 용암의 꿈틀거림 같았다. 절벽 위에 서서 망망대해를 응시하던 나는 무작정 몸을 날렸다. 검푸른 쇳덩이가 출렁이는 듯한 파도를 거슬러 나아가며 나는 연신 빙후를 불렀다.
“비인! 비인!”
빙후에게선 응답이 없었다. 육지가 아스라이 멀어졌지만 나는 몸을 돌이키지 않고 계속 전진했다. 그러고 한 식경쯤 지났을까. 일자로 뻗은 수평선 위에 점들이 나타났다. 나는 그리로 비행했다. 잠시 후 빙산들이 보였다. 대부분 큼직한 얼음덩어리에 불과했지만 일부는 진짜 산처럼 거대했다.
“비인! 비인! 비인!”
빙산들 사이를 하릴 없이 배회하며 목이 잠길 때까지 빙후를 소리쳐 호명하던 나는 어느 순간 경신을 멈췄다. 무언가 내 주의를 끌었다.
“비인? 비인이시죠? 어디에 계십니까?”
빙산 허리에 내려앉은 나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 간 기다리다 다시 빙후를 부르고는 또 기다렸다. 그러기를 여섯 차례 반복했을 때 드디어 호응이 왔다. 무슨 말인지 식별하기 어려웠고 극히 미약했으나 내 고막을 건드린 것은 분명 사람의 음성이었다.
초집중하고 있었기에 나는 음성의 진원지를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내가 섰던 빙산 반대편으로 돌아가니 지붕의 처마처럼 툭 튀어나온 얼음 아래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보였다. 가속을 발해 순식간에 인영에게로 이른 나는 일순 머릿속이 하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