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37
제236화 누가 이랬습니까?
빙후였다.
그러나 전에 보았던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노령임에도 탐스럽게 출렁거리던 금발은 푸석푸석한 백발이 되어버렸고 젊은 날의 미모를 고스란히 간직했던 얼굴도 물에 불은 손바닥처럼 쭈글쭈글해져 있었다.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으나 나는 목전의 노파가 ‘신의 힘’을 얻기 위해 북해로 떠났던 빙후임을 확신했다. 그녀가 아니라면 어째서 나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입모양으로 내 예전 별호인 전왕을 만들었겠는가.
나를 보았다고 했지만 빙후는 나를 보지 못했다. 안구가 파열된 탓이었다. 그녀는 내 기척을 알아차렸을 뿐이었다.
나는 멍하니 빙후를 내려다보았다. 외관의 변화보다 충격적인 것은 그녀의 상태였다. 목 아래만 보면 마치 나와의 결전에서 광참에 가슴이 갈리고 그 틈을 파고든 광폭에 상반신이 터져나갔던 도후 같았다.
빙후가 다시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나는 그녀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고는 감정을 최대한 억제하며 물었다.
“제 말이 들리십니까, 비인?”
빙후의 응답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내 질문을 알아들었음을 알았다. 혈색을 잃어버린 입술을 씰룩거렸기 때문이었다.
난감했다. 이래서는 대화가 불가능했다. 더 큰 문제는 빙후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는 점이었다. 기실 그녀의 명줄이 붙어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부상의 정도와 범위로 보아 분명 심장까지 상했을 텐데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혼란스러웠다.
빙후는 자해한 게 아니었다. 그녀의 상처는 누군가 그녀에게 남긴 것이었다. 십중팔구 빙궁의 학살을 자행한 자일 터였다.
나는 잠시나마 빙후를 흉수로 의심했던 것을 마음속으로 사과했다. 그녀 또한 피해자였을 뿐이었다.
어느 쪽이 먼저였을까. 선후를 가늠하기 어려웠으나 나는 흉수가 먼저 빙후에게 해를 가한 후 빙궁으로 가서 만행을 저질렀으리라 추정했다. 빙궁에 남은 참상의 방향은 그가 북해가 있는 북동방면으로부터 도래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대체 어떤 자일까. 빙족과 무슨 원한이 있기에 그토록 잔혹한 행사를 일삼았을까. 그들을 몰살시켰으면서도 빙후는 왜 살려두었을까.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나는 무엇보다 빙후 주변이 멀쩡해서 의아했다. 어디에도 전투의 흔적은 없었다. 물론 바다 위에서 일전을 치렀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경우라면 빙후가 중상을 안고 빙산까지 헤엄쳐 와서는 이곳까지 기어 올라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니 흉수가 그녀를 여기에 데려다놓았다는 뜻인데 도무지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어쩌면 빙후는 이 자리에서 기습을 당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가능성 역시 극히 희박했다. 빙후 같은 절대고수가 외인이 지척에 이르도록 인지하지 못하고 암습을 허용했으리라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설령 운공 중이었다고 해도 그녀는 반사적으로 반격을 했을 터였다.
더욱이 빙후의 외상은 일격에 의한 부상이 아니었다. 최소한 두 차례의 타격이 그녀의 가슴에 가해졌음에 틀림없었다.
최초의 공격에서 숨통을 끊어놓지 못했다면 흉수는 필히 빙후가 발한 장공에 직면했으리라. 그자가 장공을 쳐냈든 빗겨냈든 빙산 어딘가에는 자국이 남았을 것이었다. 빙후의 빙공은 공간을 우그러뜨리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흉수가 공중에 있어 빙공이 허공을 갈랐더라도 그녀가 누워있는 곳 바로 위의 얼음지붕은 깨졌어야 했다.
대관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 *
속절없이 빙후를 내려다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답 없는 추리놀음에 빠져있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숨이 넘어가는 사람처럼 그녀가 크게 숨을 들이켰기 때문이었다.
천만다행히도 빙후는 그길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대신 목소리를 토해내었다.
“전왕.”
내 옛 별호가 이토록 반갑고 눈물겹게 들린 적은 없었다.
“네, 비인, 접니다.”
“내 꼴이 추하지요?”
“아닙니다.”
“거짓말.”
“…….”
“염왕에게 가기 전에 전왕을 보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지만 한편으로는 절대로 오지 않기를 바랐는데 결국 이렇게 됐군요.”
나는 답답하고 초조했다. 한가한 소리나 늘어놓을 때가 아니지 않은가. 빙후의 회복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나와의 대화를 위해 마지막 생기를 쥐어짰을 터였다. 회광반조가 반의반각도 지속하지 못하고 끝난대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중요한 얘기부터 나누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나는 빙후에게 주도권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진소월이 그랬듯 마지막 말들은 사멸하는 이들의 몫이었다.
돌연 숨을 헐떡거리며 내 간을 졸아붙게 만든 빙후가 뜻밖의 청을 했다.
“눈을 감아 줄래요.”
“…….”
“감았나요?”
“……네, 비인.”
“고마워요. 이제 지금의 내 꼴은 잊고 전날의 모습을 떠올려줘요. 그럴 수 있죠?”
“……네.”
“좋아요. 지금 전왕과 만나는 여자는 그날의 나예요. 알았죠?”
“……알겠습니다.”
빙후의 입에서 안도의 의미를 담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러고는 뒷말을 내보내지 않아 실눈을 뜨고 그녀를 보았다. 주름투성이 얼굴에 평온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더럭 겁이 났다. 그녀는 혹시 이대로 만족하고는 떠나려는 게 아닐까. 조바심이 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누가 이랬습니까, 비인?”
빙후는 동문서답했다.
“미안해요, 전왕.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는데. 최선을 다했지만 욕심이었나 봐요.”
내가 다시 흉수에 대해 묻기 전에 빙후가 말을 이었다.
“일 년의 시한을 정한 건 실착이었어요. 자승자박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 정도의 각오가 없었다면 도전을 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테니 나로서는 불가피한 공언이었어요. 신령을 취하려면……, 아! 혹시 내 손녀딸에게 신령에 얽힌 전설을 들었나요?”
“들었습니다.”
“다행이네요. 금쪽같은 시간을 아낄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런데 벌써 일 년이 지났나요? 아직 두 달은 남았을 거라 여겼는데. 내가 그렇게나 오랫동안 여기에 쓰러져 있었던 건가요?”
“아닙니다, 비인. 제가 마음이 급해 그녀에게 좀 일찍 청해 들었습니다.”
“그랬군요. 혹시라도 나를 말리기 위해 도중에 찾아올까봐 때가 될 때까진 전왕에게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괘씸하네요. 그래도 결과적으론 잘 된 셈이니 너그러이 봐주어야겠지요?”
“…….”
내 묵묵부답에 자극을 받았는지 빙후가 불쑥 결론으로 도약했다.
“나는 성공했어요, 전왕.”
“……!”
“실은 꽤 고생했어요. 열 달이 지나도록 별 성과가 없어 애를 태우다가 어느 날 결심했지요. 야금야금 신령의 빙기를 빼먹으려 하지 말고 한 번에 받아들여보기로. 내 몸이 신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나갈 거라는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마음을 다잡았어요. 어차피 애초에 죽음을 각오하고 감행한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면서. 두려움을 몰아낸 마음을 용기로 채운 후 신령의 선택에 나를 맡겼어요. 그러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황홀경을 경험했어요. 나는 신이 되었어요.”
현재의 비참한 처지와 너무나 상반된 선언에 나는 위화감이 들었다. 본인도 그 점을 의식했던지 흥분으로 고조되어 가던 빙후의 음성이 갑자기 푹 꺾였다.
“하지만 한 순간이었어요. 미증유의 거력은 나와 일체가 되자마자 나를 파괴했으니까. 본능적으로 몸을 보호했지만 이미 늦었어요. 미리 대처했다고 해도 소용없었을 거예요.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으니까.”
허탈했다. 결국 빙후의 참상은 자업자득이었단 말인가. 그래서 흉수에 대한 질문을 못 들은 척 했던 건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빙궁의 참극을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게다가 빙후의 상처는 절대로 내부의 폭발로 인한 게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 외부에서 행한 타격의 결과였다. 하여 나는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갔다.
“누가 비인께 이런 짓을 했습니까?”
“…….”
나는 비로소 확신했다. 빙후의 침묵은 흉수가 존재함을 웅변하고 있었다.
“말씀해 주십시오.”
내 재촉에도 빙후는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그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어째서 함구하는 걸까. 흉수는 내가 아는 자일까.
혹시 검황자가 아닐까? 아니면 공주일까? 혹은 둘 다이거나. 공주는 몰라도 검황자는 못 본 동안 무력이 급상승했다면 빙궁을 붕괴시킬 수 있었을 터였다.
빙후는 그들을 보호하고 싶은 걸까. 터무니없는 억측임을 알면서도 불현듯 뇌리에 떠오른 가설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는 그걸로 빙후를 압박하기로 했다.
“공주와 검황자가 범인이군요. 그들이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결코 용서하지…….”
빙후가 내 말을 끊었다.
“말도 안 돼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죠?”
빙후의 비난을 한 귀로 흘리며 나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렇다면 진범을 알려주십시오. 천하를 다 뒤져서라도 찾아내 그자가 비인께 범한…….”
빙후가 다시 내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바로 그것 때문에 그이의 정체를 밝히지 않으려고 했던 거예요.”
“저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대체 왜…….”
말을 하던 중 나는 이유를 깨달았다.
어느 새 눈을 뜨고 있던 나는 빙후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자로부터 저를 보호하시려는 거군요?”
“……그래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하지만, 저는 비인과의 재대결에 대비하여 열심히 수련했습니다. 현재의 저는 전날보다 훨씬 강합니다.”
“알아요. 알고말고요.”
“그러니 걱정 마시고 그자가 누군지 알려주십시오.”
“안 돼요. 그럴 순 없어요. 전왕이 아무리 강해졌어도 그를 이길 순 없어요. 왜냐하면 그는…….”
나는 빙후가 얼버무린 뒷말을 질문으로써 완성했다.
“뇌신의 화신이니까요?”
대답 없는 빙후를 바라보며 나는 문득 성후가 남겼다던 말들을 떠올렸다. 천계와 인세의 경계가 허물어져 대혼란이 일어날 거라고 했던가. 꿈이란 해몽하기 나름이라지만 연관이 없을 성싶지는 않았다.
“약속해요, 전왕. 그에게 대적하지 않겠다고.”
나는 빙후가 빙궁의 일을 짐작할는지 궁금했다. 그럴 리 만무했다. 빙궁이 뇌신의 화신이란 자에게 멸망했음을 알면 아까 공주를 언급할 때 그렇게 태연하지 못했을 터였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내 거절에 빙후도 고집을 부렸다.
“그렇다면 그에 관해 말해주지 않을래요.”
나는 빙후를 설득했다.
“그자와 저는 무조건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듯 지상의 최강자도 오로지 한 명뿐입니다. 우리의 조우와 격돌은 필연입니다. 그러니 제가 조금이라도 승산을 높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고 하지 않습니까?”
“미안해요.”
나는 더 이상의 설득이 무망하리라 판단했다. 하지만 빙후의 사과엔 다른 의미가 있었다.
“실은 나도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요. 뇌신의 후인이라는 것밖에는. 여기 이렇게 누워서 전왕이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목소리가 들리더군요. 기껏 깨워놓고는 시체로서 맞이하느냐며 화를 냈어요. 그러더니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괴상한 소리를 내더니 내 몸에 분풀이를 했어요. 볼 수도 없고 고통도 느끼지 못했기에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필히 갈가리 찢어놓았을 테죠?”
“…….”
“그는 강해요. 전신의 화신이 되는데 실패한 나와는 달리 뇌신의 신력을 제대로 체득했을 거예요. 그러지 않았다면 수만리를 격하고 이곳까지 날아오지도 못했을 테니까. 부디 조심해요. 아주 잠깐이었지만 신령이 나와 합체되었을 때 나는 미증유의 힘을 느꼈어요. 그 힘을 부린다면 전날의 전왕을 삼 초 만에 짓이길 수 있었을 거예요. 그는 그 순간의 내 아래가 아닐 테니 전왕의 상상을 넘는 강자일 게 틀림없어요.”
“지금의 저도 그날의 저를 삼 초 이내에 쓰러뜨릴 수 있습니다, 비인.”
약간 과장이었으나 아주 허언은 아니었다.
“아!”
탄성을 터뜨린 빙후가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