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38
제237화 그 악마를 잡아오겠습니다
“혹시 내 남편의 소식을 아나요?”
잠시 망설이던 나는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몇 달 전에 타계하셨습니다.”
예상했던 듯 빙후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랬군요. 고통 없이 갔을 테지요?”
내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이가 나에게 남긴 말이 있었나요?”
역시 침묵해야 했다.
“남기지 않았어도 상관없어요.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지 아니까.”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빙후는 서운한 모양이었다.
“알고 싶지 않나요?”
옆구리를 찔렸으니 절을 할 밖에.
“알고 싶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라도 꼭 꿈을 이루라고 했을 거예요.”
뜻밖이었다. 공주가 전한 이야기에 따르면 빙후와 빙왕은 서로가 앞서나가는 걸 두고 보지 못하는 경쟁 관계가 아니었던가.
“아무리 그럴 듯하게 포장해도 우리는 금슬 좋은 부부는 아니었지만 한편으론 천생연분이라 불려 손색이 없는 한 쌍이었어요. 그이는 내게 최고의 벗이자 스승이었죠. 나도 그이에게 그런 존재였을 거예요. 동갑내기였던 우리는 빙공에 입문할 때부터 맞수였고 열다섯을 지나면서부터는 적수나 다름없는 사이가 되었어요. 지상최강자가 되겠다는 목표를 공유했기에 상대를 꺾는 건 반드시 완수해야 할 선결과제였지요. 돌이켜보면 우리의 다툼은 실로 치열하고 살벌했어요. 그래서 그토록 빨리 성장할 수 있었을 거예요.”
나는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진소월이 나와 무력을 견주려고 분투하는 그림은 그리기 어려웠다. 그나저나 빙후는 왜 갑자기 부군과의 과거사를 쏟아내는 걸까.
“우리는 스무 살에 백년가약을 맺었어요. 빙궁 최강의 고수로 등극한 걸 자축하는 의미였죠. 그 결정은 결과적으로 그이에겐 축복을 내렸지만 내겐 재앙이 되었어요.”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공주에 따르면 빙후는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에 시간을 뺏겨 빙왕에게 뒤처지고 말았다. 나중에 격차를 줄이기 위해 분투했으나 빙왕도 놀고먹은 게 아니었기에 삼십 년이 넘도록 지아비를 따라잡는 데 실패했다.
가만히 듣고만 있기 뭐해서 추임새를 넣었다.
“빙왕 어르신이 야속했습니까?”
“그럴 리가요. 내가 그이였대도 그랬을 텐데. 그이는 나를 존중했을 뿐이에요. 만약 그이가 일부러 나와 보조를 맞춰주려고 수련에 태만했다면 화를 냈을 거예요.”
알 듯 말 듯했다.
“그리고 오해는 말아요. 재앙이라고 한 건 단지 무공 방면에만 국한된 이야기일 뿐이에요. 나는 내 아들을 배고 낳고 기르는 모든 과정이 더 할 나위 없이 행복했어요. 그 애에게 젖을 물릴 때면……, 이 얘기는 이쯤에서 줄이는 게 좋겠네요. 아무튼 무인으로서의 성장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에 나는 지체되었어요. 죽을힘을 다해 앞서간 그이를 쫓아갔지만 그이도 기를 쓰고 달아나는 바람에 끝내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했어요. 나는 절망했어요. 무인으로서.”
이해하고도 남았다. 삼십여 년이나 피땀을 쏟고도 결실을 얻지 못했다면 누구라도 그러했을 터였다.
“어느 날 이대로는 죽을 때까지 그이의 등만 바라보다 끝날 거라는 위기감이 엄습하더군요. 나는 심마에 빠졌음을 자각했어요. 심각했죠. 만약 비상탈출구가 없었다면 결코 헤어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드디어 신령이 나올 차례였다. 내겐 유일하게 흥미로운 대목이기도 했다. 하지만 빙후는 훌쩍 건너뛰었다.
“지금은 후회막심이에요. 내 욕망을 제어하지 못해 결국 그이를 죽음에 이르게 했으니. 내가 이렇게 된 건 자업자득이니 상관없지만 그이에겐 미안할 따름이에요.”
나는 빙후를 위로했다.
“빙왕 어르신은 신령을 독점하지 않고 함께 나눈 비인의 조처에 오히려 감사하셨을 겁니다.”
“그렇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내 죄책감이 덜어지진 않아요.”
“…….”
“그렇더라도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전왕. 강호에 알려진 소문과 달리 전왕은 따뜻한 사람이에요.”
대체 세상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떠든단 말인가.
빙후가 별안간 가쁜 숨을 내뱉었다.
“이제 때가 되었어요, 전왕.”
간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나을 수 있습니다, 비인.”
“그렇지 않아요. 전왕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아껴뒀던 원천지기를 모조리 쥐어짠 걸요. 방금 그이 얘기를 하며 넋두리를 늘어놓은 건 전왕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였어요. 부디 들어주길 바라요.”
“…….”
“전왕에게 반하긴 했지만 내 짝은 누가 뭐래도 그이에요. 나는 그이와 더불어 영원한 잠에 들고 싶어요.”
난감했다. 빙후의 요청은 빙왕의 무덤에 합장해달라는 게 아니겠는가. 폐허가 된 빙궁에서 그의 묘를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설령 찾아내더라도 빙후를 그 비극의 현장 아래 묻는 건 차마 못할 짓이었다.
빙후가 내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러니 나를 바다에 넣어줘요, 전왕.”
“무슨 말씀이십니까?”
“몰랐나요? 빙족은 죽으면 바다로 들어가요. 거기서 영면하죠.”
수장(水葬), 아니 해장(海葬)이 빙궁의 전통이었던가.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이제 눈을 떠요, 전왕. 설마 계속 나를 보고 있었던 건 아니겠죠?”
뜨끔했다.
“그럴 리가요.”
거짓말이 이렇게나 술술 나오다니.
“고마워요. 되도록 나를 보지 말고……, 아니에요. 어서 나를 그이에게로 보내줘요.”
“하지만 비인…….”
멀쩡히 숨이 붙어있는 이를 어찌 차디찬 물속에 집어넣는단 말인가.
“어차피 나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해요. 그러니 제발…….”
빙후의 간청을 듣기 싫어 나는 그녀를 안아들었다.
“알겠습니다, 비인.”
“염치없지만 하나만 더 부탁해도 될까요?”
“말씀하십시오.”
“내가 떠나고 나면 공주를 돌봐줄래요? 철이 없어서 그렇지 본성은 그리 나쁜 아이가 아니에요.”
결국 빙궁의 참화에 대해서는 끝끝내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리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전왕이 와서 정말 다행이에요. 무운을 빌게요. 꼭 뇌신의 후인을 꺾고 지상최강의 무인이 되길 바라요.”
“……그러겠습니다.”
으깨지고 터진 빙후의 상체를 조심스레 받쳐 들고 빙산을 내려간 나는 해면에 섰다. 호흡은 이어졌으나 말이 없어진 빙후에게 마음속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그녀를 출렁이는 물결 위에 내려놓았다. 검푸른 파도가 금세 그녀의 동체를 삼켰다. 나는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오래도록 바다 속을 내려다보았다.
* * *
나는 고민했다.
파괴된 얼음궁전 아래 파묻힌 빙족들을 북해로 옮겨줄 것인가. 아니면 그냥 갈 것인가.
내 선택은 후자였다. 수고가 귀찮아서가 아니었다. 일 년 내내 지속되는 혹한 덕택에 시신이 썩을 일은 없을 테니 그들의 장례는 나중에 치러도 될 터였다.
그보다는 뇌신의 후인의 행방을 확인하는 게 급선무였다. 만약 그자가 중원으로 향했다면 불상사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상당했다. 빙궁에 남긴 흔적이 증명하는 바, 그자의 손속은 무자비했고 무력은 가공스러웠다. 도후라도 있으면 모를까 현재 중원엔 그자를 감당할 이가 전무했다.
수천 리 빙원을 종단한 나는 해가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평북 무림의 북단인 유구에 당도했다. 오랜 비행으로 몹시 지쳤지만 유구에서 휴식을 취하지 않고 내쳐 날았다. 두 시진 남짓 만에 끝없이 이어진 대평원을 벗어나 중원에 들어선 나는 곧장 명교로 향했다. 도중에 우한으로 가서 나현을 볼 것을 고려했지만 접었다. 거리상으로도 명교가 훨씬 가깝거니와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야천에서 내려다보이는 세상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온 천하가 전례 없는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다던 천랑성 대두노인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시나브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상기미를 알아차린 것은 은천 인근에 이르렀을 때였다. 멀리 보이는 명교의 도읍은 무거운 정적에 파묻혀 있었다. 자정을 넘겼을 시각인데다 야밤에 흥청망청하는 주당과 한량들을 허용하지 않는 곳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고요함이었으나 설명할 길 없는 불안감이 움텄다. 나는 속도를 끌어올렸다.
반 각 후 은천의 경계를 넘어서자 불안은 실체로 화했다.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 도시의 태반이 파괴되어 있었다. 가속을 발한 나는 강궁에서 발사된 화살처럼 명교로 날아갔다. 이윽고 명교의 전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망연자실했다.
* * *
명교는 제이(第二)의 빙궁이었다.
온전한 전각들이 없었다. 마치 심술궂은 악동이 동네꼬마들이 해변에 공들여 쌓은 모래성들을 마구잡이로 파헤친 것 같은 형국이었다. 빙궁과의 차이라면 시신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나는 명교의 백성들이 횡액을 면해서가 아니라 이미 주검들을 치웠기 때문임을 알았다. 빙궁과는 달리 생존자들이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명교 대문의 광장에 내려서지 않고 구세원으로 직행했다. 우려했던 대로 단층 석조건물은 기둥 하나만 남아있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구세원에는 무왕과 괴선이 들어있었다. 건물이 박살났는데 그들이 무사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인기척이 나지 않았지만 나는 큰소리로 무왕을 외쳐 불렀다.
“사부!”
주변에서 은밀한 소요가 일었다. 잠시 후 소면통달이 달려왔다. 그의 면상과 일성에는 진득한 원망이 담겨있었다.
“이제야 왔구려, 무황.”
나는 무왕의 안위부터 확인했다.
“제 사부는 어디 계십니까?”
“무왕은 죽었소.”
각오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이 하얘졌다.
“변을 당한 이는 무왕만이 아니오. 내 아우님들을 포함해 물경 십만의 생명이 고혼이 되었소. 나는 우연히 성원에 나가 있어 목숨을 부지했으나 살아도 산 게 아니오. 신민들이 전멸했으니 본교는 이제 끝이오.”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렇다면 괴선도 점박이 노인도 무영도 불귀의 객이 되었단 말인가. 북천맹에 파견되었던 광객도 돌아와 있었다면 유명을 달리했을 터였다. 귀면나찰과 옥면수라가 당했다면 그 또한 흉수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물었다.
“어떤 자였습니까?”
“유감스럽게도 여기서는 제대로 본 사람이 없소. 은천 외곽에 거주한 덕분에 화를 입지 않은 백성들의 얘기로는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괴성만 들을 수 있었다고 하오.”
뇌신의 후인이 분명했다.
“그러나 자미원에서 보내온 서신에 따르면 흉수는 이인조라고 합디다. 이인조라지만 하나는 어린아이일 뿐이고 다른 하나가 살겁을 일으킨 모양이오. 엄청난 거한이라고 하는데…….”
나는 소면통달의 말을 끊었다.
“나 대인의 첩지를 봐야겠습니다.”
“안내하겠소.”
소면통달이 몸을 날렸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줄이기 위해 그를 안고 달리고 싶었으나 간신히 자중했다. 가면서 소면통달에게 물었다.
“그자들이 명교에 언제 왔습니까?”
“이레 전이었소.”
“다른 곳에서도 학살을 저지르고 있답니까?”
“그렇다고 하오. 자미원의 보고에 따르면 본교에 이어 수안, 성지, 고원, 상인, 주기가 차례로 참변을 당했답디다.”
전속력으로 경공을 펼치며 입을 열기 힘겨운지 소면통달이 심하게 헐떡거렸다. 나는 질문공세를 중단했다. 소면통달을 배려해서가 아니라 퍼뜩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서였다.
소면통달이 열거한 곳들은 전부 인구 오만 이상의 대도였다. 그것들을 이으니 일정한 경로가 보였다. 나는 흉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 것 같았다.
“주기의 참변은 언제 일어났습니까?”
“그제였소.”
“그 다음은 모르십니까?”
“전서구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소. 하지만 일출 전후로 올 게요.”
나는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이인조가 난리를 친 다음 장소를 알면 그들의 행선지가 보다 확실해질 터이나 서너 시진이나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소면통달을 멈춰 세웠다.
“그만 가셔도 됩니다.”
소면통달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이오?”
나는 답을 주는 대신 되물었다.
“흉수가 거한이라고 했습니까?”
“그렇소. 믿기 어렵지만 무황보다 체구가 훨씬 크다고 합디다. 게다가 봉두난발에 벌거숭이였다고 하오.”
그걸로 충분했다. 공중으로 비상하며 나는 소면통달에게 출정을 알렸다.
“악마를 잡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