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39
제238화 잡았다!
나는 밤새 날았다.
해가 뜨고 반 시진가량 지났을 때 중원 중서부에 위치한 자운산맥을 넘으며 갈등했다. 우한이 지척이었다. 자미원에 가서 나현에게 좀 더 자세한 사정을 알아보고 갈까. 아니면 그냥 흉수의 목적지로 추정되는 곳으로 직행할까.
전자가 보다 현명한 처신일 테지만 나는 후자를 택했다. 서역 마녀와 진소월에게서 경험한 바, 작은 시차가 희생자의 수에서 다대한 차이를 만들 수 있었다.
나는 흉수가 천랑성으로 향했으리라 판단했다. 은천에서 주기까지 이어진 그의 행로는 사막으로 뻗어있었다. 그리고 사막 너머에는 천랑성이 있었다.
중원에 내려온 흉수가 최초로 살겁을 일으킨 곳이 명교라는 사실은 그자가 애당초 나를 목표로 삼았음을 시사했다. 흉수는 빙궁에서 나에 관한 정보를 취득했을 터였다. 그러고는 내 거처로 알려진 명교로 향한 것이었다. 다시 명교에서는 내가 천랑성에 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터였다. 그래서 서진(西進)한 것이었다.
내가 이해하기 힘든 점은 두 가지였다.
흉수는 어째서 무차별적인 학살을 일삼는 걸까. 뇌신은 태곳적에 유부에서 올라온 악귀들을 쫓아내 인세를 수호했다는 신들의 우두머리라고 했다. 그런 신의 후인이 아무 잘못도 없는 인간들을 무참히 살해하다니 도무지 납득불가였다.
또 한 가지, 흉수는 어떻게 중원 지리를 그렇게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을까. 빙궁에서 중원으로 내려온 경로는 알지 못했지만 은천에서부터의 진로는 천랑성을 도착지로 가정할 시 일체 군더더기가 없었다. 수차례의 종횡으로 중원의 지리를 통달했다고 자부하는 나조차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의문을 풀려면 만나보는 수밖에 없었다. 빙후가 그의 말을 들었다니 빙족의 언어를 구사한 게 아니라면 중원어를 썼을 것이었다. 중원의 지리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으니 중원어를 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흉수를 처단하기 전에 의문을 해소할 수 있기를 바랐다.
* * *
사막을 횡단하던 중 일몰을 맞았다. 회색빛 하늘에 장엄한 적광을 남기며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는 해를 보며 속이 탔다. 천랑성까지는 아직 수천 리를 더 가야 했다.
나는 혹시 계산 착오가 있지 않았을지 재점검했다. 소면통달이 전한 내용에 따르면 흉수는 하루에 한 번 꼴로 학살을 저질렀다. 그제 주기가 당했으니 어제는 가흥이나 초연, 혹은 배송이 희생양이 되었을 터였다. 그 다음에는 사막에 이르기까지 이렇다 할 대처가 없으니 흉수는 지금쯤 천벽 근처에 다다랐을 공산이 컸다.
설마 작은 마을들도 건드린 걸까. 그래서 나보다 뒤처진 건 아닐까.
그럴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웠으나 몸을 돌리지 않고 계속 나아가기로 했다. 처음 추산한 게 맞는다면 서둘러야 했다. 천벽을 넘으면 스앙카가 나왔다. 하루를 굶었을 흉수가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이십만의 인구와 다채로운 풍물을 자랑하는 서역의 대도가 아비규환의 지옥도로 변하는 광경을 채찍질삼아 나는 가속에 가속을 발했다.
멀리 천벽의 윤곽이 보였다.
땅 위에서 꿈틀거리는 기다란 지렁이 같았던 그림자는 순식간에 하늘까지 솟은 거산들의 회합으로 탈바꿈했다. 나는 힘을 냈다. 이제 일천여 리만 더 가면 스앙카였다. 하지만 갈수록 속도가 떨어졌다.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폐는 터지기 일보직전이었고 전신의 뼈와 근육들은 무지막지한 강행군을 비난하며 아우성을 쳤다. 만 하루도 안 돼 거의 일만 리를 주파했으니 온전할 리가 없었다.
나는 육신의 항의를 묵살했다. 무리에 무리를 거듭하는 건 스앙카의 민중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나 개인의 복수심이 더 큰 원인이자 동력이었다.
나는 흉수가 한우경과 이모를 살해했던 마왕보다 증오스러웠다. 무왕과 괴선, 점박이 노인과 무영, 검황자와 광객……. 소중한 친인들을 무참히 죽인 원수가 제멋대로 설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처단해 친인들의 넋을 달래야 했다. 그자의 목을 잘라 그들의 영전에 바쳐야 했다.
* * *
거산들은 어둠 속에 웅크린 거대한 짐승 같았다. 나는 나를 먼지로 여길 짐승의 등을 타고 서북으로 이동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낚시로 막 건져 올린 잉어처럼 내 심장이 심하게 펄떡거렸다.
무언가 있었다. 나는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만년설에 뒤덮인 산봉우리 맞은편에서 일렁이는 괴이한 기운에게로 날아갔다. 내가 접근함에 따라 기운은 점점 강대해졌다.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잡았다!’
탈진지경에 이르렀던 육신에 별안간 활력이 넘쳐흘렀다. 흥분의 효과였다. 평정심을 유지할 것을 스스로에게 명하며 행여나 흉수가 달아날 새라 나는 쏜살같이 내달았다.
내 도래를 인지한 듯 흉수는 전진을 멈추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찬연한 달빛 아래 비스듬한 산자락에 우뚝 선 인영이 보였다. 나는 속도를 줄이며 안력을 돋우었다.
대조적인 이인조였다. 하나는 소면통달에게 들은 대로 나보다 큰 거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이보다 작은 난쟁이였다.
거인은 못해도 십 척이 넘어보였다. 체구도 어마어마했다. 온 몸이 근육질인데다 떡 벌어진 어깨는 내 두 배에 달했다. 그러나 사타구니에 매달린 양물은 내 새끼손가락보다 작았다. 그렇더라도 거인의 풍기는 위압감은 태산을 방불케 했다.
거인은 인간이 아니라 맹수의 면상을 갖고 있었다. 부리부리한 고리눈에 납작한 코, 그리고 잇몸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릴 때 튀어나온 송곳니. 사방으로 뻗친 머리카락들도 흡사 수사자의 갈기 같았다.
거인이 발산하는 무지막지한 패기를 가늠한 나는 그의 무력이 내 아래가 아닐 것임을 직감했다. 반면 이 척이 될까 말까한 난쟁이는 존재감이 극히 미미했다. 소면통달은 아이라고 했지만 얼굴을 보니 다 자란 성인이었다. 하지만 역시 인간이라기보다는 생쥐 같은 낯짝이었다.
멀리 떨어진 작은 눈, 앞으로 튀어나온 입술 밖으로 돌출된 뻐드렁니가 영락없는 생쥐의 몰골이었다. 거인처럼 알몸이었는데 너무 삐쩍 말라 안쓰럽기까지 했다. 나에게 흉포한 안광을 쏘아내는 거인과 반대로 난쟁이는 나를 직시하지도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겁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거인의 다리 뒤로 숨는 난쟁이에게 관심을 끊고 거인에게 집중했다. 철봉과 옥소를 빼들며 결전에 돌입하기 전 말을 섞을 지를 두고 저울질하고 있는데 거인이 선수를 쳤다.
[여기서 보다니 의외군. 혹시 나를 쫓아온 건가? 아니면 마중을 나온 건가?]나는 당황했다. 거인의 음성은 내 고막이 아니라 머리에 울렸다. 이건 무슨 사술이지?
[수고를 던 셈이니 칭찬해줘야겠군. 하지만 제 발로 사지에 뛰어들었으니 이제 그만 죽어라.]“크아아아!”
거인이 별안간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육성을 토해내더니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그에게 던지려던 질문들을 목구멍에 가두고 응전할 수밖에 없었다.
기시감이 들었다.
단 삼초의 공방 만에 나는 거인과의 일전이 서역 마녀와 치렀던 사투의 재판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거인은 강했다. 그리고 빠르고 단단했다. 전력을 실은 철봉으로 그의 팔뚝을 내려쳤으나 가공스러운 반탄력으로 인해 도리어 내 팔의 뼈가 으스러졌다. 그 와중에 하마터면 거인의 다른 손에 걸려 머리까지 뜯길 뻔했다. 가까스로 흉험한 도끼질을 피해낸 나는 훌쩍 물러섰다. 그러나 거인은 내가 거리를 벌리도록 허용하지 않고 바짝 따라붙었다.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쾌속의 몸놀림이었다.
나는 광망으로 거인의 쇄도를 견제했다. 그러나 거인은 빛 그물을 맨몸으로 찢어버리며 내게 육박했다. 분명 광망에 정면으로 걸렸음에도 그의 동체엔 혈흔조차 생기지 않았다. 거인은 서역 마녀를 능가하는 금강불괴였다.
고전이었다.
비슷한 무위라면 나는 상대가 설령 신이라도 이길 수 있었다. 박빙의 열세일 경우에도 승산이 칠 할을 넘으리라 믿었다. 오만이 아니라 숱한 역전승을 일구면서 길러진 자신감이었다.
그러나 거인과 나의 차이는 실전에서 강미를 발하는 승부감각만으로 상쇄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원초적인 공격밖에 하지 못했던 서역 마녀와 달리 거인은 싸우는 법을 알았다. 더욱이 그의 본신무력과 내구력은 마녀보다 월등했다. 그러니 고전은 필연지사였다.
하지만 나는 악전고투하면서도 최종적인 승자는 내가 될 것임을 확신했다. 거인은 가진 수단을 아낌없이 펼쳐 보인 반면 나에겐 비장의 패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결정적인 장면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승부수를 터뜨려야 전세를 뒤집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낙관했다. 이 방면에서 나를 능가할 이는 천지간에 없었다.
일방적으로 밀리면서도 나는 치명타를 허용하지 않고 버텨냈다.
내가 도주를 제일전술로 택한 탓에 어느 새 전장은 수백 장이나 아래로 이동해 있었다. 세상을 쓸어버릴 듯한 눈사태와 함께 추락한 나는 거인의 맹공을 신법으로 감당하는 한편 꾸준히 반격을 가했다.
거인은 금강이되 불괴지체는 아니었다. 옥소와 철봉에서 발출된 빛의 소낙비에 두드려 맞은 그의 육신에 붉은 반점들이 피어났다. 나는 서서히 광참으로 간을 보기 시작했다. 원력의 양을 조절하며 거인의 방심을 유도한 후 아끼고 아끼던 순간가속을 발해 단숨에 그의 목을 찍었다. 최대치의 원력이 담긴 광참에 적중당한 거인이 괴성을 내질렀다. 단말마의 비명은 아니었으나 확연한 고통의 표명이었다.
어지간한 장정의 몸통보다 굵은 거인의 목에 난 도흔(刀痕)은 내 사기를 북돋우었다. 나는 거인이 충격을 추스를 겨를을 주지 않고 원력을 모조리 쥐어짜 맹폭을 가했다. 집요하게 목만 노린 결과 네 번의 타격 만에 드디어 깊은 창상을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 거인은 내 좌견만 으스러뜨렸을 뿐이었다.
거인의 손질에 걸려 왼 어깨가 뭉개졌지만 나는 승기를 놓치지 않고 결정타를 가했다. 옥소에서 뻗어나간 빛 무리가 거인의 갈린 목을 파고들며 폭발했다. 나는 이 일수가 거인을 끝장내고 승부를 마무리 할 수 있기를 빌었다. 내게도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 바람은 절반만 이루어졌다.
거인의 목이 떨어졌으나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를 절명시킨 직후 나는 몸을 반으로 접었다. 무언가 복부를 강타했기 때문이었다. 일순 거인의 주먹이 날아와 꽂힌 듯했으나 바로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 내 배를 쪼개고 내장을 파열시킨 자는 거인이 아니라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난쟁이였다.
가물어가는 의식 속에서 머리를 울리는 탄성이 들렸다.
[하아, 굉장하군. 이렇게나 대단한 물건이었다니.]문득 극심한 위화감이 들었다. 빙후에게 기껏 깨워놓고는 시체로 맞이했다며 신경질을 냈다던 자는 거인이 아니라 난쟁이였던가. 난쟁이가 뇌신의 후인이었던가.
나는 혼절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갈 때 가더라도 마무리는 지어야 했다. 극통을 참으며 은밀히 우수(右手)에 원력을 내려 보내다 나는 비명을 내질렀다. 무언가 옥소를 쥔 내 오른손을 짓이겼기 때문이었다.
난쟁이를 암습하려던 의도가 수포로 돌아간 나는 체념했다. 기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렸지만 그가 사납게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 어디쯤에 도사리고 있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설령 내 목숨과 맞바꿀 최후의 절초를 마련했더라도 목표물을 찾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