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40
제239화 그 어른이 무사하십니까?
몸이 양단될 것을 각오하고 있는데 난쟁이의 목소리가 두개골을 울렸다.
[멍청한 탓에 하급으로 분류되긴 하지만 전투력만 따지면 신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아카가 이토록 어이없게 당하다니. 하찮은 인간들이 괴물을 배출했구나.]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네가 정말로 뇌신의 후인인가?”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난쟁이가 내 질문에 반응했다.
[후인? 우습군. 나는 뇌신 자신이야.]나는 난쟁이를 자극했다.
“거짓말하지 마라. 네가 진짜 신이라면 생쥐들의 신이겠지.”
내 조롱에 열이 오른 난쟁이가 분기를 발산하길 바랐지만, 그래서 암암리에 끌어올린 원력을 왼손의 철봉에 실어 기습하려고 했지만, 마치 내 수를 읽은 듯 난쟁이는 내기를 드러내지 않았다.
[인간의 꼴로 화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런 적합지체를 골랐을 뿐이다. 원래의 나는…….]청하지도 않았는데 친절하게 이유를 설명하던 난쟁이가 버럭 화를 냈다.
[내가 어째서 너 따위에게…….]난쟁이는 이번에도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내가 우측 허공에 섬광처럼 번득인 기운을 향해 모든 원력을 담은 광참을 쏘아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명을 지른 것은 난쟁이가 아니라 나였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느닷없이 가슴이 뭉개져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터져 나왔다.
난쟁이가 킬킬거렸다.
[그런 얄팍한 수작이 통할 성싶더냐? 설령 그 어설픈 빛줄기를 맞아줬다고 해도 간지럼을 태우는 수준이었을 거다.]전투불능의 상태였으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시간을 끌면 원력이 모이고 육신도 회복될 것이었다. 그러면 또 한 번의 공격을 감행할 수 있었다. 수차례 경험한 바,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었다.
“개소리. 너는 나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니까 멍청한 놈을 앞세워 내 힘을 빼놓은 후 비겁하게 뒤통수를 쳤지. 뇌신은 개뿔. 너는 그냥 생긴 그대로 쥐새끼일 뿐이야. 쌍방 정상적인 상태에서 제대로 붙으면 너는 내 한 주먹거리에 불과해. 좀 전에 뒈진 멧돼지새끼처럼.”
너무 과한 언사였나. 하지만 나는 난쟁이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게 유일한 활로이리라 생각했다. 전설이 진실이라면 뇌신은 경쟁자였던 전신을 이기고 근맥을 잘라버린 후 오지로 추방하고도 그가 부활할 시 최종적으로 말살하기 위해 지상에 남았던 자였다. 그러한 본성이 남아있다면 필히 내 비아냥거림을 그냥 넘길 수 없을 터였다.
분기탱천한 난쟁이가 나를 즉결처분할까 봐 간을 졸이고 있는데 다행히 벼락이 아니라 음성이 떨어졌다.
[겁 대가리를 삶아먹은 종자로구나. 너는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내 터럭 하나 건드릴 수가 없어.]“말로는 뭔 소리를 못해. 나는 일천 번을 싸우면 딱 그만큼의 숫자만큼 네 대가리를 부숴버릴 수 있다.”
어인 일인지 난쟁이가 즉각 받아치지 않고 침묵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대로 끝인가.
난쟁이를 고민에 빠뜨릴 묘안을 궁리하고 있는데 별안간 극심한 현기증이 일었다. 맹렬하게 돌아가는 바람개비에 달라붙은 개미처럼 어지러웠다. 속도 울렁거려 토할 것 같았다. 한참을 견디다 더 참지 못하고 정신 줄을 놓으려는 찰나 난쟁이의 음성이 나를 붙잡았다.
[역시 허장성세였군. 아카와의 일전에서 보인 무력이 최선이었어. 원력이 극한에 이르렀으니 더 강해질 수도 없고 순간이동이라고 해봤자 내 눈에는 굼벵이들의 소꿉장난에 불과해. 설사 이모라는 계집의 치유력을 빌어 원상회복 된다고 해도 너는 내 상대가 될 수 없어. 그러니 이제 너희들이 염왕이라고 믿는 족속에게로 가라.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니 그 노파의 예언대로 허리를 잘라주마.]소름이 돋았다. 대체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난쟁이는 정녕 신이란 말인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나는 다급히 소리쳤다.
“잠깐 기다려. 너는 중요한 걸 빠뜨렸어.”
난쟁이가 나를 비웃었다.
[그 알량한 승부감각 말이냐? 그것도 어느 정도 비슷한 자들에게나 통하는 얘기다. 나한테는 어림도 없어.]“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이다. 너처럼 큰소리치다 골로 간 놈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내 속을 뒤졌다면 너도 봤을 거 아니냐?”
[…….]난쟁이가 반박의 말을 찾기 전에 나는 분발했다.
“오늘은 내가 너한테 졌다고 치자. 하지만 다음번엔 너를 이길 수 있다. 나는 누구에게라도 두 번째, 세 번째 대결에서는 전승을 거뒀다. 허풍이 아님을 알 테지?”
[나를 그런 버러지들과 비교하지 마라.]“그렇다면 증명해 봐.”
[…….]“지금 나를 두 동강 내면 너는 겁쟁이라는 오명을 그림자처럼 달고 다녀야 할 거야. 영원히. 네 패거리는 물론이고 인간들도 너를 진정한 최강자로 인정하지 않을 걸. 설마 아무도 모를 거라고 믿는 건 아니겠지? 저 구름과 이 산이 보고 듣고 있을뿐더러 네가 알고 나도 알아. 그러니…….”
[그만! 어쭙잖은 발버둥은 거기까지다. 한 마디만 더 지껄이면 노파의 예언이고 나발이고 네 몸뚱이를 일곱 조각으로 나눠버릴 테다.]나는 난쟁이의 협박에 굴복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 그의 선택에 운명을 맡겨야 할 때였다.
난쟁이가 뜸을 들였다. 나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두고 주판알을 튕기고 있을 터였다.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억겁의 세월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난쟁이가 결정을 통보했다.
[좋아, 기회를 주지. 하지만 나는 여기서 너와 노닥거릴 만큼 한가하지 않으니 나중에 나를 찾아와라. 저 천공의 보름달이 깎이고 다시 차는 날 ‘신들의 산’으로 와서 나를 불러라. 만약 달이 이지러지기 시작하도록 나타나지 않으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네 땅의 인간들을 남김없이 도륙할 테니 알아서 해라.]나는 ‘신들의 산’이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자중했다. 바라는 바를 얻었으니 구태여 난쟁이의 심기를 건드릴 까닭이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난쟁이의 뒷말이 나오지 않았다. 최소한의 운신이 가능해져 주위를 둘러보고서야 나는 그가 작별인사도 없이 떠났음을 알았다.
* * *
암담했다.
난쟁이가 최초로 가한 공격에 파열된 내장에는 내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경황 중이라 인지하지 못했다가 뒤늦게 그 사실을 확인한 나는 망연자실했다.
내단은 내 비장의 패였다. 나는 아직 덜 용해된 내단의 원력을 일시에 취해 순간적으로 무력을 키운 후 난쟁이를 안고 폭사함으로써 그와 동귀어진 할 작심이었다. 그런데 내장이 복구불능으로 상했으니 시도조차 못하게 되었다.
나는 기이한 사술로 내 속을 샅샅이 훑은 난쟁이가 내가 품은 극단의 결의를 보고는 코웃음을 쳤을 것임을 알았다.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결국 본연의 무력으로 난쟁이를 상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승산이 일 푼이라도 있을는지 의문이었다. 난쟁이는 나에 관해 손바닥 들여다보듯 아는 반면 나는 그에 대해 아는 바가 극히 적었다. 그의 진신무력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나를 살려둔 것으로 보아 내 아래가 아님은 확실했다. 필승의 확신이 없었다면 아무리 자존심을 자극했어도 후환을 남겨두지 않았을 터였다.
새벽별이 뜨도록 난쟁이를 상대할 비법을 궁리했지만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 나는 일단 회복에 주력하기로 했다. 아직 한 달이라는 기간이 남았으니 어떻게든 될 터였다. 안 되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었다.
* * *
아까운 시간이 물처럼 흘렀다.
난쟁이에게 당한 부상은 의외로 심각했다. 그는 전날 마왕이 그랬듯 내 내부를 철저히 파괴했다. 다분히 의도적인 손찌검이었으리라.
걸음을 옮길 수 있을 만큼 회복되는 데 이틀이나 걸렸고 경신을 전개할 수 있을 때까지 다시 이틀을 잡아먹었다. 나흘이나 천벽의 거산에 묶여있던 나는 서역으로 날아갔다. 목적지는 천랑성이 아니었다. 전갈독수가 필요 없어진 터라 그곳엔 더 이상 갈 이유가 없었다.
나는 스앙카를 확인하고 싶었다. 중원에서의 살겁은 거인이 저질렀다지만 그는 단지 난쟁이의 하수인에 불과했다. 만약 스앙카가 참변을 당했다면 난쟁이가 학살의 원흉임을 증명할 터였다.
일천여 리를 날아 스앙카 상공에 이른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국의 도시는 변함없이 태평스러운 가운데 시끌벅적했다. 난쟁이는 스앙카를 그냥 지나간 것이었다.
나는 홀가분해졌다. 설령 한 달, 아니 이십육 일 후 ‘신들의 산’에서 난쟁이와 싸우다 몸이 두 동강 난다고 해도 나 하나만 죽으면 그만이었다. 난쟁이가 다시 중원으로 쳐들어올 가능성을 아주 배제할 수는 없었으나 그럴 성싶지는 않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바람 섞인 전망일 뿐이었다.
스앙카로 하강하지 않고 공중에서 몸을 돌린 나는 천벽으로 되돌아갔다. 그러고는 거인과 사투를 벌였던 거산을 지나다 동체에서 분리된 그의 두부를 수거했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몰랐다. 전리품으로 삼고 싶었던 걸까.
사막에 들어서서는 그곳에서 수련할까 잠시 고민했으나 내처 날았다. 길어야 보름 정도의 수련으로 유의미한 성취를 얻을 것 같지도 않았거니와 중원에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였다.
나는 내 전사(戰死)를 전제로 후사를 정리할 참이었다. 사막을 가로지르면서 내가 떠난 후의 천하의 안위를 심려하는 내 모습이 낯설어 몇 번이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나현의 장원에 이르렀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환락과 열락의 기음들이 소용돌이치는 우한에서 유일하게 정적에 휩싸인 자미원은 전날 폭설이라도 내렸는지 백색 일색이었다. 나는 흰 눈을 이불처럼 덮은 마당에 내려서며 방문을 알렸다.
와옥의 문이 열리면서 나현이 맨발로 뛰어나왔다. 혈접이 어김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어서 오오, 무황. 아!”
내 손에 들린 거인의 수급을 본 나현이 탄성을 내질렀다.
“천마(天魔)를 잡았구려. 역시!”
천마? 거인이 그새 그런 거창한 별호를 얻었단 말인가.
“엿새 전 명교에서 무황이 천마를 잡아오겠다며 떠났다는 전갈은 받았소.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던 참이었는데 예상보다 늦게 끝냈구려.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라도 천마에게……, 아니 이게 웬 주책이람. 감히 무황을 의심하다니. 못 들은 걸로 해 주구려.”
쓴웃음이 났다. 내가 얼마 후 죽을 목숨임을 알면 나현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나는 기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오늘이 몇 월 며칠입니까?”
나현도 고소를 지었다.
“정월 스무날이라오.”
“그렇군요. 저자에게 희생당한 이들이 얼마나 됩니까?”
나현이 입을 열기 전에 혈접이 끼어들었다.
“미안한데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면 안 될까요? 날씨가 몹시 쌀쌀하네요.”
얇은 옷을 걸치고 있었으나 초절정의 고수인 혈접이 추위를 탈 리 만무했다. 그녀는 나현을 걱정한 것이었다. 나현에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호위이자 사려 깊은 짝이었다.
우리는 와옥 일층의 다실로 들어갔다.
의자에 착석하자마자 나현이 미뤘던 답을 꺼냈다.
“천마는 이레 간 은천에서부터 가흥까지 일곱 도시에 걸쳐 물경 오십만의 인명을 학살했소. 가장 피해가 큰 곳은 은천이었소. 명교는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소.”
내 안색이 어두워지자 나현의 목소리도 침중해졌다.
“무왕의 서거는 참으로 유감이오.”
“…….”
“그나마 괴선이 화를 피해 다행이오.”
나현이 의도한대로 귀가 번쩍 뜨였다.
“그 어른이 무사하십니까?”
“역시 모르셨구려. 그이는 벌써 넉 달 전에 정맹으로 거처를 옮겼다오. 지금은 집법전의 대판관이 되어 정파 무림의 고위층이 연루된 재판을 주관할 뿐만이 아니라 정맹의 대소사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며 관여하고 있다오.”
넉 달 전이라면 내가 빙후와의 재대결에 대비해 사막에서 땀을 쏟고 있을 때였다. 괴선의 행운에 감사하고 있는데 나현이 또 다른 희소식을 전했다.
“무황의 친인 중에 무영이란 이도 살아 있소.”
“아! 광객 어르신은 어찌 됐습니까?”
“그이는 원래부터 명교에서 나와 있었잖소? 일곱 달 전 무황과 도후의 기념비적인 일전을 관전하러 잠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서는 사마의 잔당들을 소탕하러 온 대륙을 누비고 있다오. 이번 천마의 살겁행과도 엇갈렸소. 마침 엊그제 그이가 모처럼 서경의 북천맹을 찾았다는 전갈을 받았으니 그이의 안위에 관해선 염려하지 않아도 될 듯싶소.”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실로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하지만 내 신경을 바짝 곤두서게 만들 소식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