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43
제242화 어떻게 말이오?
좀체 당황하는 법이 없는 독의가 허둥지둥 댔다.
“잠시만 기다리게. 나는 그 아이를 되살렸네. 그뿐만이 아닐세. 자네가 간절히 바랐던 대로 그 아이의 본모습도 복원했네. 내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자네는 상상도 못할 걸세. 죽음까지 미뤄가며…….”
명확한 살의를 담은 내 눈빛을 접한 독의가 다시 말끝을 흐리더니 체념의 미소를 머금었다.
“기어이 나를 염왕에게 보낼 작정이구먼. 갈 때 가더라도 자네가 그 아이와 대면하는 감격스러운 장면만은 보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되겠는가?”
나는 철봉을 독의의 정수리에 내리침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퍽!
수박 터지는 기음과 함께 독의의 두부가 박살났다. 나는 머리통을 잃고 허물어지는 그의 몸뚱이를 내버려두고 정면의 동굴로 발길을 옮겼다. 진소월은 동굴 안쪽 어딘가에 들어있을 터였다. 독의가 나를 처치하기 위해 안배한 무언가를 품고서.
이번 동굴도 좁고 길었다. 통로 양편에 빈 석실들이 늘어서 있었다.
나는 진소월로 추정되는 내기가 흘러나오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가까이 접근함에 따라 뜻밖에도 악취가 아니라 향긋한 내음이 흘러나왔다. 두꺼운 철문이 가로막고 있음에도!
진소월이 든 석실에 들어서기 전 나는 심호흡을 했다. 독의는 분명 그녀의 몸이나 석실 내부에 모종의 장치를 해두었을 터였다. 나를 살해하기 위한 장치임은 불문가지였다.
무슨 장치일까. 얼핏 드는 생각은 폭발이었다. 유독 진소월이 있는 곳에만 철문을 설치한 까닭을 그것 말고는 떠올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정말로 독의가 그렇게 빤히 보이는 짓을 했을는지는 의문이었다. 더욱이 백만 근의 화약을 터뜨린들 나를 어찌할 수 없음을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특별히 강력한 화약을 준비한 걸까. 그래서 밀폐된 공간에서라면 나를 처치할 수 있다고 여긴 걸까.
정돈되지 않은 추론들이 두서없이 일어났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 상념을 떨쳐낸 후 철문을 밀었다. 아예 뜯어내버릴까 했지만 독의가 바라는 바가 그것일지도 몰라 유혹을 뿌리쳤다. 철문의 훼손이 기폭장치 노릇을 할 수도 있었다.
스르르.
기름칠이라도 한 듯 육중한 철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급작스러운 사태에 대비해 호신강기를 두르고 하시라도 순간이동을 펼칠 만반의 태세를 갖춘 나는 재빨리 석실 내부를 살폈다. 그러고는 날숨을 폐에 가두었다.
독의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예닐곱 평가량 되는 석실 중앙의 석대에 반듯이 누운 진소월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눈을 감고 있어 깊은 빛을 담은 갈색 동공은 볼 수 없었으나 나를 매혹시켰던 분홍빛 입술은 아름다운 색깔과 유려한 곡선을 되찾은 상태였다.
곪고 찢기고 갈라졌던 나신도 백옥처럼 투명하고 매끄러웠다. 목과 팔다리에 나있던 지렁이 같은 상처도 흔적조차 없었다.
나는 문득 석대 위의 여인이 진소월의 형상을 한 인형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무리 독의의 의술이 하늘에 닿았다지만 어떻게 저토록 완벽하게 원상복구 할 수 있었을까. 마치 산산조각 난 도자기를 감쪽같이 이어붙인 수준을 넘어 완벽하게 재창조한 신장(神匠)의 걸작 같았다.
게다가 목전의 진소월은 심장 박동은 잡혔지만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혹시 그녀의 체내에 다람쥐 같은 작은 짐승을 집어넣은 건 아닐까.
전날 진소월의 호흡과 심장이 완전히 멈추었던 사실을 상기한 나는 갈등했다. 그녀의 껍질을 두르고 있지만 석대의 여인은 그녀가 아닐 터였다. 나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작품이 절대무적임을 증명하고자 하는 독의의 망상이 빚어낸 괴물일 공산이 컸다. 괴물의 속엔 필히 나를 위해할 암기가 감춰져 있을 터였다.
내 추측은 절반만 맞았다.
* * *
내가 문 앞에 서서 입실을 주저하고 있는데 시체처럼 미동도 없던 석대 위의 여인이 별안간 숨을 들이켜더니 진저리를 쳤다. 반사적으로 순간이동을 발해 석실에서 멀어진 내 귀에 옥음이 날아왔다.
“전 가가?”
나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분명 진소월의 음성이었다. 목이 상하기 전의 음성. 설마 독의가 그것마저 재생했단 말인가.
내 가슴을 반가움과 의혹으로 물들인 목소리가 다시 나를 불렀다.
“전 가가?”
나는 석실로 돌아갔다. 설사 함정이라고 해도 도저히 그냥 갈 수는 없었다. 진위 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어느 새 철문이 저절로 닫혀있었다. 꺼림칙했지만 철문을 밀고서 석실 안으로 들어섰다. 여인은 눈을 뜨고 있었다. 내 쪽으로 돌아가 있던 그녀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나는 울컥했다.
나를 보는 여인은 틀림없는 진소월이었다. 제아무리 신의(神醫)라도 눈빛마저 제조할 수는 없을 터였다. 만에 하나 그렇다면 기꺼이 속아줄 참이었다.
이미 마음속으로 단정했음에도 내 입에서 의구심을 담은 질문이 튀어나왔다.
“정말 소월, 당신이오?”
진소월의 분홍빛 입술 끝이 살짝 비틀렸다.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너무나 보고 싶었던 쓴웃음. 그것은 더 할 나위 없이 훌륭한 대답이었다.
순간이동으로써 단숨에 석대에 붙은 나는 섬섬옥수로 돌아온 진소월의 손을 잡았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구려. 당신이 돌아오다니.”
웬일인지 진소월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뜻밖의 요청을 했다.
“옷을 벗어요, 전 가가.”
나는 당황했다.
“그게…….”
진소월이 내 오해를 불식시켰다.
“내 몸을 가려달라고요. 우린 아직 초야도 치르지 않았잖아요.”
“……보기 좋은데 그냥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소?”
“전 가가가 이렇게 엉큼한 사람인 줄 몰랐어요. 어서요.”
진소월의 재촉에 나는 흑색무복의 상의를 벗어 이불처럼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워낙 체격의 차이가 큰지라 내 옷은 그녀의 목부터 발목까지 가렸다.
“이제 만족하오?”
“아직 재회인사를 안 했잖아요?”
말귀를 알아들은 나는 상체를 기울여 진소월과 입을 맞추었다. 얼마만의 입맞춤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명교 구세원에서 독의의 치료에 든 이후 처음이니 벌써 일 년하고도 다섯 달 가까이 지난 셈이었다.
진소월의 호흡이 거칠어졌기에 나는 황홀한 입맞춤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입술을 떼자 그녀가 노골적으로 아쉬워하는 눈빛을 던졌다. 기쁘게도.
나는 독의를 즉결처분했던 조치를 후회했다.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였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나와의 약속을 지킨 셈이 아닌가. 저승에서 나를 원망하고 있을 독의를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자책감에 시달릴 필요가 없었다.
* * *
“그거 알아요? 방금 전 가가가 생사의 위기를 넘겼다는 걸.”
일순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나와 입을 맞춘 건 경솔했어요. 전날의 교훈을 잊었나요?”
나는 진소월의 질책을 달게 받았다.
“소월의 말이 맞소. 실은 나름 조심한다고 했는데 소월의 목소리를 듣고 눈빛을 보니 경계심이 봄날 눈 녹듯 사라지더구려. 이건 내 잘못 만은 아니오. 소월은 늘 나를 무장 해제시키잖소?”
진소월이 특유의 고소를 머금었다.
“헌데 어떻게 된 일이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독의는 나를 이용해 전 가가를 죽일 심산이었어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함께 폭사시킬 계획이었죠. 그의 의도대로 되었다면 전 가가는 무사하지 못했을 거예요. 지금 내 안에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있어요. 독의의 표현을 빌자면 만독(萬毒)의 총화이자 정화죠. 그가 단언하기를 공력으로 환산하면 일천 년이 넘을 거라 했어요. 그걸 폭발시키면 금강불괴지신이라도 단번에 박살낼 수 있다고 장담하기도 했죠. 허풍이 아니었을 거예요.”
“그렇구려. 그런데 무슨 수로 그자의 술수를 막은 게요?”
“나도 바보가 아니잖아요. 의식이 돌아온 순간 독의가 뭘 꾸미고 있는지 알아차리고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어요. 내 뱃속에 든 독단을 내 의지대로 부릴 방책을 강구한 거죠. 지난한 과정이었어요. 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결국 성공했어요. 내 몸뚱이를 전 가가를 죽일 무기로 만들 수는 없잖아요?”
“그러는 동안 독의가 눈치 채지 못했단 말이오?”
“그는 한편으론 스스로를 과신했고 다른 한편으론 나를 너무 무시했어요. 실제로 나는 내 힘으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처지였으니까요. 더욱이 그는 수명이 다하기 전에 목표를 완수하려고 혈안이었던지라 나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어요. 그러지 않았다면 들켰을 지도 몰라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던 독의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단 말인가.
나를 올려다보는 진소월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실은 완벽하게 독단을 통제할 수 있게 된 건 아니에요. 기실 내가 마련한 수단은 미봉책에 불과해요. 아마도 나는…….”
진소월이 얼버무린 뒷말이 무언지 짐작했기에 나는 가슴이 미어졌다.
내 심사를 모를 리 없는 진소월이 나를 위무하듯 빙그레 웃었다. 그러더니 뚱딴지같은 질문을 던졌다.
“전에 모처의 지하에서 만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나요, 전 가가? 내가 관에 실렸을 때 말이에요.”
“일 년하고 이십 일쯤 지났소.”
“아! 그렇게나 오래 되었나요? 몰랐어요. 기껏해야 한두 달이라고 생각했는데.”
“…….”
“그동안 전 가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려줄래요? 저번엔 경황이 없어 내 얘기만 하고 갔잖아요? 다시 깬 후 돌이켜보니 전 가가에게 너무 미안했어요.”
“그러지 않아도 되오, 소월.”
“아니에요. 나는 너무 이기적이었어요.”
“…….”
“어서 말해줘요, 전 가가. 그날 예상한 대로 검왕이 사마 연합에 붙었던가요? 설마 천하가 지금도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는데 나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뺏긴 건 아니겠죠?”
“그렇지 않소. 그들은 모조리 죽었소.”
진소월의 봉목이 크게 떠졌다.
“전 가가가 그들을 처치했나요?”
“마왕과 사왕은 내 손에 죽었소. 하지만 검왕은 도후에게 목이 날아갔소.”
“도후라뇨? 그게 누구죠? 여자인가요? 어떻게 십왕 중 최강을 다툰다던 검왕을 이길 수 있었던 거죠? 검왕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나요?”
나는 하는 수 없이 처음부터 차근차근 지난 일 년 동안의 내 여정을 진소월에게 들려주었다.
* * *
이야기를 마쳤지만 진소월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잠자코 기다렸다. 이윽고 그녀의 분홍빛 입술이 열렸다.
“전 가가는 여전하군요.”
“뭐가 말이오?”
“여전히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다고요.”
“…….”
“그 짧은 기간 동안 여덟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잖아요. 그리고 아홉 번째 고비를 코앞에 두었고요.”
쓴웃음이 나왔다. 그걸 세고 있었단 말인가.
“오늘이 며칠이죠?”
“일월 말일이오.”
“그러면 그자가 지정한 날까지 보름밖에 남지 않았네요?”
“그렇소.”
“대책은 있나요?”
“……최선을 다할 뿐이오.”
“딱히 없군요?”
“…….”
“승산이 얼마나 될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해줘요, 전 가가.”
“나도 모르겠소. 그자의 무력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니. 하지만 나보다 아래는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소. 그렇더라도 맥없이 패배하진 않을 거요. 나는 버거운 강적들을 모조리 날려버린 역전의 명수잖소.”
“하지만 속으로는 결국 성모의 예언대로 그자의 손에 두 동강 날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그럴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 때문에 떨고 있지는 않소.”
“알아요, 전 가가. 알고말고요.”
“고맙소, 소월.”
진소월이 입술을 깨물었다.
“보름이면 시간이 많지 않네요. 늦으면 큰일이니 당장이라도 출발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진소월의 뒷말을 기다렸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는 것은 특별한 결심을 했다는 방증이었다.
“하지만 전 가가를 그냥 보낼 수는 없어요. 가기 전에 대책을 마련해요, 우리.”
“어떻게 말이오?”
진소월의 입술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답변이 나왔다.
“우선 왼손 새끼손가락을 잘라요, 전 가가. 나처럼.”